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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2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행복의 주물 그리고 범속한 시선 ● 경기도의 촌에 사는 나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 앞에 내려놓으면 근처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첫 담배를 태우는 버릇이 있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시선을 풀어 놓으면 춘천으로 이어지는 외곽순환도로가 보이고 그 건너 잘려나간 산허리 밑에 정토작업을 마친 전원주택단지의 풍경이 두 눈을 쓸쓸하게 만들던 것이 벌써 오래 전이었다. 그러나 황토 빛으로 비어있던 그 계단식 택지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집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이제는 까만 아스팔트 진입로까지 완성되어 삭막하고 헐벗어 보이기만 하던 풍경은 어느 사이 평화로운 이국성의 풍경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어제였던가, 벤치에 앉았을 때 그 아스팔트 경사로 위로는 자동차 한대가 느리게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모두들 중심으로 출근하는 이른 아침, 이쪽 아파트 단지를 등지며 이국성의 풍경 안으로 막 진입하는 느린 자동차의 흐름은 오래 두 눈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자동차가 단지 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언젠가 보았던 R. 애덤스의 흑백 사진한 장을 기억했고 그 기억은 다시 포토 폴리오로 보았던 송유정의 사진들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 기억의 연상 고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편에서는 아파트로 진입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파트 천국 서울을 등지고 주변의 자연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투자공간을 찾아서 도심의 아파트로 전진하는 사람들의 속보를 충분히 이해하듯이 거주공간을 찾아서 전원으로 후진하는 이들의 느린 걸음 또한 우리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아파트의 직립성이 부추기는 상승욕망과 그 규격성이 강요하는 배타적이고 타산적인 삶의 시스템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한 곳에 터를 잡고 그 위에 오래 미루어왔던 '스윗 홈'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스윗 홈'에의 동경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송유정의 사진을 보면서 우선 갖게 되는 긍정적인 느낌은 아마도 그러한 동경이 사진 이미지를 통해 환기되고 그 안으로 재투사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송유정의 사진들은 우리들의 자기투사적인 이해심 뒤에 '정말 그런가?'라는 물음표를 찍는다. 전원주택을 바라보는 송유정의 의심스러운 시선은 조금만 조심스레 사진을 들여다보면 금방 간파되는 '낯설게 하기'의 전략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국풍으로 완성된 전원주택과 파헤쳐진 채로 방치되어 있는 주변자연의 대비가 그것이다. 이 이미지의 대비는 보는 이에게 건설과 폐허의 모순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만드는데 아마도 이 관계를 우리는 주물성이라는 단어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다. 19세기 타락한 부르조아지의 여인들이 영원한 젊음의 주물로 즐겨 목에 걸었던 것이 해골 액서세리 였다는 사실은 자연을 상처내면서 자연으로 은유되는 '스윗 홈'의 꿈을 위해 지어지는 전원주택과 과연 무관한 것일까? 내용물을 폐기 당했으므로 비로소 꿈으로 기능하는 죽은 상징이 주물이라면 자연을 훼손하면서 자연 속에서의 스윗 홈을 꿈꾸는 전원주택 역시 행복의 주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송유정의 시선은 그러나 전원주택의 외양만을 보여주는데서 만족하지 않고 관음적으로 깊어져 그 주택의 주인마저 훔쳐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는 그녀의 사진들이 단지형 전원주택의 풍경을 보여주는 걸 일부러 피하고 홀로 선 전원주택들만을 피사체로 선택하였다는 사실과 그 전원주택의 주변에 사람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사진적 구성을 통해서 송유정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전원주택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의 내면풍경일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홀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전원주택이란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 그건 혹시 자연을 무시하면서 나만의 스윗 홈을 지으려고 하듯 외부와 타자를 생략하고 나만의 행복을 꿈꾸는 이 시대의 집단적 밀폐성 자아에 대한 공간적 은유는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면 창들이 많은 전원주택은 밀폐된 작은 성이 되어 또 하나의 밀폐공간인 아파트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아파트든 전원주택이든 이 시대 자아들이 행복의 주물성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행복의 주물성을 메시지로 전달하는 송유정의 사진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그 안타까움은 나의 경우 조경을 위해 멋대로 뿌리 뽑혀 쉽게 무성해지지 않을 것 같은 어린 수목의 애처로움과 겹쳐지는데 그 애처로움은 R. 애덤스의 사진 한 장을 보면서 느꼈던 애처로움을 닮았다. 예컨대 'Adams County, Colorado' (1973)에서 차갑고 무심하게 열려있는 빈 하늘을 등에 지고 홀로 텅 빈 거리를 건너가는 어린 여자 아이의 모습은 한없이 애처롭다. 하지만 나의 연상고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시선의 발견에 있다. R. 애덤스가 평화로운 소도시 풍경 속에 미만해 있는 불안의 입자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방법론적으로 사용했던 '범속한시선'은 송유정의 시선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전원주택의 외양에 머물지 않고 그 내부로 들어가 보는 이로 하여금 이시대의 징표인 행복의 주물성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은 별다른 테크닉을 구사하지 않으면서 피사체를 카메라 안에 담아내는 송유정의 범속한 시선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송유정의 평범한 전원주택 사진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행복의 안타까운 주물성만은 아닐 것이다. 주물 속에 행복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행복을 기억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그 주물이라는 오래된 변증법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송유정의 범속한 시선이 빛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것 역시 전원주택의 우울한 주물성만이 아니라 그 주물을 통해서 우리가 비로소 기억하게 되는 '스윗 홈'의 아연한 흔적일 것이다. ■ 김진영
Vol.20031022a | 송유정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