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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1001_수요일_05:0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백지에 듬성듬성 썰어 넣은 몽타쥬 ●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떤 몰입을 보여주기는커녕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상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은 이제 낯선 모습이 아니지만 여전히 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알량한 지식이나 얄팍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서 놀라운 무엇을 슬쩍 나눠주는 양 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고, 또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쏟아내는 호소 같은 것과도 일찌감치 길을 달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 그러나 과연 그림은 그렇게 친절한 것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물로 존재하고 독립적인 자신의 어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쉬운' 소통을 단념한 이후 시작되는 활동이 아닐까? 더군다나 시간예술도 아닌 바에야 화면의 시각적 조직 너머로 들어가는 어떤 길, 혹은 창을 차근차근 안내해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어떤 경우 그 길, 혹은 창이라는 것이 작품보다는 보는 사람 쪽에 있는 경우까지 생각한다면 이야기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박형진의 그림을 일과 중에 문득 본다면 그런 만만치 않은 이야기들이 가능할까? 나는 대체로 그의 그림들이 너무 쉽게 이해될 수도 있을 거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는 흔해빠져버린 일상의 소소함이라든가, 어린 아이의 상상력에 기대어 어른의 자의식을 바라보기, 또는 판타지와 현실이 뒤죽박죽되는 생활에 대한 무심한 접근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말로 하는 것과 그림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극이 존재한다. ● 나는 박형진의 신작들을 태풍이 휩쓸고 지난 언저리를 여덟 시간 정도 돌아본 직후 만났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대둔산, 대청호, 월악산, 속리산 등을 거쳐 죽령을 넘으면서 소백산과도 만난 이후 풍기로 들어간 것이다. 태풍이 지난 언저리라고 했지만 표지판 몇 개가 넘어지고, 인삼밭의 검정색 가림 막이 몇 군데 서로 뒤엉켜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태풍의 흔적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차 안에서 경관을 관찰하는 이에게 그런 깊은 속내까지 드러날 일이 없긴 하다. 첫 인상은 대단히 쉽고 명확했다. 시골 풍경은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나 있다는 것 자체로 뚜렷하고 경쾌하다. 그러나 이것은 첫 인상일 뿐이다. ● 시골풍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일견 백지에 사진들을 듬성듬성 썰어 넣은 자유로운 몽타쥬처럼 보이지만 시간차원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지방 도시들에서 발견되는 과거의 기호들은 어떤 실패의 감정을 자아내고 다시 그 자리에는 반대편의 흔적들 - 유난히 시골에서 돋보이는 토목 구조물들, 표지판 안내의 기준이 되는 각종 유원지와 유적 근처 시설들을 강조하는 강한 조명, 그리고 교회나 복지회관처럼 여전히 지역사회의 중심인 공공시설들, 교차로 언저리에 나붙어 있는 환경구호들과 갈등의 흔적들 - 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런 풍경은 너무나 쉽게 멜랑콜리의 파토스를 연상시키지만 언제나 시야 구석에는 기술문명의 흔적이 그 멜랑콜리를 갑작스럽게 낯설게 만들곤 한다. 잘 상상이 안 된다면 계단식으로 일구어 놓은 밭들이 사라지는 풍경 가운데 20여 미터 이상 높이로 솟아오른 수로, 멀리 펼쳐진 들판 가운데 돌출된 파스텔 톤의 아파트 단지와 근경의 쓰레기더미, 어서오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서 있는 갑돌이, 갑순이 인형의 얼굴에 번져간 플라스틱 미소 따위를 생각해보라. 그 거대한 인형들은 녹화사업 열기가 시들해 진 이후 원목이 수입되기 시작하자 전혀 관리를 하지 않아 잡목의 정글처럼 변해버린, 이제는 산림지대 도처에 흔해빠진 숲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도시에서 과거와 미래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차원에서 만나지만 시골에는 역사의 경계지점 - 일종의 자연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도시 공간은 탐정이나 범죄자, 군중과 같은 무심한 매개적 존재들이 과거와 미래를 중개하지만, 시골에서 과거와 미래는 훨씬 윤리적이고 근본적인 색채를 띠면서 더 격렬한 대조를 연출하기 마련이다. '바르게 살자' 따위의 프로파간다가 화석처럼 바윗돌에 각인되어 있다든가, 간만에 만난 읍내 길 양편으로 다방들이 줄지어 서있다든가 하는 장면을 포개본다면 아주 입체적인 심리지도를 작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태풍까지 겹쳐졌으니.