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현대미술展

책임기획_윤재갑   2003_1106 ▶ 2003_1129

Ramesh Kalkur_Untitled_흑백인화_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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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106_목요일_04:00pm

Part 1. ECLECTIC 큐레이터_Dilip Ranade / 코디네이터_Tallur L. N_이주현 B.V.Suresh_Ramesh Kalkur_Sudarshan Shetty_Sujatha S Urala K.T.Shiva Prasad_Dilip Ranade_Tallur L.N

Part 2. I LOVE MY INDIA 큐레이터_Johan Pijnappel / 코디네이터_이주현 Shilpa Gupta_Tushar Joag_Nalini Malani_Sharmila Samant Tejal Shah_Valay B. Shende

후원_한국 문화예술진흥원 / Cultural Network Korea / ART in culture / www.neolook.com

인도현대미술 세미나 2003_1105_수요일_03:00pm~07:00pm 홍익대학교 조형관 E동 103호 주최_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

토탈미술관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5-3번지 Tel. 02_379_0252

1. 주체-이미지와 타자의 눈_Self-image and Ohter's Eye ● 어떻게 보면 모든 예술은 주체-이미지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예술가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담고 있고,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폐쇄적 사회에서 매우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다른 문화를 접하고 교류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문화의 시각을 포함한 낯선 시각들을 알아채고 그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상황은 식민통치 하에서 악화되어 드러난다.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개념은 외국의 시각과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스스로의 성질을 부정하게 된다. 19세기부터 근대까지의 인도 미술의 역사는 타자의 눈에 담긴 이미지를 직면하는 자기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 서구적 시각의 강조는 낡은 확정성과의 충돌과, 새로운 의미를 통한 질적 향상을 유발했다. 서구적 시각은 전통적인 주체 이미지의 토대를 파헤치며 그것을 새로운 잣대로 재건하라고 긴급히 종용하였다. 새롭게 독립한 인도는 자기의 이미지를 찾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미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식민주의적 왜곡과, 모더니즘의 영감을 수반했다. 모더니즘은 과거로부터의 자유와 개방이었지만 그 또한 서구적으로 걸러진 것이었다. 동시에, 작가들은 그들 스스로의 뿌리 깊은 정체성에 대해서, 또한 전지구적 위치에 속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확신하게 되었지만, 다른 주체의 다른 시각에 대해서는 그다지 사유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부정하기도 하였다. 타자의 시선은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미묘하게 내부적으로만이 해독제는 예술가들에게 진정한 리얼리티를 다룰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제공하는 현대적 방법이다. 심지어 이 도구는 또한 지역적 정당성과 정통성의 획득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그 변화를 따라 150년 동안의 인도예술은 전통과, 다른 곳에서 온 삶과 법칙들 사이의 융화였다. ■ Marta Jakimowicz

2. 현대 미술관의 현실 바꾸기_Changing Reality of Contemporary Museum ● 미술관은 사회의 의미 있는 대상들을 모으고, 연구하고, 보존하고, 디스플레이하고, 해석하는 기구이다. 인도에서의 영국적인 규칙들은 예술학교나 미술관과 같은 기구를 설립하여 인도 전통예술의 코스를 바꾸었다. 문화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기 위해, 서구식 예술학교는 체계적으로 유럽 전통의 규율들을 주입시켰고, 서구식 미술관들은 작품에 대한 다른 방식의 교육과 감상법을 소개하였다. ● 서구인들은 문화에 대한 오해를 발생시키며 그들 자신의 시각으로 인도예술을 해석했으며, 반대로 인도인들은 인도의 정체성을 희생하면서 까지 서구 예술의 전통과 법칙을 따랐다. 이러한 과정이 불행하게도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붕괴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인도에서의 모더니즘은 사회와 예술 사이의 괴리감을 확장시켰다. 새로운 예술의 양식, 형식, 사상이 넘쳐나고 빠르게 변화함에 따라, 게다가 비전통적인 물질들이 작품 제작에 사용됨에 따라 인도의 관중은 그것을 해석하며 발맞추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공장소에서의 전시와 관객들이 흥미로워하는 것들을 주제로 하는 전시들을 시도하였다. ●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필요한 것은 현대예술의 미술관이 아니라, 예술의 현대적 미술관이다. 예술의 현대적 박물관이란 비관습적인 물질로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존하기 위한 적절한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관중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 운동과 개념들에 친숙해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미술관을 말한다. 이러한 종류의 미술관이 인도의 좋은 현대 미술작품과 전통 예술작품 모두를 수집한다면, 인도 고전 미술과 함께 유럽문화의 개입, 그리고 현대 미술에 미친 그 영향과 현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대중으로부터의 흥미와 감상에 필요한 감수성을 자아냄으로써, 그들이 예술에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Dilip Ranade

