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최흥수 개인展   2003_1015 ▶ 2003_1028

최흥수_자화상-방안에서_장지에 수묵담채_130×160cm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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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15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혼자, 몸으로 쓰는 절망 보고서 ● 누구에게나 예민한 감수성으로 깊은 사색에 몰두하는 시절이 있다. 대체로 10대 후반이 그렇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세상에 대하여, 신에 대하여, 특히 인간존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둔 낡은 명제가 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이유이자 목적이다'라는 문구를 만들어놓고는 무슨 큰 깨달음을 얻은 냥 자아도취에 빠졌던 적이 있다. ● 물론 이 명제의 철학적 배경은 개똥철학이다. 인간이 '왜 태어나서 왜 사는가'하는 질문에 대해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식의 하나마나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냥 맴돌기만 하는 생각들의 꼬리를 다시 부여잡고 뱅뱅 도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하이데거나 사르트르가 말한 '던져진 존재로서의 피투성(彼投性)'이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윤리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들도 학력고사에서 적당히 답을 골라내는 수준에서 이해하고 넘기면 그뿐이었다. 그래도 역시 철학의 묘미는 개똥철학에 있다. 결국 이 끝간데 없는 생각의 꼬리는 자신을 지키는 삶의 자그마한 원칙으로 자리잡기도 하지만 알 수 없는 삶의 근원은 늘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최흥수_혼자Ⅰ_장지에 수묵담채_140×200cm_2003

스무살이 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며 운명개척의 주인으로서의 주체를 설파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떠도는 개체이며,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일상 속에서 한없이 침잠하는 나약한 그 무엇이라는 게 짧을 삶을 통해서 확대 재생산된 개똥철학의 결론이다. 그것이 주체철학이든, 개똥철학이든 어쩌면 존재에 관해서는 이렇듯 막연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에 관한 물음은 그냥 잊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나은 문제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어수선한 존재론에 관한 단편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게 있다면 존재와 의식에 관한 유물론적인 명제이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인간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정신, 영혼, 의식에 선행(先行)하는 것이 존재, 물질, 신체라는 것이다. ● 나의 최흥수 읽기는 그의 작업이 유물론적인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철학적 배경이 존재론적으로 유물론인지 유신론인지에 관해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업은 자신의 신체에 근거해서 자신의 영혼을 규명해 나가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체에서 출발한 최흥수의 자아탐색은 절대고독이라는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혼자'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를 유물론자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자아탐색의 출발점으로 삼은 신체이다. 그는 비가시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영혼이 아닌 자신의 신체를 빌어 현존하고 있는 물질로서의 자신을 기점으로 존재의 문제를 탐문해 들어간다.

최흥수_혼자 Ⅳ_장지에 수묵담채_140×200cm_2000

꼬질꼬질하고 구질구질한 일상을 현실로 받아 안는 과정이 최흥수의 작업의 시작이다. 예술가에게 있어 리얼리티라는 게 가능하다면 그 가운데 하나가 자신에 관해 탐문하는 최흥수 식의 리얼리티일 수 있다. 그는 예술가적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자화상을 그 첫 번째 화두로 삼았다. 최흥수의 작품들은 생활인으로서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의 정체성을 사이에 둔 끈질긴 되물음의 산물이다. 그가 되묻는 자아정체성은 결국 '혼자'라는 말로 귀결된다. 그가 '혼자'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아내는 삶의 모습을 담아낸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최흥수_먹물을 던져라_장지에 수묵담채_280×400cm_2002

최흥수의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비상하다. 그는 '시각적 대상에 빗댄 자화상'과 '환자복 연작',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대변하고 있는 '대변(大便) 연작'으로 자신을 들춰낸다. 첫 번째의 연작인 '먹으로 그린 (실내)풍경 자화상'들은 자신의 눈이 응시하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상과 장면들을 그려냄으로써 자신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얼굴 없는 자화상, 즉 풍경 자화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그려낸 연작들이다. '담채의 환자복 자화상'들은 상처와 고통을 대변하는 환자복을 입은 모습의 자신을 그려냄으로써 홀로 절망과 고독의 상황에 처한 자신 혹은 생활인-예술가의 모습을 담아낸다. '카메라로 담은 대변 자화상'들은 인간의 신체가 배설해낸 혐오물질인 똥을 직설적인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그는 신체의 상태를 대변(代辯)하는 대변(大便)이야말로 자신의 신체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 세 가지의 방법을 순차적으로 풀어내보면 최흥수의 밀어붙이기가 점점 더 격렬하게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시각적 대상에 빗댄 자화상'들은 자신의 신체를 그리지 않고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을 표현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최흥수 식의 시니컬한 시선은 먹을 활용한 모종의 장치로 구체화되고 있다. 시선에 포착된 피사체들의 주변부를 진한 먹으로 처리함으로써 바라보는 주체로서의 자신의 신체, 굳이 말하자면 눈꺼풀을 표현하고 있다. 화면 전체는 그 눈꺼풀의 각도와 두께에 따라 바라보는 주체와 시선에 포착된 객체의 관계를 재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다.

