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神_the Pink God

2003 한국여성사진가협회 기획展   2003_1015 ▶ 2003_1021

노정하_컬러인화_2003

초대일시_2003_101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애경_김정언_노정하_박애경_방명주_서지영_엄을순_윤은숙 이경애_이미라_임안나_이주영_홍경_홍미선_황숙정

책임기획_김영신 후원_한국문화예술진흥원_한미문화예술재단_네오룩닷컴

인사아트센터 5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분홍신을 신고 대지를 거닐다. ● 한국여성사진가협회의 네번째 기획전이 마련되었다. 이 전시회는 페미니스트 사진가이며 전임회장인 박영숙님, 환경정의시민연대연구소장 한면희님,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의 김영옥님, 이영숙님 그리고 미술평론가 강성원님과 함께 다섯번의 세미나와 네번의 사진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졌다. ● 분홍神이라는 제목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분홍神은 생명을 어머니처럼 항상 보살펴 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이며 동시에 대지를 딛고 있는 분홍신을 상징한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경우 모두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하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생태와 우리 사회를 조명하고 있다. ●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생태 여성론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성 중심, 서구중심, 이성중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황폐화시켰다고 주장한다. 21세기는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이 대립적 관계가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분홍神』은 여성의 고유한 경험과 시선을 통해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생태계와 사회를 보고자 한다. 자연과 인간문명, 남성과 여성이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어울림과 균형이 시작되었던 『분홍神』의 대지에서 잉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총 15명이며,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여성의 부재, 여성의 성에 대한 생각, 생명의 존엄성, 인간의 지나친 욕망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 황폐해진 사회와 생태계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경고, 자연으로부터의 선물, 우주적이며 영성적인 것 등을 표현하였다. ● 전시기획과 이를 기록하는 전시 인쇄물의 제작은 하나의 공동작업이다. 이 작업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김영신

방명주_디지털 프린트_2003

여성사진은 하나의 트랜드를 이루고 있는가? ● 이 글의 목적은 딱 한가지이다. 한국에서 '여성사진'이라는 것이 하나의 트랜드를 이루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서 나타난 여성주의의 트랜드와도 연관되는 일일 것이다. 여성사진을 트랜드라는 점에서 보는 이유는 트랜드가 가지는 장단점 때문이다. 우선, 어떤 현상이 하나의 트랜드를 이루고 있거나 트랜드에 속해 있다면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충실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충실하다는 것이 시대의 일부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시대가 가진 긴장과 에너지와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사진이 시대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될 때, 그러면서 특수한 시기의 흔적을 그 속에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트랜드라고 부른다. 그러나 트랜드의 단점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쉽게 흘러가버리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예술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기록이나 기억도 남기지 않고 그냥 비변증법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너무나 허망하다. 한때는 길거리고 가게고 어디를 가도 틀어대던 조성모의 "아시나요"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허망한 것이다. "~가 트랜드가 됐어"라는 말은 "~는 곧 사라질 거야"라는 말과 동의어인 것이다. ● 따라서 한국에서 여성사진이 트랜드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사진이 이 시대 사진의 문제를 태클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시대 사진의 맵핑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 맵핑 속에 틈을 내고 쪼개버릴 힘이 있는가라는 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여성사진이라는 것이 하나의 불변하는 튼튼한 포스트를 건설하는 일이라면 아주 재미없는 일이다. 결국 어떤 것이 트랜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런 모든 지형들을 고착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유동시키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선은 사진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홍미선_흑백인화_2003

한국에서 사진은 시각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의 타자로서 존재해 왔다. 미술을 좁게 잡아 fine art로 규정할 때, 사진, 디자인, 공예, 건축 같은 분야를 타자화함으로써 미술의 정체성이 구축되고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한편, 사진의 타자는 '여성사진'이라는 분야이다. 한국사진의 주류를 이루는 '남성사진'에 대해서, 여성사진은 밀려나야 할 타자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여성사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뚜렷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여성 사진가가 찍은 것인가(현재로서는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여성적 이슈를 다룬 것인가, 여성성을 구현하고 있는 사진인가, 여성에게 어필하는 사진인가, 등등 여러 차원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여성사진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여성사진이 미술에 대한 타자, 사진에 대한 타자로, 이중으로 타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개개의 작가의 작품이 어떻다고 평가하기에 앞서서, 우선은 '여성사진'이라는 범주가 타당한지부터 검토해 봐야겠다.