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1)적 이미지들에 취해있는 상태의 나에게 박형진은 자기네 사과 절반이 간밤의 태풍에 떨어져 버렸다고 생긋 웃으며 말해 주었다. 나는 순간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이건 리턴 오브 더 리얼(Return of the Real) - 통제 불가능한 자연력의 침입 - 인가, 아니면 플라스틱 파라디소(Plastic Paradiso) - 실재의 침입을 기호학적인 차원으로 바꾸어 다루기 - 인가? 분명히 티브이 뉴스에서 자연재해를 다루는 방식, 자연력을 역사화시키는 제스쳐는 아니다. 물론 이런 유행어들로 그 미소를 묘사하는 것은 난폭한 일이긴 하지만 분석을 빠져나가는 모호한 잔여물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 미소는 독자적으로 울림을 가지는 기표로 남아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인상을 결정지었다. 여기에 사과가 떨어진 것보다 그것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는게 더 슬프다는 그녀의 말이 내 머리에 와서 박혔다. 이 말은 나로 하여금 어떤 의미를 찾도록 강렬하게 압박했다. 미소는 자유롭게 했지만 말은 구속했는데,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일상이 시골 생활의 세부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 한마디로 더 큰 몽타쥬의 일부로 존재한다고 짐작하게 되었다. 여기에 그날 지나쳐 온 장면들이 한 자리에 포개지면서 경쾌하고 뚜렷한 정경들이 더 큰 그림으로, 이번에는 나 자신까지 포함하여, 조립되었다. 시골 풍경의 첫인상을 마지막 종착지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 작업실에서 비교적 원색에 가까운 색면들, 근육이 채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린 것 같은 터치들과 주섬주섬 이어 맞춘 듯한 형태들은 짐짓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아이 장난감과 더불어 편안한 초대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내가 시골 풍경 사이를 지나쳐 온 것처럼 단지 첫인상일 뿐인 그런 분위기는 금새 휘발하기 마련이고 어색한 침묵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림을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시간의 흐름을 타고 읽기도 한다.
(다 떨어졌다_2002)의 경우 농촌풍경은 글자들을 읽어내면서 비로소 재구성된다. 사과들이 태풍에 다 떨어져버린 이후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매직아이의 마술로 전환되면서 관객의 쉬운 기대를 빠져나간다. 여기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쉬운 멜랑콜리의 파토스를 아이러니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면서 사과가 다 떨어져버린 비극적 사건에 대해 거리두기에 성공한다는 의미이다. 결과적으로 '비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꺼내볼 수 있다. 여기에는 단순한 희극도 유머도 아닌, 마치 '발가락이 닮았네'의 경우와 같은 삶의 현실과 기표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멍 멍 멍_2003) 역시 그 두 가지 차원의 관계를 이용하고 있다. 가슴에 멍든 농부의 표정이라니! ● 그러한 긴장은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강화시키기 마련인데, 나는 박형진이 이 요소를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머뭇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테면 그에게 삶의 현실과 기표의 세계 사이의 긴장은 자율적 형식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해의 한 모멘트로서 더 중요해 보인다. 「모자지간 母子之間 (2001~2002)」의 경우 그러한 예술과 삶의 재연결이 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엄마 눈 속에 희구가 있네!"라는 아이의 통찰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인간이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앞의 상대를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한다는 딱딱한 이론적 아이템을 살 냄새나는 정경으로 바꾸고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예술과 삶의 재연결이란 그러한 응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극적인 것은 개구리이다. 