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1105_수요일_05: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 / 협찬_아트앤테크_동진액자
아트파크 서울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 Tel. 02_733_8500
감각적 기억의 환영과 기억 작용의 자율성 ● 박은선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감각적인 기억들을 작품의 구조 속에 직관적으로 재현한다. 즉 자신의 예술적 환영의 범주 안에 논리적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통합적인 감각으로 기억되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보편적인 의식의 방향과 아주 관계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부분은 자율적인 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은선은 이런 자율적 감각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작업과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감각적 자율성의 세계에 대한 작가의 대응방식은 일상적인 언어들을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미학적인 인식의 영역에서 엄밀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감각적인 것들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의 내용들을 구성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감각활동은 확연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인간의 의지나 삶에 대한 지향성을 통해 표면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경험을 포함한 외부의 자극-물론 박은선의 경우에는 주관적 경험이든 객관적 현실이든 미학적 현상들이 자극의 주요 내용이 될 것이다-을 통해 촉발되는 상대적인 것이고 또한 좀더 내밀하게 우리 삶에 내재화되어있는 내용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은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의 의미를 설명하고 필요성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필요성을 조형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거나 오해하게 되면 작가의 주관은 사라지게 된다. 작가의 주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은 이미 삶의 필요성을 넘어 삶의 의미에 대한 설명으로 혹은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기술 자체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박은선의 작품 속에는 일상적 삶으로부터 추출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이 하나의 감각적인 상황, 혹은 논리적인 인과성을 통해 하나의 감성적 매개물로 제시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가 의도하는 이미지는 철저히 직관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작품 이미지들이 이미지의 논리성이 아니라 기억에 의거한 감성적 논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가의 이런 작품 분위기를 미국의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이미지로부터 추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선과 호퍼의 유사성은 절대적인 고독 혹은 외면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기다림 혹은 열망과, 그런 고독과 열망 속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마치 다시 하나의 통일적인 우주로 귀환하는 듯한 그런 형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두 작가가 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에 미묘한 차이가 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런 귀환의 의지는 작가는 물론 관객의 시각적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킨다.
호퍼의 작품에서 그림 속 화면의 주인공들은 어떤 곳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응시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외면한 채 스스로 삶의 의미와 단절하고자하는 듯한 표정들을 가지고 있다. 박은선 작품의 인물들은 세상 혹은 타자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설정하지는 않지만 작가의 내면적인 응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또 다른 미묘성을 지닌 관계를 표출한다. 즉 한편으로 단절적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열망을 통해 세상과의 관계를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 속의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은 박은선의 작가노트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이 세상에 실재하는 존재의 상징으로서 그들이 본래 위치해 있었던 공간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작가가 창조해낸 새로운 공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실재적 공간 속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 공간과 소통하며 적응하여 제3의 존재와 공간으로 화한다." 작가의 이런 언급은 작가 스스로가 작품의 화면 속 인물들을 통해 어떤 소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박은선의 심리적 지향과 정신적인 경향성을 「The Life」라는 작품을 통해서 명확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화면 속의 여인은 여러 개의 의자에 연결된 끈을 잡고 어디로인가 애써 나아가려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우리는 화면 속의 주인공이 작가의 분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다양한 자리, 즉 사회적 위치 혹은 인간적인 속성을 자신의 내면의 정신적인 여과장치를 통해 각각의 의자로 환원시킨 후, 의자로 은유된 삶의 다양한 양태들-일종의 관계로 이 작가의 공간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을 자신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여정에 상징화 시켜 개입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Station」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상징적 전개방식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각 인물들은 서로 한곳에 모여 있고,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타려고 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목적지는 각각 다른 곳일 것이다. 기차를 타려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성과 서로 다른 목적지들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의 다양성, 즉 유사성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간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동일한 공간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이 운용하는 삶의 과정들, 즉 넓은 의미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런 시간성의 차이 혹은 삶의 과정의 근본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차별적인 구조들에 대한 작가의 고찰은 좀더 사변적인 성격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각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묘사한 「Conversation」과 프랑스의 어떤 건물 계단에 앉아있는 두 명의 노숙자를 묘사한 「Two People」에서 이제 박은선은 삶의 일반적인 사건들이 구성하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우리 삶은 만남과 헤어짐을 지속적으로 반복하지만 이런 반복적인 만남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상징적이든 혹은 사실적이든지 간에 관계없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사건은 서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화면 속의 두 인물은 우선 일차적으로 서로 사실적인 공간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이 처한 노숙자로서의 상황으로 인해 2차적인 부분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차적인 공유는 사실적 공간이 아니라 그들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고 시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작가는 스스로 이 두 명의 거지에 대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로 이해하고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즉 그들 화면 속의 인물들이 실제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의미보다는 작가의 시각이 구성하는 삶의 거시적 차원에 대한 반성이 인간적 삶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중요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 이런 시간적인 차원의 지속성과 인간적 사유의 영속성이 작품 「A Man」에서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이태리의 거지를 묘사한 「On the Top」에서 두 가지 상이하지만 공통적인 속성을 가지고 드러난다. 