김애경_흑백인화_2003
황숙정_디지털 프린트_2003

'여성'사진이라는 규정은 스스로를 여성이라는 주체로 확립함과 동시에 타자로 전락시키는 이중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성이라는 범주를 보편화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은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성중심적 이성관이 지배하는 이 세계상에 대비하여 지구의 여신 가이아를 들고 나오거나, 지구 여신이나 숲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정령을 부활시켜 경배와 찬양으로 유도하는 페미니즘의 조류도 있는 모양이나, 그것은 여성성을 남성성이 지배하는 광대한 영토 속의 조그만 게토로 만들어버리는 것일 뿐이다. 결국 보편화는 지배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지금 해야 할 일은 어떤 조건에서 특정한 범주가 타자가 되었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지도를 그리는 일인 것 같다. 그 다음에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도인 같은 신비롭고 황당무계한 사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회사에 취직하려면 어떤 것들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듯이, 여성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이동과 소통의 경로를 새로 그으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이번 전시를 '여성성의 지도그리기'라고 나름대로 규정해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성이란 것이 어딘가에 구체적으로 잡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성은 여성에게 부여되어 있고 여성 스스로가 자체 생산하는 어떤 특질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공통적인 특질이란 사실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된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상 언어의 구석구석에서 여성성을 얘기한다. 남성의 전유물이던 전문직 영역을 맡은 여성에 대해 언론에 보도할 때 마다 의례히 따라다니는 클리셰인 '여성 특유의 섬세함'에서부터, 여성은 운전을 못한다는 편견에 이르기까지, 여성성은 온갖 부정적인 함의를 뒤집어 쓴 채 작동하고 있는 하나의 기계이다. 결국 여성성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여성성이 어디에 어떻게 퍼져 있는가, 혹은 여성성이란 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모습대로 존재하는가를 따져 보자는 것이다.

박애경_컬러인화_2003
이경애_컬러인화_2003

첫 번째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진이 어떻게 여성성의 기표로 작용해왔는가를 따져 보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사진을 통해 그간 통용되어 왔었던 여성성의 분열적이고 파편적인 면을 극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성성이란 것이 미리 존재해 있다가 사진을 통해 사후에 나타난다는 도식 속에서 이 문제를 봐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사진이라는 기표, 그리고 사진을 이루는 기표 속에서 여성성이 어떻게 구축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 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시선의 문제가 될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보는가, 그 시선 속에서 타자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는가가 관건이다. ● 이미라의 사진에서는 두 가지 시선이 작용한다. 가까운 시선과 먼 시선. 가까운 시선은 이미라 자신의 몸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몸은 서양미술사에 나오는 명화 속의 도상을 따라서 포즈가 취해져 있다는 점에서 먼 시선이 그 위에 겹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극명해지는 것은 서양의 시선 속에서 다듬어지고 평가되어온 서양의 몸매와 동양의 시선 속에서 다듬어진 몸매 사이의 간극이다. 그 간극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그것을 보편적인 범주에 넣기 보다는 그저 개별적인 작품의 실존 속에서 파악했으면 한다. 배경에는 유럽 도시의 모습이 칼라로 들어가 있는데, 이는 흑백으로 나타난 신체와 대비를 이루며, 또 하나의 원경, 즉 먼 시선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시선은 여러 겹이고 여러 층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혹은 관객의 시선이 있다. 사실은 이것이 결정적인 층위이다. 관객이 어떻게 보느냐가 결국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며, 관객은 작품형성의 맨 말단이 아니라 작품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시선 속에서 서양미술사 속의 도상과 한국의 신체는 타협할 수 없는 합체를 이룬다. 그것은 누드이지만 에로틱하지 않다. 누드=에로틱한 대상이라는 등식이 다분히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몸을 볼 때 상투적으로 생겨나는 시선의 반응을 담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라의 사진 속의 시선은 그런 상투성에 대해서 던지는 의심의 눈초리 같은 것이다.

