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반복되는 시간과 삶의 흐름들

박현정 채색展   2003_1105 ▶ 2003_1111

박현정_주문_장지에 주묵, 수간안료_150×190cm_2003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아주 미술계를 떠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실상 미술평론가로서의 활동은 중단한 셈이다. 더욱이 현장비평이라 할 개인전의 평을 써본 지는 퍽 오래됐다. 그럼에도 박현정의 개인전 평을 쓰는 것은 10년 전의 약속 때문이다. 박현정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나의 공개강좌를 듣고, 문화유산답사에 참으로 열심히 즐겁게 따라다녔다. 그때 나는 그의 미술학도로서의 성실성과 무언가 내면적 울림을 갖고 있는 노래를 듣고 보면서 그의 작가적 기질이 잘 자라나기를 속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림에 매진하기를 바란다며 ?10년 뒤쯤 네가 개인전을 갖게 되면 평을 써주마?라고 말했다. 박현정은 그 말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박현정_어둠_장지에 주묵, 수간안료_210×75.5cm_2003 박현정_자화상_장지에 주묵, 수간안료_210×75.5cm_2003

그러나 내가 꼭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글을 쓸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현정이의 안내로 인사동 표구점에 가서 그의 30여 작품들을 하나씩 펼쳐보면서 나는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 지난 10여 년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며 작업해 왔는지에 대해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는 가운데 일별해 보는 그의 작품엔 어느새, 결코 쉽지 않은 자기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박현정은 대상을 관찰하는 쪽이 아니라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관념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산」 「비」 「바다」 「꽃」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담아내면서 그것을 모두 기호화시키고 문양화시키면서 또 다른 이미지에로 비약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밤」 「어둠」 「환생」 같은 비형상의 주제를 나무와 새 등을 통해 나타내면서 이 기호?문양의 상징성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보든 박현정은 대상과 관념을 형상과 기호로 묶어 상징의 공간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물화로 때로는 기하학적 추상으로 때로는 서정적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남들이 차지하지 못한 공간구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점이 나로서는 대견하고 흐뭇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화가로서 설 수 있는 입지를 그렇게 확보한 것이다.

박현정_대숲_장지에 주묵, 수간안료_143×37cm_2003 박현정_할머니_장지에 주묵, 수간안료_142.5×37cm_2003

박현정의 작품 속에서 내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작품은 「할머니」라는 작품이었다. 돌장승처럼 표현한 작품이야 그 의미를 모를 것 없었지만 고목 아래 바구니를 들고 등을 보이고 있는 할머니와 나무줄기에 얽혀있는 무늬는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중에 현정이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내가 기호, 무늬라고 말한 것은 사실 부적(符籍)에서 따온 이미지의 변형이었고, 할머니를 작품의 소재로 자주 썼던 것은 염불을 외시던 할머니의 그 무심의 경지가 자신의 조형사고를 그렇게 붙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박현정의 모든 작품을 내가 새롭게 보게 하는 열쇠가 됐다.

박현정_바다_장지에 수간안료_62.5×286cm_2003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캔버스를 떠나려고 한다. 더욱이 형상, 기호, 관념, 서정 같은 조형언어를 방기해 버리고 동영상과 행위 그리고 전자, 광선 쪽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런 조류 속에서도 전통적인 화폭을 지키며 그런 현대성이 누락시키는 현대성을, 그것도 일상의 평범 속에서 잡으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박현정은 따블로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선적이지도 않은 의미 상징이 살아있는 공간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밝고 즐겁고 긍정적이면서도 생의 은은한 의미를 내비치는 자기양식을 만듦으로써 그만의 현대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박현정_목어_장지에 수간안료_58×60.5cm_2003

남이 해보지 않는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현정의 그림이 때로는 기호가 강하여 문양의 단순성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고, 때로는 의미부여가 저만의 비밀스런 견강부회가 될 수도 있다. 또 형상과 기호가 괴리되면 작품의 주제가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현정이와 함께 그의 작품을 하나씩 다시 보면서 낱낱 작품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했다. 이 작품은 위가 약하다, 이 작품은 배색이 너무 튄다. 이 작품은 위를 차단해야 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더 강화시켜야 될 것 같은데. . .하며. 현정이는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듣고 있었고, 나는 지금의 한 화가와 한 평론가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 옛날의 사제관계로 착각한 채 내 소감을 말하곤 했다. 그가 얼마만큼 내 조언을 받아들여 작품에 반영했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10년이 넘어도 선생을 잊지 않고 찾아준 것이 고마웠고, 평을 써줄 수 있을 만한 자기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으며, 다시 사제간으로 대화했다는 것이 즐거웠다.

박현정_꽃_장지에 수간안료_103×57.5cm_2003

박현정의 첫 개인전에 출품될 작품 중 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비」와 「꽃」 그리고 「강」이었다. 이것은 분명 내 개인취향을 말한 것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서는 대상에서 출발한 작품이 관념에서 추출된 작품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말도 된다. 개인전 이후 그의 작품에서 박현정은 모름지기 대상에 대한 관조와 관찰에서, 유식하게 말해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이 아니라 존재론적 접근에로 나아가는 것에 확실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추구된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화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고 기대하게도 하는 것이다. ■ 유홍준

Vol.20031103c | 박현정 채색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