3. 우리 시대의 정신; 90년대의 인도 현대 미술_The Spirit of our Time; Contemporary Indian Art in the 90s ● 90년대는 인도 시각 예술에 있어 활기에 넘치고 의미있는 시기였다. 이 세대의 예술가들은 시각 예술의 기존 법칙과 싸워왔으며, 예술적 실천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였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시각적 관습을 무시하고 그 체제와 관객들에 도전해 왔다. 90년대의 시각예술을 하나의 방향성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80년대에 나타났던 바로다Baroda 등의 격렬한 화가와 조각가의 작은 그룹은 붕괴되었다. Chennai-Cholamandal에 모여사는 예술가들의 자치단체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바타avatar로 살아남았다. 공동체의 노력이 개인적 태도에 용해되었다. 이 개인적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거대한 세계 지도 속에 위치시켰고, 그들의 관심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인도/아시아의 지역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에너지. / 지역적 작업이나 설치에 사용할 비관습적인 재료 탐구, 아카데미즘을 넘어서는 예술적 실천을 위한 새로운 연합인 Khoj, Open Circle, Sahmat과 같은 집단 공방들. / 나머지는 사진이나 비디오 등의 기술을 수용한다. ● 인도의 모더니즘은 모더니스트 미학과 20세기의 늦은 국제적 모던 양식의 관점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제국주의와 국수주의의 다른 상황들은 자의식이 강한 인도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시각 문화의 전략에 강렬한 경계심을 더하게 한다. 모더니즘의 전략은 우리의 상황과 시간적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절충주의적인 다른 문화간의 조우는 새로운 인식과 표상의 방식을 출현시켰다. ● 국제적 모더니즘의 두 번째 국면은 문화적 특성이나 편협한 국수주의를 넘어섰다. 1900년대는 모더니스트가 신봉하던 틀을 깨려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주류는 훨씬 도전적인 주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상업 화랑과 국제 경매기구들의 강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상업화를 비판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갤러리의 하얀 사각형의 공간은 도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체된다. 시각예술은 공공 영역으로 들어왔고 새로운 방식의 실천이 두드러졌다. 문화다원주의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통치되는 지구촌의 새로운 만트라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이종교배적hybid 시각 언어가 나타났다. 파편화, 인용, 그리고 문화 다원주의가 두드러졌다. 개인성은 정치적이 되었다.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도시적 고민이 새로운 시각 언어의 부분을 구성하였다. 전지구적 영역에서 지역적 정체성이 강조되었다. 인도의 작가들은 서구에 의해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된 상투적인 것들을 전도하였고, 제3세계의 새로운 비판이 제시되었다. ■ Suresh Jayaram

