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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3_0916_화요일_05:00pm
아트스페이스 휴 ART SPACE HUE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4-1번지 B1 Tel. +82.2.333.0955 www.artspacehue.com
흐릿한 대상의 상실 ● 1. 흰 벽에 가정용 캠코더가 삼각대 위에 설치되어있다. 캠코더의 작은 화면을 통해 한 사람이 개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몇 달에 걸친 훈련과정이 가볍게 연출된 영상이다. 어린시절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없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쯤 개를 키워본 경험을 갖고 있다. 개를 키우는 중에 개가 똥오줌을 못 가린다거나 그밖에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개를 훈련시켜야겠다고 마음먹은 경험들이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여러 가지 미세한 감정들이 얽히고 또 사람 보다 수명이 짧은 개는 키우는 사람에게 죽음과 슬픔의 감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여하간 캠코더 화면에 비친 영상은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하며 코믹하기도 하다. 단지 손쉽게 다루는 가정용 캠코더의 화면에서 더욱 가벼운 영상이 잠시 나올 뿐이다. 한 때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의 눈을 간지럽히는 그런 가벼운 손짓을 할 뿐이다. ● 대상 없이 흐릿한 벽을 바라보는 캠코더의 시선은 잠시 동안 나를 둘러싼 관계의 정치학으로부터 혹은 미적 의미로부터 벗어나 개를 훈련시키는, 사실은 개와 함께 노는 한가로운 낮의 여가를 내비친다. 작가는 구체적 대상 없이도 현재에 재현되는 기억의 한 가닥을 깜박 흘려 놓는다.
2. 할머니의 가뿐 숨소리와 간간히 귀를 찌르는 불편한 신음소리. 생물학적 호흡현상이라고 가정하는 백색의 시선으로는 박정혁의 영상과 사운드를 말하기 힘들다. 한국의 중류층 가정에서 성장한 작가의 성장환경과 그러한 환경에 조성한 여러 겹의 감정과 두께를, 신파적 정서가 아닌 끈끈한 가족애와 비합리적 정서들. 영상은 그러한 배경을 슬쩍 보여준다. 기계적 장치로 생명을 연장하는 호흡을 보여주는 듯 센서를 통해 반응하는 기계적 상승과 하강의 운동이 할머니의 영상과 소리를 움직인다. ● 왜 할머니인가? 왜 병든 할머니의 힘든 이미지와 불편한 사운드인가? 다른 영상설치작업에서는 보기 어려운 한국인의 끈끈한 비합리적 시선을, 한 인간의 비극적 드라마와 예견되는 종막을 보여주는 박정혁의 심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박정혁의 영상작업이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기억의 보고로서 나와는 다른 한 인간의 모습을 담는다고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한 관객으로서 동시에 모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기억의 명사인 '할머니'라는 분모가 몇 줄의 혹은 몇 단락의 문장들로 담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의 원형으로서 동시에 생명 잉태의 모태로서, 원형적 사랑으로서 할머니라는 상징은 무수한 감정의 여진을 만들어낸다. 아마도 박정혁의 영상설치가 다른 이들과 다른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무의식적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9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젊은 영상설치작업들은 완연히 주지主知적 경향을 보여준다. 박정혁의 작업 또한 그러한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에서 박정혁은 이러한 주지적 경향과는 벗어나 약간 틀어진 태도로 일관된 하나의 정서 혹은 분위기를 제시한다. 개훈련에서 보여준 가벼운 영상과 판이하게 다른 한편의 서사적이며 기념비적인 분위기의 할머니영상설치를 통해 대조적인 감정의 병치를 보여주면서 한 사람 안에 얽힌 다양한 감정들의 얽힘과 풀림, 연상과 망각을 상기시키며 한 때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을 그러한 모호한 대상들을 기계적 혹은 감성적 영상으로 기념하는 듯 하다. ■ 김기용
Vol.20030914a | 박정혁展 / PARKJUNGHYUK / 朴正爀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