Walking 바닥 그리고 벽

신민주 개인展   2003_1118 ▶ 2003_1130

신민주_벽Ⅱ_천에 디지털 프린트_67×100cm×4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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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118_화요일_05:00pm

갤러리 아티누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Tel. 02_326_2326

거울들-경험세계에 대한 신민주의 작업1. 거울"중생의 나날과 세월의 표상을 / 모년 혹은 모일에서 통찰해 내는 것. / 세월의 전횡을 / 음악, 속삭임, 상징으로 바꾸는 것. / (...) / 이따금 오후에 한 얼굴이 / 거울 깊숙이서 우리를 응시하네. / 예술은 우리 얼굴을 /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학』 중 Jorge Luis Borges_『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우석균 역, 민음사, 1999, p.134) ● 신민주의 작품들에 대해 말할 글머리부터 한 위대했던 시인의 시 구절을 인용해 온 것은, 그가 피력한 "시학" 혹은 예술론을 상찬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주어진 인간 조건(conditio humana) 안에서, 작은 실천(praxis)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 시구 가운데서 보기 위함이다. '중생의 나날, 세월의 표상, 오후, 우리 얼굴'이 비춰지는 곳은 다름 아닌 '예술'이라는 '거울'이다. 경험 세계는 통찰을 통해 '음악, 속삭임, 상징'으로 바뀐다. 우리의 얼굴이 우리 자신을 깊숙이 응시할 때 그러한 통찰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무슨 아이러니! '응시의 힘'을 깨달은 이 시의 작가 보르헤스는 만년에 시력을 상실했다. 어쩌면 육체적 눈의 상실은 내면의 눈을 더욱 밝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민주_벽Ⅱ를 위한 드로잉_종이에 먹_27×38cm_2003

경험세계를 내면의 눈이 응시하기도 전에, 스펙터클 환상 이미지들이 이미 가공된 패스트푸드 점의 만찬들처럼 우리 눈앞으로 날라져 오는 사회에서 작가는 '어떤 거울'을 들어 '어떻게' 그 세계를 응시해야 할까? 더욱이 보르헤스처럼 관조를 위한 오후의 시간조차 작가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여기에 명쾌한 답을 내놓을 능력도 없거니와 이 시대 작가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론 같은 것은 애초 예술과는 가장 거리가 먼 태도라 생각한다는 점에서 질문의 대답은 내 몫이 아니다. 다만 나로서는 현실을, 인간 조건을, 우리의 얼굴을 반사하면서 반성하는 각각의 작품들이야말로 서로를 되비추는 답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거울은 '나'와 '당신'의 경험세계를 반사(reflection)하면서 반성(reflection)할 테니까. 'reflection'은 ①반사 ②(거울의) 영상, 그림자 ③숙고, 반성 ④감상, 의견 등의 의미를 갖는 기묘한 단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단어에 내포된 뜻들이 열거된 순서대로 인과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며, 모방의 위계에서 영상(影像)이 반성(反省)으로 고양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신민주_벽Ⅱ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_55×75cm_2003
신민주_벽Ⅱ를 위한 드로잉_종이에 먹_27×38cm_2003

