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1015_수요일_05:30pm
성보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4번지 Tel. 02_730_8478
어둠, 사물의 소리 - 'In a Strange Darkness' ● 황순일의 근작 시리즈 는 요즘 새삼스럽게 부각된 사진예술 이론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이미지와 회화 이미지의 구별을 무색케 하는 손 작업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한때 한국에서도 풍미했던 퇴색한 포토리얼리즘을 한 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최근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일련의 '고기'시리즈를 들여다보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를 테마로 죽은 육체의 현실을 문제삼았던 주제 그 자체는 새로움이 없겠지만, 어떻게 물감이 고기의 살처럼 보이며 사진 이미지처럼 보일 수 있는가를 보여준 기법은 현대회화에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 데 충분하다. 현대미술의 판도를 볼 때, 그의 작품은 설치미술, 비디오 미술, 추상미술 등으로 편식되어져 가는 미적 취향에 균형을 잡아주고 전통적인 그리기 기법을 제고시킨 점에서 매우 뜻 깊다. 여기서 그의 창의적 실험성이 드러나고 회화수단의 새로운 문제제기가 살아난다.
그의 주제는 '허무의 알레고리'이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에서 느껴지는 허무를 꼬집는다. 그의 정물은 모두가 상징적인 기호들로 사용됐으며 우리를 향해 침묵의 소리를 보낸다. 생활의 덧없음을 대변하는 소재들이고 그의 말대로 "삶에 대한 허무를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을 비유한 것이다. ● 조형적으로 보면 그의 회화는 '어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버려진 현대인의 생활용품들, 팝 아티스트들이 선호했던 일상적인 상품들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신문지, 헌 신발짝, 쇼핑 백, 고장난 선풍기... 특히 지난 1999년의 첫 개인전이래 지금까지 그의 화폭 한 구석에 나타나기 시작한 스피커는 이제 중요한 작품소재가 됐으며 이러한 음향적 소재를 회화에 도입하면서 그는 실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둠에서 흘러나오는 음향효과를 살려낸 일련의 작품들은 하나의 중심테마가 되어 그의 작품세계를 한 동안 지배하게 된다. 악보가 그려지고 화폭의 여러 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가 화폭에 잡아두려는 것은 바로 '어둠'과 '소리'였다. 그가 소리에 집착하게 된 것은 소리라는 청각적 효과가 '암흑'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귀에서부터 점점 사라져 가는 소리의 비가시적 성질은 어둠과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제인 허무의 알레고리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어둠의 요소와 침묵의 소리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준다. ● 하지만 스피커 밖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가 반드시 조용한 것만은 아니다. 시끄러운 불협화음으로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이 맥락 없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형체 없이 아우성치는 소리는 한 순간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런데 결국 그것들이야말로 허무한 존재들을 위로하는 슬픈 그림자의 변신일 뿐이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며 돋보이는 폐물의 이면에는, 그의 알레고리 속에는, 현대인의 자멸적인 삶에 대한 비판이 서려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음악적 또는 음향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작품들은 그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 분명히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마련된 전시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올해는 그가 '평론가상'을 수상한 해였고 그에 대한 보답과 기대를 지닌 전시가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상은 전통과 권위를 지녀온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처음으로 제정된 것으로 한국화단에 비평적 시각을 제시하고 참신한 창작풍토를 고무시키는 데 큰 목적을 두고있다. 심사위원단은 사회에 유익하고 미술계에 참신한 비전을 제시하는 건전한 작품을 찾는 데 주목했고 황순일의 작품은 이러한 취지를 충족시켜 주었다. ● 심사기준으로는 창의적 실험성, 조형적인 문제제기, 완성도, 미술사적 맥락과 미학적 가치 등을 두었다. 많은 작품들이 서로 유사한 경향을 지니고 있는 한국 화단에서 견주어 보면 그의 작품은 각별한 창작적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장르를 선택한 것이다. 올해 출품됐던 작품들의 주제나 기법, 양식은 대동소이했으며 예년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이 풍기는 취미와 표현법은 유사하며 동양화와 서양화의 화풍도 서로 닮아갔다. 서로 닮은 그림들이 야간의 세련된 테크닉 차이를 보였을 뿐이데 이러한 현상은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소위 '공모전 화풍'이라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유형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양성은 없고, 실험성은 오히려 모방에 가까웠으며, 상상력은 위축되어 있었음이 안타까웠다.
황순일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가 돋보였으며 서구적 전통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서구적 전통이라 함은 17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허무의 알레고리'와 북유럽의 세밀화, 미국의 포토리얼리즘과 한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의 계보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비판적 양식이 전개됐을 때 그의 작품은 전통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 개척의 길목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더욱 확고해 질 것이 기대된다. ■ 윤익영
Vol.20031015b | 황순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