Suresh Jayaram_Negotiation_종이에 혼합재료_2003

4. I LOVE MY INDIA_video art & society ● 여섯 살 소년의 입 속에 가솔린을 쏟아 붓고는 불붙은 성냥을 던져 넣었다. 소년은 폭탄처럼 터졌다. ● 만약 우리 이미지의 세계에서 우리의 자라나는 경험을 빠르게 다듬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텔레비전이라고 불리는 그림 상자를 통해 우리를 파고드는 폭력적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눈은 그 민감함을 잃어가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를 창조한다는 인류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다. 문명화라는 것은 그 빛을 그리도 쉽게 잃어버리는 한겹의 니스칠 같은 것인가? 우리는 실수일 따름인 모더니티로 끝나가고, 슬픔이라는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야하는가? 이것이 21세기 우리 지구의 새로운 노래인가? ● 처음에 인용된 섬뜩한 이미지는 2002년 구자라트Gujarat 폭동 목격자의 진술을 나타낸 것이다.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는 '다양성 속의 통합성Unity in Diversity'라는 비디오 작품의 끝에서 그것을 다시 이야기한다. 이 비디오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인도 화가 바르마Raja Ravi Varma의 '음악인들의 우주Galaxy of Musicians라는 작품을 차용하였다. 이 회화작품은 철학자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da가 종교적 오르소독스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했던 1893년 시카고 세계 종교 세미나(World Congress of Religions)에 출품 되었다. 그 시기는 인도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자유를위한 투쟁에 열정을 쏟는 때였다. ● 구자라트 폭동은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뉴스는 아니었지만, 인도 사회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사실여부와 결과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어떻게 762명(비공식적으로는 2000명)의 사람들이 죽었는가, 113697명이 종교 캠프로 피신하였는가? 이것은 1947년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으로 시작된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무력 충돌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것은 21세기에는 문명과의 충돌이 우리의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또다른 증거인가? 컴뱃Combat지는 2004년 3/4월호에서 이 사건을 학살이라고 크고 두꺼운 글씨로 표기했다. 반대로 국방부 장관 페르난드는 선데이익스프레스의 2002년 12월 호에서, 구자라트는 힌두민족주의의 문제가 아닌, 단순하고 명백한 폭동이라고 이야기 했다. ● 그렇지만 이 발제문은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도 비디오 아트에 대한 것이다. 이 새로운 예술형식은 날리니 말라니, 비반 순다람, 나브조트 알타프의 작업과 함께 90년대의 초반을 전후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거세지는 힌두민족주의 물결에 대한, 1992/93년 봄베이의 폭동과 폭발에 대한 반응이었다. 90년대 후반에는 2세대의 작가들이 등장하였다. 모두해서 약 20여명이 되는 이 작가군은 그들의 예술 작업에 통상 비디오를 사용했다. 이것이 지난 십년간 100여점의 작품을 유발하였는데, 주로 싱글 채널 작업이었으며 비디오 조각과 비디오 설치 작업이 포함된다. 중심이 되는 주제는 전통과 변화 사이의 충돌과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 세계화, 그리고 특히 사회/정치적 상황의 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 사회에 저항적인 작가들에게 있어서 구자라트의 상황은 방아쇠처럼 작용했다. 그것은 일련의 연극, 다큐멘터리, 전시, 비디오 아트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창작 의지를 유발했다. 말라니, 순다람과 나브조트와 같은 작가들은 여기에 속하지만, 쉴파 굽타, 샤르밀라 사만트와 테잘 샤와 같은 젊은 작가들은 속하지 않는다. 투샤르 조아그와 발라이 셴데와 같은 작가들은 이 주제 때문에 처음으로 비디오 작업을 결심하였다. 이 작가들 대부분은 봄베이 출신이다. 이것은 인도 비디오 작가들이 대부분이 봄베이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구자라트와 인접해 있다는 점과 90년대의 격렬한 지역사로 설명할 수 있다. 비디오 작가들의 주류는 여성작가군인데, 인도 실험 예술의 일반적인 상황이 그렇다. ● 세계적인 미술계의 상황을 보면, 중국의 열풍 뒤에 인도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는 다소 작은 규모의 일련의 전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인도의 그러한 실험 미술들은 더 이상 침묵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Tokyo 1998, London 2001, Vienna 2002, Oslo 2003, Berlin 2003과 같은 전시들에서 사람들은 비디오 아트가 차지하는 영역이 확장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베를린에서의 지난 전시 중 35%가 비디오 작가들이었다. 1998년 암스테르담에서 월드와이드 비디오 페스티벌을 발족하며, 아무도 그 첫 번째 국제적 관심을 인도 비디오아트에 둘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전시에는 날리니 말라니, 비반 순다람, 루마나 후세인이 참여하였고, 스테델릭 미술관에서의 학술대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도 시각예술계에서 오직 다섯명의 작가만이 이 매체를 가지고 작업하였다. 