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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08_수요일_06:00pm
조흥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2-12번지 조흥은행 광화문지점 4층 Tel. 02_722_8493
어느, 숨결 ● 하나. 다름아니라 풍경은 절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올 초 언젠가 이승을 하직한 이문구 선생이 김시습의 살림살이를 거슬러 되짚은 어느 소설에서, 山水는 吟風弄月로만 주물러서는 허사가 아닐 수 없고, 꼭 거기 山川에 스민 民生과 아울러 헤아려야 하지, 하는 투로 썼던 데가 떠오른다. 이문구나 김시습 같은 혜안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우리 엄마가 올 추석날 오후, 고추 따다 쉴 참에 무릎을 쉬키느라 주저앉듯 밭둑에다 육신을 부려놓으며 앞산을 바라 "아이고 좋다―!" 하고 한숨까지 섞어 낼 적에, 그이의 육신이 접한 앞 산천이, 산수의 형이상학에 찌든 내 눈으로 바랜 산천하고 어떻게 한가지이겠는가.
또 하나. 사진이 자신의 태에 묻어둔, 저기 저, 살림살이와 죽음살이의 경계. 온 것은 가고야 만다는 가장 관능적인 진리는 사람을 숨죽이게 한다. 한없이 낮은 숨결조차 과도한 풍요로 둔갑시켜 그제서 죽음살이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사진은, 못내 살림살이도, '寫假_한 살림살이, 또, 한 죽음살이를 살고 겪기'의 팔자를 벗기 어렵겠다. 그러니 사진도, 못내 살림살이도, 절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진짜를 형용하고 싶다고 ('寫眞', 또 '以形寫神'_ 어떤 인문적인 꼴을 빌려 넋을 우려내리라) 하는 애타는 바램도, 또, 한 죽음살이를 살고 겪어내겠다는(寫假) 절망에 가까운 겸허한 용기도 다 사진이라는 것의 속내를 엮어가는 것이겠고.
오종은 사진은 말이 없다(누구 사진인들 말이 없을까보냐 하겠지만, 뜻밖에도 말 많음을 감춘 수다스런 사진이 적지 않다). 말을 아끼는, 저 풍경의 자태를 퍽 닮았다고 본다.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풍경을 마음으로 경영하고 거기 묻혀 숨소리 낮추어 빌어먹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태를 퍽 닮았다(그러니 살림살이라는 것은, 또 죽음살이조차, 멍하니 짚어보노라면 '露宿'의 행태를 벗기 어려운 게 아닌지). 한가지로, 가만히 숨소리 내기조차 삼가고서 귀와 마음을 기울여야 겨우 저 풍경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겨우, 풍경이 굼지럭거리며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살을 섞으며 풍경을 이루는 物象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예삿것의 아름다움과 값이 거기에 있지 않은가 하고(名山大川 아닌 곳에서 사람이 大凡해지기 어려운 법이지만, 그건 虛氣를 다스리는 애처로운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凡常한 것이야말로 늘 낮은 데서 묵묵히 우주의 한 哲理를 설파하고 있지 아니한가).
눈을 치켜뜨지 아니하고 수다스런 말을 앞세워 꾸미지 아니함이 오씨의 作意를 이미 대신하고 있다. 물으니 오씨는, "사진으로 일기를 쓰고 싶다"고 하는데, 그 말이 '무엇'에 관한 게 아니고 '어떻게-왜'에 관하여 귀띔하는 것임을 나는 안다(하루간 저지른 자신의 들숨날숨을 되짚어 새기는 일이 日記 아닌가). 본때 있게 作心하지 못하고 바람에 육신을 실어 떠돌며 허우적거리다가, 본때 있게 말을 주워섬기지 못하고 그저 길섶에서 더듬더듬 말 시늉을 내다가, 물 한 바가지 떠 마시듯 얻어온 사진. ● 사라져 가는 것은 옛집이 아니라, 風景-저 어디 풍경의 한 귀퉁이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처럼 露宿하던 사람들의 나지막한 마음 씀씀이, 또, 그리고, 말수를 줄이고 우주적 경관과 더불어 들숨날숨을 경영하던 자태.
나가면서 어울려 시 한 수 ● "마른 시냇가에 서서 / 지난 어느 시간 // 내가 보았던 구름의 / 자국을 찾아본다 // 마른 시냇가에 앉아서 / 한때 구름이었던 데를 만져본다 // 병상에서 / 어머니의 정강이를 만져보듯 / 깡마른 정강이를 만져보듯" _장석남, ?水墨 정원 2―마른 시냇가? 전문 ■ 김학량
Vol.20031010b | 오종은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