2. '영화', '당신', '봄' ● 신민주의 작품들은 그녀의 경험세계를 반사함으로써 자신과 그를 둘러싼 현실을 반성하는 거울이다. ● 주제의 면에서도, 소재의 면에서도, 신민주의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세계는 크지 않다. 그것은 가령 어떤 때는 신민주와 그녀가 본 영화(레옹, 나쁜 피, 소년 소녀를 만나다, 아이다호)였다가, 신민주와 그녀가 있는 장소(홍대 주변의 거리, 바닥, 바)였다가, 심지어 그녀의 얼굴이거나 그녀가 걸쳤던 옷이거나 한다. 설명된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한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않고, 끊임없이 그녀에게로 되돌아온다. 어찌 보면 그녀의 작업관은 구체적 생활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자신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자기애(narcissistic personality)에 가까워 보이며, 사회 내 다른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애초에 그랬을지라도 신민주는 자신이 속한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타자화 함으로써, 오히려 작품이 현실을 단순하게 모사 하거나 자신의 반영이 자기애로 비춰지는 것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서는 작가마저도 '당신', 즉 타자로 호명된다. 거울이 반영한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이 아닌 낯선 자아, '당신'이다. 또한 작업이라는 거울이 반성한 '경험세계'는 '또 다른 세계'이다. ● 이제 우리는 신민주가 어떤 거울을 들어 어떻게 세계를 보는지 그녀 작품을 들어 더듬기로 하자. ● 그녀가 들고 있는 거울 중 하나는 '기성영화'이다. 예컨대 그녀의 1997년 작 『무제』는 뤽 베송이 만든 영화 "레옹"의 시퀀스를 인용한 것이고, 2003년 작 『Imitation-looking』은 한석규가 주연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 한 장면을 빌려온 것이다. 인용하고 빌려왔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의 작품들에서 이 영화들은 따옴표 쳐져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본래 컨텍스트에 따라 모방, 재생되지 않는다. 책에서 뜯겨진 한 페이지처럼, TV 모니터에서 재 촬영되어 영화로부터 떨어져 나온 몇 몇 가상 이미지들은, 지금 여기 작가가 몸담고 있는 곳 아래 혹은 옆에 배치됨으로써 현실과 뒤섞이며 관계 맺는다. 그 뒤섞이며 관계 맺은 이미지들로 구성된 그녀의 작품은 한편으로 (잘해봐야 미술 작품일 뿐인) 또 다른 이미지 신세이지만, 여기 현실을 환기시키고, 가상을 현실화시키는 힘을 갖는다. 신민주의 작품들에서 영화 장면이 이미지 화 된 과정을 예로 들어 그녀 작품이 얼마만큼 실제에서 떨어진 이미지인지 가늠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플라톤이 모방(mimesis)의 최하위 단계로 시와 회화를 들고 그러한 예술의 (부정적이지만)강력한 효과를 경계했다면, 오늘날 모방은 원상인 실재를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단계, 근친상간 적으로 이루어지며 효과는 더욱 강력해졌다. 시나리오 "레옹"이 현실 영상 이미지가 된 것은 생략하더라도, 신민주의 『무제』작품에서 레옹과 마틸다가 걸어오는 장면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레옹" 비디오 테이프 이미지-TV 모니터-장면을 카메라로 촬영- 촬영된 필름 접사 인화. 『Imitation』과 같은 작품은 여기에 더해 실크스크린용 필름(OHP)-캔버스 천(혹은 아크릴 판) 위에 실크스크린 인쇄라는 단계가 더해진다. 몇 중의 이미지 화인지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다.