이 두 작품의 화면속 주인공들에게서 관객은 축적된 시간의 모습 혹은 정지된 시간의 시각적 형상들을 볼 수 있다. 「A Man」의 노인의 표정과 얼굴에서 우리는 흔히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창문의 틀 속에 구속되어 있는 노인의 상반신과 반대로 그 위의 화면은 인간이 누리고 살아온-아마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하늘로 뚫린 창문이 있다. 박은선은 표상적으로 드러나는 시간과 본질에 속하는 시간을 이 한 작품을 통해 동시에 보여주고 있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시 작가의 관념의 세계 속으로 돌아가서 보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마치 불교적인 찰나의 순간과 역사 속 제왕들의 영원할 것 같은 정복의 시간이 차이 없음을 우리가 익히 깨닫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광장의 거지를 포착한 「On the Top」에서는 인간적 삶의 다양성이 결국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거지라는 사회적 현상-물론 보편적으로 노동력의 상실 혹은 재산의 상실로 인한 개인적 불행으로 볼 수 있다-에 자신의 인간적 삶에 대한 시각과 개념을 투사한다. 즉 이 작품의 검은색 망토를 걸친 거지의 모습에서 박은선 역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삶의 조건으로서의 시간이라는 배경과 높고 낮음의 차이로 정의되는 사회적 위치와 관계의 상징적인 공간적 특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간과 공간은 서로 중첩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중첩됨으로서 박은선의 작가로서의 작업은 좀더 의미 있는 행위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 인간적 혹은 우주적 순환의 질서에서 가장 기본적인 구조틀 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구조는 이 작가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고, 작가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적 삶의 두 축을 구성하는 시공간의 의미론적 구조틀은 작가 자신의 인식론적인 전환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어떤 공간과 시간으로-이것은 예술적 혹은 미학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공간의 결합이 극대화되는 작품은 벽화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To Be Flat & Continual-Door」를 통해 나타난다. 벽에 테이프로 드로잉을 하고, 환영적인 창조의 필요에 따라 거울을 붙이고, 또 거기에서 더욱 확장적으로 비디오 영상을 도입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개념과 현실, 환영과 실제가 공존하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박은선은 공간적 환영이 창조하는 세계와 자신의 감각적 경험들이 내재해 있는 시간적 반성의 세계를 중첩시킴으로서 자신의 예술적 범주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그녀가 동영상 이미지를 통해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삶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렇게 수용된 삶의 다양성은 시간개념과 운용의 다양성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런 다양성들은 공간적 성격을 띠고 환영적으로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은선의 작품에서는 환영적 요소들이 시간적 요소들을 제어하고 있고 또 시간적 요소들은 작가의 주관적인 개념화 작용에 의해 하나의 공간적 세계로 정위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박은선의 주관적 사유의 방향성을 작동시키는 시간은 작가 스스로가 예술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은 『Two Doors』이다. 전시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주관적 존재의 사유의 지평과 객관적 존재의 실제의 지평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주제이다. 구조를 만들고 있지만, 그 구조는 지속적으로 변화의 차원 속에 존재한다. 변화는 공간에 의해 가능하지만 변화 자체는 시간의 흐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적인 듯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생명체의 존재론적 조건들이 작가적 인식의 차원에서는 환영적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은선의 작품에서 관객들이 과도한 상징성과 장식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공간과 시간을 작품 구성의 주요한 구조적 주제로 도입함으로써 그런 주제의 거시성을 미학적으로 정위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작품구성의 매체적이고 물리적 조건들만이 부각됨으로서 예술적 행위의 결과들이 장식적인 요소로 방치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가는 그런 가능성들을 자기 스스로의 기억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직관을 통해 철저하게 방지하고 있고 오히려 직관적 형식 그 자체로 변화시킨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작가적인 응시의 치밀함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미학적 차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은선의 작품을 묘사할 때 동원할 수 있는 환영, 시간, 공간 같은 의미의 포괄성을 지닌 언어들이 시각적인 차원에서 식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소화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작가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태도가 삶의 주관적 구체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체성은 삶의 다양성을 시간의 구성요소로 환원시켜 준다. 그리고 이런 각 요소적 단자들로부터 발생하는 의미의 다양한 양태들에 공간적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서 박은선은 환원적 태도를 작품의 직관적 형상들과 연결시킬 수 있고 또한 유지시킬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박은선의 미술은 개념적 상황을 서술하는 미술이 아니다. 박은선에게 미술은 감각적으로 기억되는 것들을 화면에 배열하며, 기억의 의미와 보편적 삶의 지향성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To Be Flat & Continual-Door」에 등장하는 계급적으로 천한 신분의 인도 여인의 하염없는 표정 속에서 관객은 삶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인도여인의 존재를 통해 삶의 시간과 인식의 공간이 자기초월적일 수 있다는 것을 직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에 대한 느낌이고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감지할 수 있는 존재의 특성들이기도 하다. 이처럼 존재의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특성들은 삶이 구성하는 공간과 인간 개인의 의식이 구성하는 내면적인 공간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면서 또한 동시에 일상적 삶의 유한성과 삶의 보편적 진실에 대한 내러티브가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우연성에 의해 구성되는 듯한 이 세계의 현상이 사실 엄격한 조화 속에 예정되어 있다는 종교적 해석은 우리 구체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별로 의미 없는 경우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시간의 진행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 인간 삶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도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박은선의 작품에서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동일하듯이 우리 인간 개개인의 삶이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의 지평은 결국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유의 문제로 귀착될 수 있다는 인식론적 혹은 해석적 경험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태도가 진실한 것이라 말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신념이고 개인적 삶의 변증법적 확장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박은선은 자신의 신념 속에서 삶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경험하는 가운데 예술작품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 작가는 자기 삶의 엄밀한 미학적 척도를 생산함으로서 이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되는 것이다. 박은선은 자신의 경험적 기억들에 대한 직관적 감각성을 통해 혹은 감각적인 기억들을 통해 그런 작업을 성취하고 있다. ■ 정용도
Vol.20031105c | 박은선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