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1024_금요일_05:00pm
가모갤러리 서울 종로구 삼청동 63번지 Tel. 02_732_4665
'존재의 결여'를 보게 하는 자연의 직관, 혹 직관적 자연 ● 조혜경의 그림엔 하늘과 구름, 숲과 바위, 지평선, 석양이 등장한다. 그중 많은 것들은 그 대상을 쉽게 알아 볼 만큼 재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있어 그것의 원모델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재현된 것이든 추상화된 것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들의 시원(始原)이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하고도 그것들엔 자연을 만나는 조혜경 고유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태도는 일테면 외광(外光主義)의 그것과는 근원적으로 상이한 어떤 것이다.
외광주의적 관점은 자연을 다만 보여지는, 즉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것으로 대상화한다. 그 자연은 일체의 신화로부터 해방되고 어떤 상징성도 배제된 자연이다. "나무와 집과 들판은 잊으라"는 모네를 일례로 들어보자. 그리고는 "그저 여기 파란 작은 사각형, 저기 분홍 직사각형, 저기 노란 띠가 있다 여기면서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화가로서 모네의 궁극적 깨달음이었다. 모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을 더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라 믿었다. 폴 세잔 같은 작가는 더 흥미로운 참조가 될 수 있다. 아마 당대에 세잔 만큼 자연을 마음껏 지각한 다음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작가도 없을 것이지만,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적은 것처럼) "화가는 온 힘을 다 해 자연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 모두 자연을 말하지만, 그것들은 제각각 다른 자연들이고 다른 태도들이다. 자연을 대하는 조혜경의 태도는 모네나 세잔이 보여준 것 같은 이른바 근대적 지각주의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작가에게 자연은 단지 시각적 인식의 객체 이상이다. 그는 오히려 자연을 인식적 관점으로부터 빼돌려, 상징적이고 초월적인 전망 아래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그에게 자연은 어떤 성스러운 차원의 반영으로서, 이미 하나의 거대한 상징체계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혜경의 태도는 "인식하는 주체의 혈관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했던 딜타이(W. Diltheyr)의 근대적 인식론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조혜경의 자연관에선 자연과 주체에 관한 근대의 인식론적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즉, 그는 자연을 바라보는 주체일 뿐 아니라, 자연에 의해 보여지는-일깨워지는-객체이기도 하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이제 그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자연이야말로 그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즉 자각하게 만드는 힘의 주체인 것이다. 예컨대 그가 스톤헨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구한 시간성이 그의 존재적 유한성을 적시하게 하는 것이다. 유타의 아치, 흘러가는 구름들, 그리고 지평선도 단지 작가가 발견한 '그림이 될만한' 소재들 이상이다. 그것들은 (자신들 앞에 서 있는)인간으로 하여금 결국 자신이 '상황의 지평'이란 것 안에 갇힌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돕는다. '존재의 결여'를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라이프니츠(G. W. von Leibniz)에게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조혜경은 자연의 충만함 앞에서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리라. ●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의 형상들은 나에게 참된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거룩한 아름다움(beauty of holiness)'이다." (조혜경) 그러므로 조혜경에게 자연은 다만 스펙터클의 보고가 아니며, 그 은총은 눈요기나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이상이다. 그의 자연은 그 앞에서 존재가 정복자의 거만함을 버리고 겸허한 학습을 회복하는 그런 자연이다.
또 조혜경의 자연은 기억 속에서 오랜 기간 '숙성'된 것이란 점에서도 외광주의자들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모네에게 자연은 늘 생생한 것이어야 했다. 눈을 들었을 때, 바로 거기서 햇빛을 반사해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고, 머리 위를 스치는 그런 구름이어야 했다. 인식의 면전에서 현재진행형이며 즉물적인,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급박하게 포착되어야만 하는, 일테면 분초(分秒)의 열대 위에서 이글거리는 자연이었다. ● 반면, 조혜경의 것은 기억 속에서 오래 쟁여져 온, 오랜 발효를 거친 숙성된 자연이다. 여기서 시간은 점이 아니라 지속이며, 급박함 대신 숙성제나 발효제로 자연에 관여한다. 이 과정 내내 자연은 경험과 기억의 효소들과 뒤섞이면서, 존재의 한 고백으로 체화되어 정착한다. 조혜경의 색은 기억이 자연을 어떻게 발효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수 있다. 핑크와 에메랄드 그린, 퍼플 같은 인위적인 색은 그의 그림의 중요한 차원이 시간의 지속장치인 기억에 의해 변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대상을 더욱 재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 인위성의 출처는 다름 아닌 조혜경의 가슴에 담긴 꿈과 그리움이다. 어떤 꿈이며 어떤 그리움인가? 핑크에 담긴 것처럼 달콤하며 긴장이 완화된 안식의 꿈이다. 아마도 에메랄드 그린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푸르름, 곧 이상적인 정결함에 대한 그리움이 가 닿은 곳일 것이다. 가끔 보이는 도발적인 퍼플도 조야한 현실에선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대변한다. 이 모두에는 꿈과 욕망에 대한 조혜경의 낭만적 기질, 해석이 깃들여 있다.
조혜경의 그림들은 '그것들' 곁에 잠시 머물렀었던, 자연과의 잊을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되새김질이다. 그의 캔버스들은 기억이 시간 속에서 숙성시켜 온, 선과 붓질과 얼룩들로 된 작은 조각들이다. 지속적으로 흐르는 시간과 기억 속에서의 발생과 변형을 다루는 그것들은 마치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말한 "부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지속하는 구체적 사물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에겐 이 같은 문제제기야말로 존재에 대한 올바른 질문방식이다. "세계는 시간과 함께 짜여져 있고, 존재는 과정 속에서 해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조혜경은 자신의 기억에서 유동해 온 과거를 끄집어내면서, 결국 끊임없는 시간적 관련과 지속 안에서 사는 존재에 관해 되묻고 있는 것이다. ■ 심상용
Vol.20031024a | 조혜경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