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추은영 조각.영상展   2003_1008 ▶ 2003_1014

추은영_모듬젖_미송_25×25×100cm_2000

초대일시_2003_1008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3층 Tel. 02_720_2235

편안하고 유쾌한 위트가 넘치는... #Ⅰ. 첫 개인전을 앞둔 조각가 추은영. 작품은 작가를 닮아간다고 했던가. 우선 그녀의 인상을 떠올려 보자. 방금 시원하게 지나간 소나기 덕분에 물기를 흠뻑 머금은 백합 같다. 그렇지 않아도 깨끗한 순백색 넓은 꽃잎은 더욱 희여져 하늘빛이 비칠 듯하다. 점점이 박힌 진노란 꽃술과 적당히 도톰하게 뻗은 이파리들. 작게 이는 바람에 연신 휘이 젓고 있지만 곧은 줄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백합의 매력은? 은은하지만 긴 여운이 묘미인 강한 향기, 금새 상처받을 것 같지만 제 색을 쉬이 잃지 않는 흰 꽃잎,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진노란 꽃술의 포인트가 그것이다. 아마도 그녀를 오랜 시간 지켜본 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돌아보니 그녀를 처음 만난 인연도 15년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미술가를 꿈꾸며 조용히 땀을 훔치던 소녀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어느 새 자신만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가진 신진 작가의 모습이다. 드디어 자신의 향기를 찾아 아주 긴 시간동안 부드러우면서도 가끔은 강한 유혹을 시작하려 한다. 오늘은 백합을 닮은 여성이 아닌, 백합의 매력을 지닌 어엿한 '작가 추은영'을 바라보자.

추은영_도시와 인간_미송_180×120×40cm_2003

#Ⅱ. 작가 추은영이 선보인 작품들은 목조각이다. 나무는 아주 섬세한 손길을 필요로 하고, 애정을 쏟은 만큼 진한 향기를 발산한다. 또한 나무만큼 사람을 닮은 재료도 드물 것이다. 모든 나무는 제 나이가 있고, 자라온 환경에 따라 제 각각의 특성이 있다. 세월의 묵은 향이 묻어나는 나이테만큼이나, 그의 작품엔 인간적인 삶의 다양한 얼굴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면면은 한편의 파노라마를 펼쳐놓은 듯 볼거리가 풍부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저도 될 수 있고,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어요.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고 느낀 현실적인 문제들을 솔직하게 담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막연한 이야기보다는, 바로 어제 겪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몸에 붙어 식지 않은 생생함을 작품에 담아낼 수 있길 바랍니다." 그녀의 작품은 쉽다. 그렇다고 결코 가볍진 않다. 작가의 바람만큼이나 작품은 직설적이고 솔직 담백하다. 개개의 작품마다 뚜렷한 주제에 따라 연출력이 돋보이는 단막극을 보는 듯 잔재미로 가득하다. 그런데 작품 전체를 훑어보면 한 궤로 이어지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큰 이야기를 전하는 액자소설을 읽는 것과 같다.

추은영_꼬리잡기놀이_미송, 압축합판_130×120×120cm_2003

추은영 작품의 대주제는'현대인의 삶, 그리고 생존하기'이다. 가장 보편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라는 물음을 화두로 건네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비애, 사회 혹은 조직과 나, 또 다른 일탈을 꿈꾸는 현대인의 모습들을 비틀어내고 있다. 온갖 권모술수와 비방, 경쟁, 모함을 이겨내야 하는 냉혹한 '인간시장'을 위트 있게 풍자하고 있다. 작품 속에 투영된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을 찾는 것. 결국 이것이 추은영의 작품을 읽어내는 키워드이며, 작가가 제시하는 현대인으로 살아가는 방편으로서의 아이콘인 셈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끝까지 우울하거나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진흙 펄에서 나오기 전 이미 연꽃 향을 상기하듯, 그렇게 갖은 비운의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속에 살맛 나는 밝은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거울을 보고서야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추스르듯,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대안을 유추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그 속내엔 가장 '인간적인' 동질감이나 유대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가 아닌, '우리'를 이야기한다. 각각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보다 분명해진다.

추은영_현대인의 대화_DVD영상, 미송_가변크기, 영상설치_2003

#Ⅲ. 추은영의 작품을 소주제별로 구분하자면 크게 세 가지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개인으로서의 인간',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등으로 나눠 볼 수 있겠다. 우선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작품으로 「선택」, 「모듬 젖」, 「인간과 환경」이 있다. 작품 「선택」은 생명의 생성 이전을 말한다. 빙 둘러져 여성의 간택을 기다리는 남성을 상징하듯 긴장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매끄럽게 정돈된 중앙의 맑은 에너지군(群)과 둘러 싼 혼재된 기운의 대조는 생명의 원형이 잉태하기 전 카오스를 상징하는 듯하다. 또 작품 「모듬 젖」은 가장 순결한 어린 생명에 대한 존귀함과 존중을 전한다. 어린 아이에게도 자신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골라서 모유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어른들의 갖은 취향을 배려해 마련된 '모듬 안주'에 재치 있게 빗대며 힘없는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작품 「인간과 환경」은 한 나무에서 갖가지 생명들이 한 데 살아가듯,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서의 환경은 수많은 인간의 생성과 성장을 관장한다는 둘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전하고 있다. 다음으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신인간형」과 「인간시장」이란 작품으로 설명된다. 먼저 작품 「신인간형」의 새 머리에 뱀의 몸통을 가진 형상은 의식 없고 교활한 현대의 인간형을 풍자한다. 개인주의거나 이기주의로 굴절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우리 자신을 꼬집고 있다. 그리고 작품 「인간시장」은 한번 살아보겠다며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려고 혈안이 된 현대 젊은이를 개구리에 비유하고 있다. 자신을(이) 필요로 하는 곳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이력서를 써가며 PR에 열을 올린다. 언제나 선택되어 팔려나갈 수 있을까?

추은영_인간시장_미송, 깡통, 프린트_60×120×30cm_2003

끝으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다. 이 부분이 어쩌면 작가의 보다 구체적인 사회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개인으로서의 홀로서기 보다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상생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작품 「도시와 인간」은 현대인의 대표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 문화를 연상시키듯, 한 공간에서 혼자라고 살고 있지만 결국은 본인과 같은 다수의 또 다른 개인들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상호간 상생의 의미가 요구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작품 「꼬리잡기 놀이」는 신분상승을 위해 쉼 없이 줄서기와 줄대기에 여념 없는 현대인을 꼬집는다. 놀이기구 다트에 비유된 현대인은 분명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승부사들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영상작품 「현대인의 대화」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제작기간만 1년 넘게 걸린 비장의 카드이다. 실제의 목조각 작품을 독창적인 캐릭터로 개발하여 다시 영상으로 재편집해낸 것으로써, 캐릭터 주인공들은 얼핏 제각각 다양한 소리를 내는 듯하면서도 똑같은 얘기(노래)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서로의 개인적인 입장만 고집해 결국 소통에는 실패하는 어눌하고 막막한 인간의 모습을 잡아낸 것이다. 이렇듯 작가 추은영의 작품은 여리지만 감동의 긴 여운이 있고, 노련하진 않지만 강한 끌림의 유혹이 있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오랜 생명력이 기대된다. 그래서 추은영의 작품은 백합의 매력과 닮아 있다. ■ 김윤섭

Vol.20031008a | 추은영 조각.영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