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아티누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Tel. 02_326_2326
원본과 해석 사이_Between the Original Work and the Explanation ●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박명래의 사진은 '시간의 빛깔(Hue of Time)'이라는 이름으로 카이스갤러리에서 전시되었던 김택상의 작품을 찍은 일종의 메타 사진이다. 이 전시의 계획에 대해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느림'이라는 주제로 작업해왔던 그의 작품들을 알고있던 나로서는 그 특유의 '느림'의 이미지와 이러한 사진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의아했다. 메타 사진이라는 방식 자체가 주고 있는 개념적인 느낌과 그의 감성적인 사진이 언뜻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업을 한편으로 꾸준히 계속해왔지만, 박명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찍는 사람으로 먼저 알려져 있다. 작가들의 작품을 찍는 오랜 과정을 통해서 그는 대체 사진에 대한 어떤 컨텍스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일까?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작품을 찍은 세리 레빈(Sherrie Levine)의 사진처럼 창작에 대한 개념적 공략을 시작하는 것일까? 전시에 대한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머리 속을 돌아다니던 이러한 생각과 의심들은 그의 작업실에서 작품과 대면했을 때야 비로소 사라졌다.
사진이라는 매체에는 언제나 원본(대상)과 그것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수반된다. 대상을 찍는 작가의 시선과 프레임을 통한 앵글의 구성이 개입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눈의 주관적 해석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이라면,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는 과연 얼마나 스트레이트할 수 있는 것일까? 세리 레빈이나 박명래의 작업 모두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그러나 레빈의 방법론과 박명래의 사진은 정반대의 지점을 향하고 있다. 레빈의 사진은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철저히 배제해도 사라지지 않는 창조성의 신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주시한 창조성이라는 것은 작가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미술계를 둘러싼 시스템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개념적 기호일 뿐이다. 가능한 한 스스로를 객체화시키면서 시스템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세리 레빈의 방식과는 달리, 박명래는 가장 스트레이트해야 할 기록 사진에서 조차도 여전히 남아있는 실제적인 작가의 창조적 흔적을 이야기한다. 그의 사진에 있어서 원본과 그것의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잡아두는 어떤 공간, 어떤 시간의 결에 대해 그 자신만이 포착할 수 있는 감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가장 객관화된 거리에서조차 사라지지 않는, 원본에 대한 해석이라는 이 지점에서 김택상의 작업은 박명래의 작업으로 변화된다. 박명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원본과 해석 사이의 아주 좁은 영역 안에서 얼마만큼이나 박명래 다운 독창성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의 표면, 들판의 표면, 식물의 표면을 찍은 지난 작업들에서 박명래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미세한 움직임의 결이 나타나는 선들을 포착했다. 흥미로운 것은 김택상의 작품을 찍은 이번 전시작들에서도 이와 같은 선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들판을 찍은 태도나 김택상의 작품을 찍은 태도가 결국 동일한 것이라 말한다. 대상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마음을 끄는 어떤 시간의 지층들이 점차로 눈에 들어오고, 그것을 사진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곧 그의 작업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물감의 흔적이 침잠해있는 김택상의 작품을 찍으면서, 그는 분명 바람부는 들판이나 흔들리는 수면 위에서 찾고 있었던 그 시간의 지층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 이상 김택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박명래 자신에 의해서 발견되고, 그의 시선과 교감하고 있는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감성을 접하게 된다. 대상이 바람부는 들판이건 시간의 빛깔을 표현하는 김택상의 작업이건, 박명래에게 있어서 그것은 내면의 심상에 대응하는 특정한 이미지를 추출해낼 수 있는 하나의 표면인 것이다.
누가 보아도 김택상의 작업을 찍은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박명래의 메타 사진은 재현의 영역이 아닌 표현의 영역 안에 놓여있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살아있는 인간의 지각과 연계되어 있는 한,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완전히 나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의 눈이 몸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듯이 객관과 주관의 분리라는 것도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나 객관적인가에 대한 '정도'의 설정만이 가능할 뿐이다. 박명래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눈이 대상을 향하는 순간 대상과 나와의 새로운 관계가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은주
Vol.20031019b | 박명래展 / PARKMYUNGRAE / 朴明來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