최흥수_자화상-여행_장지에 수묵담채_130×160cm_2000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밋밋한 실내공간의 풍경들을 통해서 자신의 심리적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방안에서 우두커니 물끄러미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문뜩 초점 없는 눈동자로 들어오는 평범한 장면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일상의 편린을 통해 평범한 실내 풍경 속에 담긴 섬짓한 고독을 아무 말 없이 드러내 놓는 것이 최흥수 식의 자화상이다. ● 최흥수가 자신의 절망을 드러내는 두 번째 방법은 환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다. 환자복 연작은 절망의 끝을 경험한 자신의 모습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그림들이다. 그는 서른여섯 나이에 일산 북단의 구산동 막사에서 혼자 사는 남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군대를 갔다 온 후 뒤늦게 그림을 시작해서 몇해 전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이제 첫 개인전을 여는 늦깎이 삶이다. ● 그러한 최흥수 자신에게 있어 삶이란 억척스럽게 견뎌내야 하는 힘겨운 그 무엇일 수 있다. 그 힘겨운 삶의 기억들 가운데 하나가 환자복을 입고 기나긴 절망의 문턱을 넘어야 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먹물을 내던지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혼자 누워서 절망적인 고독의 상황을 감내해 내는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 탁자 위에 식칼을 놓고 뒤로 돌아서 모로 누워있는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절하게 절망하는 고독의 나락과 혼자서 절망적인 상황을 보내온 흔적들을 그는 환자복 연작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그는 이러한 작업들을 생산적이지 않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의 되새김'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혼자'인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 그의 자화상은 현재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는 '그 근저에는 과거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종교적 믿음이라는 게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에 대한 버거움을 종교적인 탐문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는 절망과 너저분한 일상에 집착함으로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절망인 존재론적인 고독을 들춰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절망의 상황을 표출하는 것이 '혼자'라는 것이다.

최흥수_봄에는 개가 많이 깔린다Ⅱ_장지에 수묵담채_140×200cm_2002
최흥수_봄에는 개가 많이 깔린다Ⅰ_장지에 수묵담채_140×200cm_2002

그의 절망에 관한 보고서는 대변 연작에서 극에 달한다. 자신의 신체 상태를 대변하는 부산물로서의 대변은 그 수분함유량에 따라 외형이 상당히 달라진다. 딴딴한 응집력을 과시하면서 또아리를 틀어 우뚝 서기도 하고, 퍽 퍼져서 넓게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혼자서 사는 삶 가운데 그는 굳이 자기 자신마저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대변을 시각이미지 기록물로 남겨두고 그것을 전시장으로까지 끌고 나오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두 번 다시 눈길을 두고 싶지 않아지는 일종의 혐오의 대상인 대변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작가의 작업의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 나는 이것이 최흥수 절망 보고서의 극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혼자' 사는 삶에 관한 보고서는 이렇듯 치열하고, 극렬하며 대단히 파괴적이고 급진적이다. 그는 '대중적인 절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아마도 누구나 피할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유한한 생명체의 숙명 앞에 선 존재론적 고독 같을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흔히들 잊으려고 애쓰는 것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인냥 애써 피하려고 하는 저 깊은 바닥에 깔린 문제들을 최흥수는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항문 괄약근의 운동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배설물들의 변주는 이른바 피똥을 싸는 처절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 참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다. 이것이 최흥수 식의 삶의 무게에 대한 항변이자 저항인 것이다.

최흥수_작가의 변_디지털 프린팅_각 25.7×36.5cm_2003
최흥수_자화상-오랜 만에_디지털 프린팅_25.7×36.5cm_2003

이렇듯 다들 잊으려 애쓰는 고독의 상황을 굳이 들춰내려고 하는 예술가 최흥수의 효용성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일상인과 예술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 자신도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고 있으며, 한없는 삶의 버거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묻어두려고 문제, 고독의 상황을 들춰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최흥수가 내딛는 첫 걸음은 그 자신을 삶에 대해서 무책임하지 않은 예술가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제 막 홀로 선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선 그는 예술가의 숙명 앞에서 일상인의 힘겨움을 진솔하게 토로하고 나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여 둘 게 있다. 최흥수는 이미 방법이 아닌 태도로서의 예술을 확연하게 설정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먹을 던져라', 또는 '먹을 독약처럼 사용하라'라는 명제를 통해 예술가에게 있어 매체나 재료 기법 따위가 한낱 방법론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깨치고 있다. 그가 먹그림을 그리던 수묵담채를 쓰던, 아니면 카메라를 들이대던 간에 이미 삶과 예술을 불이(不二)의 것으로 상정해둔 진지함이 있기 때문이다. ■ 김준기

Vol.20031015c | 최흥수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