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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924_수요일_05:00pm
국민아트갤러리 서울 성북구 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내 Tel. +82.(0)2.910.4465
소리, 삶의 증거들 ● 자연에는 무수한 소리가 존재한다. 인간도 살아있는 유기체인 바에야 이 소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당장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면 쿵쾅거리는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고, 고도로 복잡하고 발달된 소리신호인 말을 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소리는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지표(指標)이다. 그러나 때로 소리는 사람을 지치게 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들이 소리를 매개로 전도하기도 하지만 묵상, 명상 등으로 소리를 억압하기도 하는 것이다. 소리로부터 해방이 진정한 해탈을 약속하는 것일까.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쓴 책 중에서 『침묵의 소리』란 것이 있는데 이 역설적 제목은 또한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팝송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리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정한 내성(內省)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결코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긴 우리의 청각기관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지구도 엄청난 굉음을 내며 돌고있다고 한다. 우주공간도 형용할 수 없는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팽창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소리'를 주제로 한 김석의 작품 중에서 「무게의 소리」는 스피커로부터 전달되는 파동(波動)에 의한 물질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 소리란 음파가 공기라는 매질(媒質)의 밀도변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신호를 말하는데 사실 우리 인간이 공기에 싸여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리에 포위돼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대기 중에서 공기의 밀도 차이는 감지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의 무게는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소리의 세기는 느끼더라도 그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 단순한 일은 아닐텐데 작가는 그것을 '무게의 소리'란 수사(修辭)를 사용하며 위트 있게 표현하고 있다. 앰프에서 전달된 신호가 스피커에서 증폭됨으로써 스피커 위에 올려놓은 가벼운 물체가 마치 가열된 팬에 놓여진 콩이 그 표면 위에서 튀듯 통통 튀는 현상을 이용한 이 작품이야말로 강도(强度)는 있을지언정 질량은 없다고 믿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 소리는 공기 속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변화로서 파동에 의하여 운반되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에너지이기 때문에 크기, 세기, 속도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그 세기는 단위시간 안에 단위면적을 통과하는 에너지로 표시한다. 다시 말해서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에서는 소리가 발생하지 않는다. 「물의 소리」는 소리가 지닌 이러한 속성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다. 즉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의 파장이 수면에 물결의 파장을 일으키도록 의도된 이 작품은 비가시적인 소리를 가시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장르개념에서 회화나 조각과 같은 작품은 조형예술, 공간예술 등으로 분류되어 청각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은유적, 상징적으로만 처리하였을 따름이었다. 예컨대, 「라오콘」의 벌려진 입을 통해 절규와 신음소리를 연상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가 소리를 지배하고, 소리는 형태에 종속된다. 그러나 미술작품에 청각으로 확인가능한 소리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기계공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마르셀 뒤샹이 전원장치를 통해 전달된 전기에너지를 이용한 「회전유리판」이나 모홀리 나기의 작품은 형태와 함께 소리를 작품의 한 부분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소리는 부수적이고 파생적인 것을 뿐이지 그 자체가 작품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의 채집이 가능해지고 녹음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소리 또한 형태나 색채 못지 않게 음악이나 공연예술이 아닌 미술표현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게 되며 그것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존 케이지를 들 수 있다. 마침내 전시장에서 미술작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으나 사운드 디자인을 추구하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소리가 보조수단을 될지언정 소리자체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여전히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석이 소리가 지닌 또는 소리에서 찾을 수 있는 휴머니즘을 작품의 주제로 들고 나온 것이다.
'보기에 좋았더라' 못지 않게 '듣기에 좋았더라'도 인간의 심미적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나타내는데 자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나 인공적인 화음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지만 소음, 굉음, 파열음 등은 불안, 불쾌감, 신경질 심지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소리, 꾀꼬리나 카나리아 같은 새의 미음(美音), 어머니의 자장가, 하다 못해 휴일 오후에 나른한 상태에서 듣는 어린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이런 아름다운 소리들도 무질서하게 뒤섞어놓으면 극심한 심리적 불안이나 격앙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감도가 아주 우수한 녹음기로 채록한 소리를 들을 때면 평소에 느끼지 못한 소음의 강도가 실제로는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데 어떤 점에서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하게 만드는 이 소음들은 우리의 삶의 분비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삶이 녹아있는 증거들을 채집하고 그것을 무수한 사람의 형상과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끈과 같은 것으로서 소리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 소리의 물리적 맥락에서 소리의 세기를 측정하여 그것을 시각화한 「무게의 소리」보다 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시장에서 채록한 소리를 스무 개가 넘는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고 있는 「인간의 소리」는 마치 소리를 전달하는 케이블처럼 사람들을 휘감고 있는 선들과 다양한 문자가 기록된 사람의 얼굴들로 구성된 투과성의 구체(具體)가 삶의 현장임을 드러낸다. 가까이서 집중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이 서로 마구 뒤섞여 있는 까닭에 당장은 소음으로만 인식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소리들의 진상(眞相)이자 삶 그 자체의 증거이다. 의도적으로 꾸민 것이 아닌 일상의 소리들이기 때문에 하등 아름다울 것 없지만 그 속에는 한가로운 잡담으로부터 다급한 호출, 호객 하는 소리, 설득, 회유, 거부, 호통, 칭찬 등 온갖 가지 삶의 단편들이 녹아있다. 곧 우리는 그 소리를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소리」는 일상의 소리를 통해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소음으로 들릴 수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서 삶의 정당성을 찾고자 한 작가의 휴머니즘적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주 무의미하게 들릴 수 있는 소음에서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소유한 예술가임을 증명한다. ■ 최태만
Vol.20030920b |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