이주영_컬러인화_2003
임안나_혼합재료_2003

여성의 신체의 매력 뿐 아니라 여성성이라는 개념 자체도 상투성으로 전락할 위험을 끊임없이 가지고 있다. 이것도 역시 시선의 문제인데, 시선은 유동하면서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곳을 찾지만 그것을 어떤 지점에 묶어 두려는 관습과 이념은 항상 시선을 시체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체가 된 시선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죽은 의미들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 전시에서 여성작가들이 참가할 경우 콘돔을 소재로 한 작업이 꼭 끼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치 콘돔=성적인 도구=여성성의 표상수단=여성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등식을 낫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성=성적인 것/에로틱한 것이라는 등식도 또한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여성성을 특정한 지역에 한정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성은 특정한 지역에 묶여 이는 기의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기표들이 잠정적으로 어떤 연합을 이루거나 우발적으로 뭉쳐 있을 때 그때그때 붙이는 이름일 뿐이다. 굳이 유명론자의 입장을 빌지 않아도, 이름은 그 자체로 사물과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푯말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성성은 사실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일 뿐이고, 더 엄밀히 말하면 기표의 작용일 뿐이다. 누군가 필요에 따라 기표를 동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동적이고 섬세한 어떤 캐릭터가 필요한 남성이라면 여성성이라는 기표를 동원하여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고,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를 느낀 여성은 여성성이란 기표 아래 자신의 몸을 숨기며, 또 반대로 보호의 장막을 뚫고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있을 때도 여성성을 동원한다. 결국 여성성이란 여러 가지 전략과 전술에 활용될 수 있는 기표이며, 그 의미의 끝은 누구도 봉쇄할 수 없다. 따라서 콘돔과 여성성의 결부는 불안한 파트너쉽이다. ● 방명주가 콘돔의 형태를 다루는 방식이 기표를 동원하는 개별적인 전략의 일부이다. 그녀는 콘돔에 바람을 잔뜩 넣어 팽팽해진 상태를 클로즈업해서 찍었는데, 팽팽한 콘돔은 발기의 은유다. 그러나 콘돔 속에는 공기 밖에 없으므로, 발기는 헛된 것이다. 말하자면 콘돔을 남성성의 기표로 삼기 보다는, 여성이 활용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삼을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이 콘돔도 이미라의 사진 속의 누드처럼 에로틱하지 않다. 그저 조형물일 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끝이 젖꼭지처럼 튀어나와 있고, 그 형태는 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점 때문에 극도로 과장되어 있는데, 이는 발기를 표상함과 동시에 젖꼭지를 표상한다는 묘한 위치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욕망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조형으로서의 콘돔은 욕망의 지역들인 젖꼭지와 발기를 상징한다는 작용을 한다. 여기서 작용하는 등식은 콘돔=욕망의 대상이자 자리=방명주의 사진으로 탈에로틱화된 콘돔=부분에서 에로틱함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콘돔=더 이상 콘돔이 아니라 에로스에 대한 은유의 한 축이다. 이 등식은 방명주의 오브제가 콘돔이 아니라 다른 사물이었다면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등식은 비트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여성성의 표상=특정한 오브제의 동원이라는 등식의 변형이자 파기이다. 과거의 여성사진가들이나 여성미술가들의 전시를 보면 여성성을 표상하고 성찰하기 위해 여성과 관계되는 오브제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은 항상 가사에 묶여 있는 존재이므로 그런 제한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가사와 관계된 실이라든가 바늘 등의 오브제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성=에로스라는 이상한 등식 때문에 에로틱한 오브제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브제의 등장이 아니라 사라짐이다. 특정한 기의가 찰싹 달라붙어 있는 그 오브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성은 물신화된 개념이 아니라 부유하며 작동하는 장치로서 이해되게 된다. 방명주가 찍은 것은 콘돔이 아니라 콘돔이라는 오브제를 빌려서 여성성의 장치가 작동하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엄을순_컬러인화_2003
김정언_디지털 프린트_2003
윤은숙_혼합재료_2003

그렇다면 여성을 위협하는 제1의 요인은 폭력적인 남편도 아니고 주위의 편견도 아닌, 여성성이라는 개념 자체임을 알 수 있다. 여성성은 끊임없이 기표의 자리를 이탈하여 지배적인 기의가 되려 한다. 작가들은 그것을 다시 기표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여성의 초상 둘레에 핑크빛 금을 그어 놓은 김정언의 사진이 바로 그런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성은 어떤 특성이 아니라 하나의 자리이다. 필요하면 찾아가서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 필요가 없으면 떠나는 그런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유동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필요에 따라 그 유동성을 고착시키기도 한다. 대부분 그 고착에는 이유와 명분이 있다. 추석날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학교이기 때문에, 자동차의 구조가 남성 위주로 되어 있어서......... 등등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김정언은 여성의 초상에 금을 그어버려서, 이유가 통하지 않도록 만들어 버린다. 애초에 여성을 찍은 사진은 기의가 아니라 기표이며, 그 기표는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갖다 썼던 것이다. 거기서 원하는 바라는 것이 남녀간의 차이와 차별을 절대화하고 영속화하는 경우에 여성들은 저항해 왔지만, 이제는 저항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의와 기표를 떼어 놓아 자유롭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김정언의 사진 속의 인물들이 공허하면서도 자유로와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파지더미를 찍은 이경애의 경우는 전부터 하던 벽을 찍은 사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굳이 여성 사진가라고 해서 여성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은 남성 사진가라면 남성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진부한 얘기가 될 것이다. 그녀의 사진이 파지의 조형성이나 패턴, 색상 등의 부분적인 면만이 아닌, 파지가 이루고 있는 구조를 건축적 구조로 보고 해석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 여성을 떠나 한국의 사진가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사물의 속성과 상관없는 껍질뿐인 영상미를 추구하는 경향―를 넘어서려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파지더미는 폐허가 된 이 세계의 축소판 같기도 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쫓아내버린 감각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자기들끼리의 엉킴을 즐기고 있는 형국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종이라는 오브제 자체로 볼 때 죽음의 세계이지만, 쓰레기의 입장에서 보면 쓰레기로 활동하는 삶의 세계이기도 하다.