개구리는 아마도 그저 이웃한 다른 시선, 우리가 주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상태에서 마주하는 시선의 현존이 아닐 수 없다. 개구리가 없었다면 이 그림은 어린이 용품 광고처럼 지나치게 계몽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공생모자 共生母子_2003)라는 작품제목은 앞에 말한 재연결의 측면에서 또한 주목된다. "나도 사람하고 한 번 놀아 보자!"는 놀라운 아이의 발언에 작가는 아이의 세계를 그림에 끌어들인다. 바이오니클(Bionicle) 로봇이 엄마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 상대에게 인정받는 욕망이야말로 사랑의 근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개구리의 경우처럼 로봇은 여기에서 그런 연결을 매개하는 순수시선의 기표라 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일종의 유토피아라 불러야 할까? 그림의 세부에 걸려드는 단서들을 볼 때 답은 부정적이다. 아이가 공룡이나 바이오니클과 함께 놀거나 가지치기해 준 나뭇가지들을 표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장면(붉은 나무_2003) 등은 전혀 이상화된 장면이 아니다. 이상화 되기는 커녕 그것은 무대위에 고립된, 만들어지다 만 형태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기표의 자율적인 운동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표와 현실이 분리된 채 엉성하게 서로 다른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엉거주춤한 이중적 분절 - 이것이 내가 왠지 머뭇거리고 있다고 말하는 '수행적'인 맥락을 형성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그림들은 유토피아로의 어설픈 도피, 따라서 이어지는 현실의 무기력한 수용이 된다. 수행적 맥락의 독해를 통해서 그림들의 비현실성은 유토피아의 재현이 아니라 그런 유토피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맥락으로 전환된다. ● 화면을 여러 비례로 분할하는 색면들은 형태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차적 장치이다. 여기에 티라노사우르스의 빈약한 앞발, 공룡이라기보다는 돼지에 가까운 트리케라톱스의 형태, 생선의 그것에 가까운 공룡들의 눈, 마치 꿈속의 왕자님처럼 노란색 주머니칼을 공룡들에게 들이대고 있는 희구의 본능적 자세(희구에게 들은 얘기_ 2002~2003_시리즈) 등이 그림을 읽는 시선에 걸리면서 디제시스(diegesis2)의 느낌을 강화시키고, 이제 완전히 비현실화되면서 동시에 현실의 리얼리티를 찬탈해버린다. 왜 본능적 자세라는 말이 튀어나왔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그 포즈가 기관화되지 않은 신체의 직설적인 현존이라고 느껴진다. 실로 어린아이의 신체동작은 그 유연한 살이 보여주는 외면적 곡선보다는 그림에 묘사되고 있는 뻣뻣하고 담백한 직설법에 가깝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 신체는 '움직인다'. 친근한 것들이 순간 기이한 것으로 다뤄지는 것을 통해 유토피아는 더욱 더 철저하게 불가능한 무엇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예술과 삶 사이의 긴장은 실험되고 있다.
그녀가 내게 힘주어 '현실을 끌어안기'를 이야기했을 때 난 화해를 예상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아방가르드 미술이 의식했던 이상한 시간감에 가깝다. 기대가 빗나가고, 죽은 것이 움직이며, 주시되던 것이 주시하는... 전시의 제목이 단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이야기'인 이유도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잘 알려진 대로 어린아이는 말을 배울 때 음절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 의미를 형성한다. 가령 'pa'는 그냥 소리이지만 'papa'는 아버지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반복되는 음절은 앞 음절과 서로 지지하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날 것의 상태인 소음이 기표의 계열로 변형된다. 전체적으로 박형진의 이번 작품들을 지배하는 감각은 그러한 기표연쇄의 이중 작용이다. 이러한 이중 작용은 내적인 논리가 복잡하다 해도 현실과 그것을 비추는(동시에 현실을 기표로 분리하는) 거울이 나란히 서있는 형국이므로 사진의 의미작용과 동일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 독해의 끝에서 그것이 재현하는 최초의 현실을 다시 만나듯이, 박형진의 그림들도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나는 그 그림들을 빠져나오면서 최초에 받았던 쉽고 경쾌한 인상을 다시 받는다. 백지에 듬성듬성 썰어 넣은 몽타쥬처럼.
