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호흡

김미경 회화展   2003_1112 ▶ 2003_1118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35cm_2003

초대일시_2003_1112_수요일_05: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Tel. 02_735_2655

제스처, 행위의 직접적 표출과 회화의 원리 ● 유기적인 선들이 화면을 종횡무진하며 중첩된 김미경의 그림은 하나의 회화적인 풍경을 열어 놓는다. 그 풍경은 감각적이고 내면적인 세계의 형상(재현)과도, 그리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세계의 표출(표현)과도 다르다. 대신, 그 풍경은 회화의 내재적인 원리에 천착한,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화면을 보여준다. 이는 그러니까 화면 속의 이미지가 자기 외적인 어떤 것을 상기시키거나 암시하거나 떠올리게 하는 문학적인 서사의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35cm_2003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만 그렇다.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는 이미지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점이 그 자체 순수한 이미지로서의 점이면서, 이와 동시에 띠끌을 상기시키거나 우주를 상징하듯이, 한마디로 그 자체 순수한 이미지란 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의 눈은 세계를 그저 보기만 하는 객관적이고 즉물적인 광학기계가 아니다. 인간의 눈은 이미 일종의 의식이다. 그 의식은 나와 무관한 세계를 나와 유관한 세계로 변질시킨다. 그러므로 세계란 언제나 내가 대면한 세계이며, 의미의 세계로서 주어진다. 설령 객관적 세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대면하지 않은 세계이며, 내가 모르는 세계이며, 나와 무관한 세계이다. 그러니까 의미에 붙잡히지 않은, 의미로 오염되지 않은 그 자체 순진무구한 세계 또는 순수한 추상회화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53cm_2003

그렇다면 적어도 외관상 추상회화를 닮은, 그 어떤 실재하는 대상도 재현하지 않은, 그저 무의미해 보이기만 한 붓질과 선들로 중층화된 김미경의 그림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작가가 자기 외적인 세계와 대면하거나 그 세계를 자기 내부로 불러들이는 대신, 회화의 지평과 작가의 몸의 지평이 맞부딪치는 지평융합의 한 계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몸의 지평은 그 자체 의미의 지평이기도 하며, 따라서 무의미한 붓질과 선의 궤적을 의미 있는 단서들로 그 성분을 변질시킨다. 그의 몸의 수행은 제스처 곧 행위의 직접성으로 표출되며, 붓질과 선들 그리고 손에 만져질 듯한 안료의 즉물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그대로 작가와 화면과의 일체화 내지는 밀착된 관계를 말해주며, 나아가 작가의 그림의 회화적 원동력이기도 하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0×140cm_2003

김미경의 회화적 원리는 말하자면 스트로크 즉 붓질이 남긴 생생한 궤적과 그 붓질에 실린 행위에 반영된 물질적 감수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회화적 본능과도 통하는 물질적 감수성은 어떤 논리적 프로세스보다는 직관을 통로로 한 감수성의 직접적인 표출과 우연성의 계기에 그 맥이 닿아 있다. 다시 말해서 직관에 따른 행위의 궤적과, 그 궤적의 편린들이 화면 속에서 만들어내는 우연한 조합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흰색과 회색 그리고 검정색의 사이를 넘나드는 무채색의 바리에이션에 반영된 절제와 장식성의 공존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무채색 자체는 색을 거부하는 금욕과 절제를 암시하기도 한다. 상식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정신적인 성질과 장식적인 감수성이 하나로 만나는 것이 모순이지만, 그러나 그 모순은 회화적 원리 속에서 해소된다. 또한 그 회화적 원리는 중첩된 붓질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회화적 원근법의 형태로 나타난다. 붓질과 붓질이 중첩된 화면은 시각적 일루전을 만들어내며, 깊이 있는 공간감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공간감은 조형에 대한 감각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이에 따른 회화적 원근의 암시는 일종의 심리적이고 심의적인 공간이나 원근을 상기시킨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150cm_2003

그리고 이 모든 회화적 원리들은 사실상 밀도와 호흡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화면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대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생리적 속성을 닮아 있다. 붓질은 최초 화면 속에 들어오는 길이 있고 또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유기적으로 흐르는가 하면, 머뭇거리며 머물기도 하고, 화면 밖으로 슬며시 사라지기도 하고, 얼룩을 흘리며 화면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로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미처 다하지 못한 갑자기 힘을 실은 채 주변에 파편을 튀기며 화면 속에서 갑자기 단절되기도 한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5×35cm_2003

붓질이 지나가는 이 모든 길들은 서로 만나거나 밀어내면서 화면 속에 공간을 만든다. 중첩된 붓질이 그 공간을 빽빽한 공기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느슨하면서도 느리게 흐르는 공기로 화면을 성글게고 한다. 붓질과 붓질, 붓질과 화면 사이로 빠져 흐르는 그 공기는 그대로 호흡이며 기(氣)이다. 작가의 행위가 그대로 붓질로서 나타나며, 그 과정에서 작가의 기는 화면의 기와 하나로 흐른다. 붓질을 통로로 하여 작가의 호흡과 기가 그대로 화면에 전달되는 것이다. 이때 지나치게 규칙적인(정형적인) 호흡은 화면을 경직되게 하고, 또한 반대로 지나치게 불규칙적인(비정형적인) 호흡은 붓질로 하여금 화면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그 조율에 있어서는 고도의 감각이 요구된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회화적 원리와 함께 화면 속에서 숨고르기를 하는 호흡, 기, 그리고 감각의 일면이 느껴진다.

김미경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6×53cm_2003

김미경의 그림에 있어서 비정형적인 호흡은 정형적인 호흡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일면적으로는 앵포르멜에 그 맥이 닿아 있으며, 그 비정형성이 곧 회화의 숨통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정형성은 그림에 유기적인 속성과 함께 고유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제스처의 직접적인 표출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는 추상표현주의와 함께 칼리그래피 곧 서체적 회화의 일면이 읽혀진다. 선과 필과 획, 그리고 서체와 드로잉과의 유기적 관계는 최초 이미지의 발생과 관련한 서화동체(書畵同體)론을 암시하며, 이미지와 의미가 서로를 내포하는 관계에 있음을 말해준다. 즉, 하나의 이미지는 이미 하나의 의미이고, 하나의 의미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로써 외관상 무의미해 보이는 검은 붓질들로 축조된 작가의 화면은 그대로 회화적이고 조형적인 이미지(회화적 원리)를 드러낸 것이면서, 이와 함께 심리적이고 심의적인 일종의 의미공간을 표상한 것이다. ■ 고충환

Vol.20031111b | 김미경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