신민주_벽Ⅰ_천에 디지털 프린트_67×100cm×4_2003
신민주_벽Ⅰ을 위한 드로잉_종이에 먹_27×38cm_2003

"레옹"이 재생되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과 홍대앞 거리풍경이 접사 인화된 『무제』에서 병렬된 이미지들은 어디서부터가 영화 장면이고, 어디까지가 현실 풍경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꿰매어져 있다. 옆구리에 화분을 꿰찬 마틸다는 단발머리를 나부끼며 곰 같은 덩치의 레옹과 함께 저 도시의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그 언덕은 바로 홍대앞 거리로 이어진다. 한석규가 한옥 마루에 등 돌리고 앉아 저 멀리 기와지붕을 넋 놓고 바라보는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장면은 신민주의 『Imitation-looking』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모방된다. 아니 모방된다기보다는 현실과 뫼비우스 띠처럼 순환한다. 14개의 실크스크린 패널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한 남자가 등 돌리고 벽에 붙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에서 시작해 다시 그 장면으로 끝난다. 마치 중국 10세기 구훙중이 그린 『한시짜이의 밤잔치』처럼 『Imitation-looking』은 사진 안에 또 다른 사진이 보이고 있는 형국인데, 이 작품이 재미있는 것은 '보기'가 2중을 너머 3중으로 증폭된다는 것이고, 러시아 인형처럼 자체의 구조 속으로 다시 수렴된다는 것이다. 즉 신민주의 작품을 보고 있는(speculating) 우리는 작품 속에서 벽의 사진을 보고 있는 남자(작가의 모델)의 보기(looking)를 뒤쫓고, 벽의 사진 속 남자(한석규)는 영화 속에 연출된 가상-현실 풍경을 보고 있다(seeing). 두루마리 그림 『한시짜이의 밤잔치』에서 "그림 속의 그림" 중국미술사가 우훙은 The Double Screen에서 "그림을 이미지를 담는 물체이자 동시에 회화적 이미지로 이해"하는데, 그 가장 좋은 예가 그림 속의 그림, 즉 병풍 구조의 그림이다. 구훙의 『한시짜이의 밤잔치』는 그가 책에서 분석한 대표적 예시작품이다. Wu Hung,『그림 속의 그림(The Double Screen)』, 서성 역, 이산, 1999 참조. ● 즉 그려진 병풍은 단지 잔칫집의 소품으로 그림 속 주인공들의 시선을 받지 못한다. 반면 『Imitation-looking』에서 풍경을 보고(seeing) 있는 한석규 사진은 신민주의 작품 속 모델에 의해 응시(looking)되고, 그 응시는 작품이 되어 관람자에게 숙고(speculating)된다. 작가는 이러한 보기의 증폭 혹은 연쇄와 반전을 두루마리대신 14개의 패널을 사용하여 시간성 속에서 가시화 시키고 있다. 두루마리 그림이 말리고 펼쳐지며 순환하는 시간성을 만들어낸다면, 신민주의 14개의 패널은 시간과 시선을 뫼비우스 띠로 순환, 반전시킨다. 다른 한편 작품 구조와 표현 면에서 듀안 마이클의 『사물의 기이함』을 참조한 듯한 이 작품은 현실-가상 이미지-현실이, 쓰여진 단어들처럼 선(線)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되어 있고, 그 차이들이 현실에서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물론 작가가 들고 있는 또 다른 거울, 즉 타자화 된 자신, '당신'이 현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신민주_Imitation-A couple wearing DAKS coat_캔버스에 실크스크린_41×81cm×3_2003