앞서 말한 시골 풍경의 심리지리로 되돌아 가봐야겠다. 나는 실패의 감정과 그것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문명의 기호들을 대립시켰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지나치게 풍부하거나 노골적이어서 쉽게 의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풍경들이 '말'을 건다면, 쉽게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걸림이 있다면 사람이 등장할 때이다. 그들은 일하고 있거나,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게를 지키고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무심한 거울이미지에 나 자신을 투영해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이고, 그 존재들 때문에 나 역시 풍경에 참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제까지 난 박형진의 그림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요소들을 지적해온 셈이다. 유행하는 이론을 빌어 말한다면 그 단서들이란 풍경의 오점, 혹은 얼룩들인 것이다. 박형진이 실제로 느끼는 삶과 예술 사이의 긴장이란 이 오점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고, 그것은 별로 볼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더 잘 보였는지도 모른다. 단순화된 색면은 그래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실제 시골 풍경의 면분할을 닮은 것도 같다. ● 지난 개인전에서 그는 사과농사를 다소 낭만화된 상태로 바라보았다. 그림들이 꼭 행복한 느낌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행복한 사과'라는 제목을 가졌던 개인전이었고 긴장의 해소를 바랐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삶과 예술이 그림을 통해 화해한다기보다는 그림을 통해 둘 다 낯설게 보이는 지점이 가시화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는 낙향에 대해 여러 가지 인상을 이야기해주었다. 처음엔 콘도에 놀러 온 느낌이라 했다. 고향도 아니면서 고향인 풍기에서 그녀는 한동안 짐을 풀어 놓지 않은 상태로 생활을 했다. 놀러 온 느낌은 좋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한편으로는 낯선 지방과 친숙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에 많게는 다섯 끼씩 밥상을 차려야 하는, 농사일에서는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그녀는 풍기에 적응해 갔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과는 일정한 긴장이 발생했다. 이제 그림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볼 때 그녀는 그리고, 그리고...? 하듯이 계속해서 무언가 부가되면서 과거가 현재로 귀환하는 세상사의 이치를 간직하는 것으로 그 긴장을 다스려나간 것 같다.(친구에게 들은 얘기_2002)
어쩌면 나의 독해는 다소 과잉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을, 그곳에서 작가의 삶을 모르는 이들에게 이 그림들은 어떤 것일까? 혹시 지방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캐릭터들처럼 속마음을 너무 표면에 드러내고 있어서 갑작스레 어색해 보이는 그런 제스쳐로 보이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한다. ● 적어도 담론의 진행양상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걱정은 근거가 있다. 아마도 박형진의 방식은 90년대 초반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형태가 다소 수정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한국 미술에 정상적인 담론의 진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가당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유행은 존재하나 진정한 예술적 성과는 언제나 너무 이르거나 재발견만 되는 중에 스스로의 문제와 씨름해 나가는 작가들은 소외되기 일쑤이다. 따라서 내 걱정은 미술계 담론보다는 오히려 대중문화와의 관계, 사회에서 미술을 이해하는 방식 등에 더 해당된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박형진의 그림들은 일반적인 전위미술 수사학의 위기와 함께 상당히 상업화된 형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그림은 작고 예쁜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고, 실제로 레고(Lego)社의 바이오니클은 그의 납작한 공간에서 그렇게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 나는 무슨 회화의 종말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작가에게 다른 매체를 실험할 것을 요구하는 등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는 것은 회화적 수단이 지금으로서 무책임하게 다원주의 등으로 도피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이 없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서로 소통하지만 공공적인 차원에서는 물신화된 형태로밖에는 만날 수 없다. 아마도 박형진에게 지금 최대의 도전은 바로 그 지점,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온 자신의 회화를 일종의 방법적 기획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과 자신의 그림에 모종의 인류학적 차원을 추가하는 것이 아닐까. 희구의 뻣뻣한 신체는 사과나무 과수원 가운데 놓여서 가지치기의 알레고리와 만날 수도 있고, 바이오니클 로봇은 지형조건 때문에 생겨난 거대한 고가도로 기둥을 배경으로 놓여질 수도 있다. 매직아이는 티켓다방의 현실과 만나며 안락한 자기애에 치명적인 비평이 될 수도 있다. 방법적인 가능성은 지금도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다. 적어도 그의 그림덕분에 난 시골풍경의 비현실적 차원을 읽어내는 하나의 통로를 경험한 셈인데, 나로서는 (희구에게 들은 얘기) 시리즈에 희망을 걸겠다. ■ 전용석
Vol.20030929b | 박형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