서지영_컬러인화_2003
홍경_혼합재료_2003

길거리의 정원은 매우 독특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도시 속의 자연생태이며, 공공 공간 속의 사적 공간이다. 그리고 죽어 있는 공간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 이주영이 찍은 골목 한 귀퉁이의 화분들―대개는 진짜 화분이 아니라 버려진 욕조나 플라스틱 통들―위에 심어진 식물들은 도시생태의 한 부분이면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이 식물들을 키우는 여성들, 대개는 아주머니나 할머니인 이들이 이 식물에 쏟는 애정과 관심은 대단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행위가 골목이라는 공공공간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의식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더 흥미롭다. 만일 누군가 디자인을 하고 계획을 해서 이런 식물은 여기에 이렇게 심고, 저런 식물은 저렇게 심고, 했으면 이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지저분하고 헝클어져 있으면서도 집요하고 질긴 생명력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포착한 이주영의 사진은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도시생태와 여성의 삶과 공공공간의 변모라는 복잡한 하나의 이슈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축하해 주고 싶다. ● 노정하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 남자관계가 뒤얽힌 연출사진을 보여주고 있지만 거기서 정작 흥미를 끄는 부분은 연출되지 않은 부분이다. 그것은 사진 속의 의도된 이야기를 넘어서는, 혹은 그 밑에 있는 잉여다. 잉여는 죽은 태아가 들어 있는 어항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의 궤적 속에도 있고, 모델이 들고 있는 어색한 금색의 잔 속에도 있고, 황금색 소품들의 키치스러움에도 들어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치밀하게 꾸며진 이야기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꾸미다가 빗나가고 어설퍼진 덧이야기가 그녀 사진의 주요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노정하는 틈을 보여주고 언저리를 드러내고 있지만 작가 자신의 시선 속에는 그런 것들에 대한 의식은 들어 있지 않다. 그 점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다. ● 반대로, 박스 안에 풍경사진을 담아서 사무실이나 바닷가 등 여기저기의 풍경과 비(非)풍경 속에 늘어놓은 임안나의 설치작업은 틈이 별로 없어 보여서 재미가 덜하다. 메시지가 분명한 만큼, 보는 이를 끌어들일 틈을 설치하는 것이 작가가 가장 주의해서 해야 할 일이다. 사람도 좀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이 남을 끌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보면 미장센이 잘 짜여진 영화와도 같이 보이는 임안나의 작업은 오히려 미장센을 깨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해야 완성될 것 같다. ●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은 작가들이 있다. 이들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왠지 핑계가 많을 것 같다는 점이다. '애를 키우느라...........', '재료를 못 구해서', '강의 나가느라 시간이 없어서' 등등. 예술에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들 작업에서는 몇가지 증상들이 보이는데, 아이디어는 있으나 그것을 실현시킬 끈기와 집요함이 없는 경우, 아이디어가 없이 상투성에 몸을 담그고서 어디선가 본 듯한 것을 또 되풀이 하는 경우, 나쁜 의미로 '여성 특유'의 답답하고 스케일 작은 감각에 매달린 경우 등이다. 현실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이런 이미지를 참아주지 않는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여성사진은 하나의 트랜드를 이루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람들은 대개 두리번거리며 바깥을 살펴본다. '저 바깥에 저런 트랜드가 있는데 이번에 하는 일이 그것에 들어맞고 있을까?'하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트랜드가 되는가 하는 것은 바깥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맞춰서 바깥을 개조하는 일이다. 결국 '여성사진이 하나의 트랜드를 이루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번 전시가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만일 이번 전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면 트랜드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이 사라질 것이다. 예술의 현실도 냉엄하기 때문에. ■ 이영준

Vol.20031021a | 분홍神_2003 한국여성사진가협회 기획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