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o the Dual Space

김정희 조각展   2003_1015 ▶ 2003_1027

김정희_SPACE 2002-8_브론즈, 비닐, 볼트_30×110×40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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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15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종로구 관훈동 170번지 Tel. 02_725_1020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원리. ● 세상을 파악하는 가장 빠른 연산법은 역시 이진법이었다. 1과 0, 채워짐과 비워짐, 낮과 밤, 남자와 여자, 몸과 영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들은 두꺼운 경계를 가지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개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이 둘이 서로 교감하지 않으면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세상은 종종 망각한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역시 선명해지는 현상처럼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대응 값의 크기가 마찬가지로 커져야 한다. 마치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처럼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이들 이항대립적 구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유동적일 수 있다. 좀더 말랑말랑한 사고의 틀로 바라보면 이 같은 이항대립적 구조가 아메바처럼 자기 구조를 탈바꿈하며 다양한 사고의 지류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 다양한 흐름 속에서 '이원적 공간'이란 주제로 두 영역의 보이지 않는 교류를 가시화 시키고 있는 작가 김정희를 만나보자.

김정희_SPACE 2002-9_나무, 볼트_40×90×40cm_2002

보이지 않는 것을 조각한다. 김정희 ● 김정희 작업의 오랜 테마는 공간에 담긴 소리이다. 그래서 이전 작업의 타이틀은 『사운드 스페이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물리적인 소리를 만들어 내는데 천착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를 암시하는 시각 장치만 눈에 뛸 뿐 작품은 지극히 정적이고 고요하다. 당연히 음악을 만들어 내라고 떠밀려 나온 아마추어 연주가처럼 어색하고 막막한 느낌을 지울 수 없건만, 긴 호흡과 함께 한 오랜 사색을 통해 소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에서 물리적 대상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은 감성적인 영역을, 시간적 요소로 이루어진 소리는 이성적인 영역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영역, 즉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간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 공간은 작가에 의해 교묘하게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절대 감성 지수나 절대 이성 지수가 따로따로 존재 할 수 없듯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코드가 만나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정희는 때로는 길게 늘어진 나팔을 통해서 그리고 최근엔 공중에 매달린 다듬질 방망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조각한다. 작가가 연출해 내고 있는 소리의 잔상은 바로 공간 속 대상의 존재를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처럼 일상 속에서 친숙한 오브제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가 만났을 때, 이 둘 사이에 상호 보완적 상관관계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의 상호보완성은 이번 전시의 『이원적 공간』 개념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정희_SPACE 2003-6_브론즈, 대리석_80×45×45cm_2003

텅 빈 의자 그리고 두 가지 공간 ● 의자가 의자로서 기능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네 개의 튼튼한 다리와 엉덩이를 받혀줄 잘 짜여진 나무판, 기대도 끄덕 없을 튼튼한 등받이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정희는 의자 밑의 빈 공간을 정답으로 제시한다. 이유인 즉 "의자 밑의 숨어 있는 공간이 있기에 의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비워진 공간과 채워진 공간과의 상호 역학관계를 전제로 여기에 다시 기능하는 공간과 그렇지 않은 공간 개념을 적용해 본다. 하나의 물컵이 놓여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 컵이 되기도 연필꽂이가 되기도 혹은 그저 버려진 빈컵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그러나 김정희 조각의 공간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이원적 공간' 개념에 입각한 접근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다시 빈컵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던, 분명한 것은 컵을 중심으로 컵 안의 내부 공간과 컵 밖의 외부공간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상태가 컵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힘의 균형을 표면화시키기 위해 작가는 내부공간, 보이지 않는 영역, 숨겨진 공간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만들어 낸다. 「Space 2003-6」에서 작가는 의자의 앉는 부분을 관통하는 다듬이 방망이를 이용해 의자 위 공간과 아래공간, 즉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연결시켜 놓는다.

김정희_SPACE 2003-7_알루미늄_50×600×20cm_2003_부분

공간을 만드는 것은 껍질이 아니다. ● 「Space 2002-8」. 똑 같은 크기 똑 같은 모양의 청동으로 뜬 방석과 투명 플라스틱으로 결합한 방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전자는 재료의 특성상 내부를 들여 다 볼 수 없는 반면, 투명 플라스틱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상상할 틈도 주지 않고 내부를 노출시킨다. 그러나 만일 투명 플라스틱 방석이 없었다면 우리는 청동 방석의 내부를 궁금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대상의 속살을 바깥으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통해 진리란 껍질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 즉 숨겨진 공간, 내부공간, 보이지 않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또 다른 작품에서 작가는 두 개의 커다란 나무 함지박을 결합해 인위적으로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대상의 형상을 규정하는 얇은 껍질은 공간을 구분할 뿐이지 어떤 공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껍질 안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내부와 외부공간의 힘의 균형이다. 그러나 역시 내용물의 정체는 바라보는 사람의 직관과 상상에 맡겨질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김정희_SPACE 2003-1_한지_110×500cm_2003

두 개의 공간은 어디에? ● 전통기와를 연상시키는 종이로 만든 작품 「Space 2003-1」은 마치 물결치듯 볼록한 곡선과 오목한 곡선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낸다. 작가는 이 작품에 이르러 내부공간과 외부공간 개념 자체를 흐려 놓는다. 이로써 내부공간과 외부공간, 보이지 않는 공간과 보이는 공간 등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진다. 오목한 부분을 뒤집으면 다시 볼록한 부분이 되고 볼록한 부분은 역으로 오목한 부분이 된다. 또 다른 작품 「Space 2003-3」은 내적 공간이 담아 낼 수 있는 물질의 양을 상대적인 공간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조금 작은 나무 홈에 에폭시를 가득 채우고 그 다음 나무에도 똑 같은 양의 에폭시를 채운다. 그러나 보다 크게 파여 진 나무 홈 때문에 에폭시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결국 시각적으로 가득했던 에폭시는 나무 홈 바닥에 깔리게 된다. 이처럼 공간의 크기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김정희_SPACE 2003-3_나무, 합성수지_60×50×500cm_2003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표현해 내고 있는 이원적 공간은 조각이 무엇을 어디까지 표현해야 하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낳고 있다. 결국 두 가지 공간, 즉 이원적 공간이란 내적 공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바라보는 관심과 통찰력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물리적 재료의 기교적 표현을 넘어서 공간에 대한 고민, 특히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대한 연구로 이어가고 있는 김정희의 진지함 속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원리란 결국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관찰력에서 생겨난 것임을 확인한다. ■ 이대형

Vol.20031014a | 김정희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