고도의 사회의식을 가진 작가들이 이 첫 번째 비디오 작업들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 세계의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이 매체를 저항으로 쓴다는 점은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구자라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일련의 비디오 작업들은 인도 비디오 아트의 역사에 중요한 순간을 차지한다. 그전에는 이만큼 더 다양성과 창조력을 기반으로 한 주제는 없었다. 그것은 다른 관객들을 타겟으로 하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의 시각적인 해석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보여주었다. ● 비반 순다람은 그의 설치작업 Voyage Home에서 옆에 보트의 뼈대가 달린 간디 아슈람의 거대한 수제 종이들 위에 다큐멘터리를 투사한다. 날리니 말라니스의 'unity in Diversity'는 살아있는 그림(tableaux vivnat)이나, 하이너 뮬러의 극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네루비안의 목소리와 같다. 뮬러는 모든 현대인류와 관련된 상처trauma에 대해 묻고 표현하는 작가이다. 투샤르 조아그는 그의 작업 '유령들phantom'에서 자기 자신과의 흥미로운 직면을 보여준다. 변화된 상황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의구심이 봄베이에서의 그의 뿌리와 가족사를 배경으로 이야기 된다. 작가가 쉴새 없이 빠르게 작가가 그의 무력함을 독백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의 내적 경험을 반영한다. ● 샤르밀라 사만츠는 애니메이션을 선택하였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녀는 이 잔인한 역사적 순간을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절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려고 시도한다. ● 다른 작가들은 문화실천주의자들처럼 대중일반과의 보다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한다. 테잘 샤의 작업 '아이러브마이인디아'는 그녀가 쵸우패티 해변에서 실행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녀는 그녀 작업의 제목이 써있는 풍선을 하늘로 쏘아 올린다. 사람들이 놀고 있는 동안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하며 인도의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난해 구자라트의 사태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쉴파 굽타는 그녀가 만든 Blame 병을 팔기 위해 전차에 오른다. Blame 병은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 당신을 탓할 것임을 보장'하는 넌센스한 제품이다. 그녀의 마지막 비디오는 지역 케이블 TV에 Blame 제품을 런칭하기 위한 힌두어와 영어로 된 텔레비전 광고 같다. ● TV문화의 세계의 경험과 관련하여, 발라이 쉔데는 유명한 드라마 마하바라타를 사용한다. 힌두 세계의 창조를 나타내는 이 중요한 서사시의 장면아래에, 구자라트 사태에 관한 최신 뉴스, 사망자와 실종자, 수혈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이름과 숫자를 내보내는 경고판이 설치되어 있다. ● 인도 안에서는 이 작업들은 미술관 체제 안에서 전시될 기회가 없었지만, 몇몇 갤러리에서 상영될 수 있었다. 예술가들이 발기한 봄베이에서의 Open Circle과 Video Road Show에서 공공상영 되었다는 사실이 더 많은 관객들과의 접촉이라는 면을 생각하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작업들이 범세계적 개념주의라는 예술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적 상황을 소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한 장애물이 이 작품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추가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작가들 언어 속의 개인적 신화라는 차단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 사회의 뿌리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이것이 미래에 세계 미술사에 이 작가들을 포함시키지 않을 이유가 되어야 하는가? 그저 싱글채널 작업이므로 소더비나 미술관이 소장할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또는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미술관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있지 않는, 전형적으로 국가를 팔아먹지 않고 있기 때문에? ●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결국 이 작품들은 단순히 충격으로서의 예술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충격 받고 감동 받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이 작가들은 비디오 아트가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새로운 유토피아나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회의적이지는 않다. 자신의 국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눈에 띈다.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가장 최근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정직한 연민을 보여주고, 우리가 어떻게 이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것은 각자의 목소리가 고려되고, 그들이 그들 미래의 자유 혹은 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을 담은 젊은 민주주의의 증언이다. ■ Johan Pijnappel

Vol.20031102c | 인도현대미술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