3. 나-스크린-당신 ● 신민주는 오후의 빛이 들이치는 홍대앞 버거킹에 앉아, 그 말끔히 닦인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다. 그런데 유리창이란 게 무언가? 그것은 유리창 저쪽 바깥도 보여 주지만, 유리창 안의 이쪽도 비춘다. 유리창은 창이자 거울이다. 다시 신민주는 오후의 빛에 반짝이는 버거킹 유리창을 거울삼아 자신을 스크린 한다. 스크린 된 자아는 여전히 '나'이지만, 대상화된 '나'여서 타자처럼 외부에 서 있다. 신민주에게 있어 그 외부는 앞서 살펴 본 것처럼 현실과 가상 이미지가, 생활과 영화가 중첩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의 시선 아래 놓이는 공간이며, 작가 자신이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발가벗겨 놓아보는 곳이기도 하다. ● 신민주가 자신을 작품 속에 기입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다. 물론 미술의 역사에서 보건대 대다수의 작가들이 자화상으로 자신을 작품화해왔다.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예술이란 한 개인의 감정을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라는 콜링우드의 관점을 따른다면 작가 자신이 투여되지 않은 예술작품이란 없다. R. G. Collingwood, The Principles of Art, Oxford University Press, 1938, p. 134 참조. ● 그 시점은 아마도 1995년 작가의 석사학위 청구전 작품들로 거슬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작가는 자신을 대상으로 바라봤다기보다는 그 무렵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약간의 우월감과 약간의 냉소와 연민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예컨대 자신의 얼굴 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천 위에 인쇄 한 후, 21개의 틀에 불규칙하게 고정시킨 『그 해에 일어난 알 수 없는 사건-21가지』(1995)는, 작가의 심각한 표정-내용과 사각형 회화 공간의 해체-형식이 비교적 잘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감정의 잉여가 느껴진다. 또한 1997년 『무제』의 전조라 할만한 작품 『그 해에 일어난 알 수 없는 사건-꿈』(1995)에서 작가는 바바리코트에 마스크로 얼굴 절반을 가린 모습으로 "레옹", "브레이브 하트" 따위의 영화이미지와 오버랩 되지만, 『무제』에서 보이는 자기 자신의 대상화는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 엄밀한 의미에서 신민주가 자신을 대상, 즉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즉자적 존재로 작품 속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무제』에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사르트르는 존재를 대자(對自)와 즉자(卽自)로 구분하는데, 쉽게 말해 대자란 우리의 의식이고, 즉자란 사물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유동하고 불안정한 우리의 의식은 사물화 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즉자적 상태를 지향한다. 그것은 고정 불변의 어떤 물질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대자의 존재가 즉자의 상태로 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이다. 시간성 속에서 무화(無化) 운동을 계속하는 대자의 존재는 타인의 시선 아래서 마치 영화 속 스톱 모션처럼 굳어진다. 이것이 즉자의 상태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어떤 공공의 장소에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상태를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정 정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움직인다면, 회의장에서 다른 사람의 탐색적인 시선 아래 놓인 그는 관찰의 대상이 되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제약된다. 또한 전인적인 모습으로가 아니라 순간적인 모습으로 상대에게 판단되는 것을 감수한다. 신민주는 1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작품 안에 표상하기 위해 자기의식 바깥, 카메라의 시선아래 스스로를 둔다. 『무제』를 다시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은 앞에서 설명한 영화장면과 거리풍경이 병렬된 접사 사진 위에, 작가가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사진이 오버랩 되어 있다. 마치 자동인형이 걷고 있는 듯 뻣뻣해 보이는 작가의 신체는 대중문화와 현실 사이를 "느리게 산책하듯이" 박영택, 「텍스트로서의 육체」전시 도록. 1997. 금호미술관. 신민주 『무제』에 대한 글을 참조할 것. ● 걸으며 지각으로 텍스트를 쓰고 있는 능동적 육체가 아니라, 욕망의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바로 그 주인의 시선 아래 관찰되고 있는 대상-신체로 보인다. 문화적 현상 사이를 산보자(flaneur)처럼 소요한다고 보기에는, 『무제』안에서 작가의 신체는 전면적으로 관람자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그녀가 향해 가고 있는 방향이 아래 놓인 영화와 풍경 사진의 방향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작가이미지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 앞의 마네킹-사물처럼 관람자의 눈에 거추장스럽기도 할 것이다. ● 나는 일견 거추장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타자화 된 자기 이미지가 그녀 작업에서 꼭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 나아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예술이라는 거울'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민주가 자신을 대상, 타자로 낯설게 만든 작업은 1997년 이후 작업들에서 꾸준하게 수행되었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작품 안에서 자신을 타자로 놓고 자신의 경험세계를 반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신민주_무제_실크스크린, 트레팔지 중첩_85×65cm×2_1997

4. 바닥 ● 신민주의 근작들에는 앞서 살펴봤던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도, 작가 자신의 이미지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몇 장면이나 작가의 타자화 된 신체가, 경험세계를 보기 위한 일종의 매개 혹은 그 세계에 대한 반성의 상징이었다면, 이제 작품은 그러한 중간과정을 외삽하지 않고 바로 경험세계를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난 경험세계는 한편으로 실제 그녀가 움직였던 물리적 공간이지만, 작가의 소소한 생각의 편린들이 투사된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길을 걸으면서 자기의식 속에 여러 얽히고 설킨 장면들을 전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단발머리 계집 마틸다에 혹했던 어떤 여자는,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그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중이다. 현실에서도 이제는 자신이 마틸다의 역할이 아니라, 레옹의 역할이라 생각하면서. 데려다 주고 돌아서서 혼자 오는 길은, 지저분한 도시의 길바닥에도 시선을 줄만큼 충분히 호젓하거나 개인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거나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거나 할 때는 '절대로' 길바닥을 보지 않는 법이다. 하늘을 보는 경우가 현재 자신이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행해지며, 현재 하고 있는 생각에 더 골몰해질 때이다. 이제 신민주는 자신이 이전에 가짜 현실 영화 옆에 투사했던 진짜 현실(이라 우리가 믿는)공간, 그 홍대 주변 거리를 어떠한 오버랩 이미지도 없이 걷는다. 바닥을 응시하면서. 그 자체에 대해 사고하면서.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거울은 영화 장면으로 외삽되거나, 타자화 된 자기로 외면화되지 않는다. 그 안에 탑재되어 있을 뿐이다. ■ 강수미

Vol.20031118a | 신민주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