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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22_수요일_06:00pm
갤러리 라메르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Tel. 02_730_5454
은유의 대지에 핀 꽃들_송영애의 추상회화 ● 예로부터 예술은 종교나 철학과 형제지간이라 말해왔다. 이들 모두는 세상에 던져진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고 또한 어디로 가는가하는 물음은 이들 모두의 중심 화두였다. 그런데 이 물음이 빗어낸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적 사상들은 예술가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많은 예술가들이 절대 혹은 본질의 세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학적 성찰을 시도하면서 예술작품이라는 창조물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화가 송영애가 지닌 예술세계의 근간에는 종교와 연계된 면들이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종교적 주제 혹은 개인적 삶에서 얻은 고유한 경험을 표상한 것'이라 말한다. 예술의 한 줄기가 무한하고 절대적인 세계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가져왔다는 점에 비추어 송영애의 이러한 견해는 사실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백색의 캔버스를 대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설래임 혹은 두려움은 절대적 세계를 가시적 대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치루어야 할 값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며 사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송영애는 이번 개인전에 「좋은 땅(Good Land)」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있다. 또한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에 「요나의 기도」, 「축복의 땅」, 「동행」, 「기다림」, 「사랑이야기」 등의 제목을 붙여 놓았다. 그의 작업이 추상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나 작품 제목들이 지시하는 구체적 형태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목들은 작품제작을 둘러싼 작가의 의지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가령 작가의 작품세계가 「좋은 땅」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의 그림은 「좋은 땅의 표상」이 된다는 것이다.
송영애는 자신이 설정한 이 은유의 대지에 다양한 이미지들을 경작하고 있다. 농부가 자신의 밭을 정성으로 일구듯이 작가는 이 축복 받은 땅에 온갖 형상들을 꽃피우기 위해 온 몸과 시간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기도와 사색의 교차하여 흐르고 덧칠과 지움의 수고를 통해 결국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결국 그의 그림은 기도와 사색과 표현행위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창조의 정원이라 할 수 있다. ● 「좋은 땅」으로서 캔버스를 경작하기 위해 송영애가 사용하는 재료와 기법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그가 선택한 재료를 보면 나뭇잎이나 망사천 뿐만 아니라 석고가루, 아교, 커피, 아크릴, 마대캔버스 등이 망라되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페인팅 뿐만 아니라 콜라쥬, 드리핑, 번지기, 긁어내기, 사포질 등의 기법을 적절하게 실행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기법과 재료의 사용은 미술의 영역에서 이미 일반화된 것들이라 할 지라도 주제에 따라 선택적 혹은 종합적으로 적용됨으로서 독자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것은 동일한 씨앗과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농사의 결과는 달리 나타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2001-2003년에 제작된 것들로서 이전의 작업과 비교할 때 변화된 면들이 눈에 띤다. 우선 화면을 이루는 형상들이 한층 단순화되었으며 화면의 구성을 고르게 하는 여백이 여유롭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성을 나타내는 캔버스 표면의 질감 역시 절제되었으나 역으로 완결성이 돋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물감을 다루는 작가의 손작업이 주제의 표현에 점차 부합하는 차원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작업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그것과 연계되어 있지만 작업의 태도와 재료 그리고 방법에 있어 그 영향 속에 가두어져 있다고 볼 수 없는 부분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 송영애의 그림을 크게 분류해 보면 '서정적 추상회화'로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이러한 순수 추상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이전까지의 화력을 보면 상당 기간동안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의 화풍을 지니고 있었다. 구상적 경향에서 추상으로 변하게된 사연이 무엇인지 필자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구상적 경향의 작업들을 실행했던 사실은 그의 추상작업의 가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작가의 예술세계가 구체적 현실에서 시작되었지만 초월적 영역으로 관심이 이동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세계로의 이동은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작가의 관심이 종교와 철학에서 말하는 본질의 세계와 연계되어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송영애는 이제 기도하듯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기도와 명상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현적 예술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기도행위는 결코 조용하고 평화로운 노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림에는 개인으로서 겪게되는 혼돈과 방황의 감정이 스며있으며 자신 혹은 세계와의 대화의 과정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의 작품을 바라보면서 갖게되는 즐거움은 작가의 작업이 화단을 휩쓸고 지나가는 도전적이고 난해한 전위의 열풍에 휩싸이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반영하는 순수성에 있다. ● 송영애의 그림은 은유의 대지에 핀 꽃들처럼 환상적 세계를 드러낸다. 그 꽃의 정체는 한마디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형언어가 지닌 특권으로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 덕으로 그가 피워내는 꽃들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관객들이 그의 캔버스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더없이 자유롭다. 하지만 작가가 지향하는 서정추상의 세계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의 그림에서 작가의 순수한 성품과 세계관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 김영호
Vol.20031020a | 송영애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