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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O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61-1번지 02_733_4883
'망명'과 '귀환'의 경계에서 '느린' 길 찾기 ● 이우환은 예술의 두 가지 길을 말한다. 하나는 "자기 내면적인 이미지를 현실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내면적인 생각과 외부 현실을 짜 엮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길"을 이야기한다. 서로 받아들이고 넘나들고 침투하고 반목하면서 빚어내는 "관계작용에 의해 시적이며 비평적이며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열리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길"을 세 번째의 길로 명명하지만 이 길은 예술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매우 단호하다. "거기에는 암시도 비약도 없기 때문에..." 암시도 비약도 없는 길은 예술의 길이 아님을 물론 인생의 길도 아니고, 인간의 길도 아니며, 결국 길이 아닌 것이다. 길은 그 자체로 암시이고 비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은 늘 '지금, 여기'의 표상으로 반성과 자각의 지표가 되어 인생과 인간을 대변하고 반영한다.
"4월 4일. 화창한 봄날, 바람이 몹시 세게 분다. 단소 배우러 친구 하숙집에 간다. ...... 가벼이 맥주 마시고. 단소를 들어 여러 가지 톤을 내 본다. 친구는 어떻게 해야 도레미파솔라시도 음이 나는지 가르쳐 주지 않고, 여러 가지 톤 내는 것을 시킨다. 숨을 어떻게 내쉬느냐에 따라 소리들이 달라진다. 숨쉬기와 톤의 소리. 숨을 밑에서 깊숙이 내쉬느냐, 위에서 내쉬느냐에 따라 다양한 소리와 톤. 가슴을 쭉 펴고 내쉬느냐 혹은 가슴을 웅크리고 내쉬느냐, 나팔 불듯이 내쉬느냐 혹은 숨을 헉헉, 신경 거슬리게 내쉬느냐에 따라 톤들은 다양하게 반응한다. 입을 작게 오므려 장난하면서 내는 소리 또한 재미있다. ● ...... 대학시절, 자유에 대한 답을 찾으러, 바지 하나로 사계절 보내며, 앎으로부터 자유시도, 그러나 앎이 삶과 같이 어우러지지 못하는 현실에 무방비 상태로 나가떨어짐. 끝내 앎은 내면이나 외면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의논할 선생도 선배도 친구도 없이. 사회에서 일하던, 20대 후반, 한번도 제대로 살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죽어라 일하지만 소모적이고, 주위 사람들은 하나 둘 결혼하고, 책에 매달리지만 모호하다. 한번도 정착하지 않은 느낌. 소속되고 싶어도 소속될 곳이 없는, 보이지 조차 않는... 유학 간다."
이렇게 떠난 8년 간의 유학길을 되돌아 온 그를 다시 만나 지낸 지 10여 년. 윤희수는 아직도 단소를 배우듯 인생과 예술의 숨을 내쉬는 연습을 하고 있다. "1. 자신감을 갖자. 2. 즐겁게 살자. 3. 바른 자세를 갖자. 어깨를 펴고 몸의 자세를 곧바로 펴자. 4.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자. 5. 지혜롭고 따뜻한 사람이 되자. 6. 부드러워지고, 열려 있자. 7. 자신이 좋은 것을 할 때는 막지 말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자. 8. 좋은 시간과 공간을, 자신을 수시로 갖자. 9. 단단한 실력과 능력을 갖자. 10. 좋은 작업을 하자. 작업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모으자. 같이 작업할 친구를 찾아보자. ...... 15.정말 부끄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자. 16.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당당하고 떳떳하던 자신의 젊은 날을 기억하자. 17. 현명해 지고, 분명한 것은 분명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 말자. ...... 24. 나는 나이고, 나이게 하고, 나이게 함으로 내가 존재한다. 내가 있음으로 내가 거듭나고 깨우치고, 나? ?배우고, 나를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하고, 내가 걸어다니게 하고,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하게 한다. ...... 32.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있어도 한 사람이 갖고 있는 것 넘치고 넘친다. 수저 하나, 밥그릇, 국그릇, 커피잔, 물컵, 펜, 종이, 붓, 책 몇 권, 소중한 기억들. 작업. 작업."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느린 사람, 가장 긴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이미 길이 되어 버린 사람. 이번이 세 번째 인가, 불쑥 한 꾸러미의 그림을 내놓으며 또 길을 묻는다. "저기 ... 뭐죠?"
1) 달력에서 날짜를 지우듯 이미지가 그림을 지운다. 깊이 감을 거부한 현대미술의 밝은 이미지와 색채를 바라본다. 혹은 천재화가라며 천진난만하게 그린 그림을 바라본다. 지우면서 드러나는 의자, 책상, 투명공간을 하나의 메모리로 남겨둔다. 그러나 응시할수록 지운 공간에서 드러나는 어두운 형체들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이러한 상태를 즐긴다. 드러냄에 의해 보여진 시간이 지나면 드러내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 시간. 어렸을 때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았던 수많은 이미지들처럼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졌던, 동시에 긴장감을 주었던, 그러나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보잘 것 없는 옷이나 가구였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2) 10년 전에 피렌체에 머무른 적이 있다. 토스카나 풍경, 옛날 대가가 사용했던 화실, 성당, 비 오던 골목길, 다리 등 르네상스 흔적들을 다시 본다. 그 흔적들이 지워지기 전에 다시 한번 응시해 본다. 어떤 느낌, 기억, 아련함, 스멀거림, 아른댐, 잔잔함 등과 함께 잔상이 어른거린다. 일상의 일탈로 시작되는 여행은 일상의 분명함으로 멀어진다. 낱섬과 만난다.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아우라 든 그들을 무화시켜 잔잔한 긴장감이 돌도록 자극하는 것. 항상 경계에 머물게 경계하는 것. 그러나 조용히 애매모호하게 말할 것. ● "항상 경계에 머물게 경계하는 것." 나는 윤희수를 "망명"중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의 한국사회로부터 "망명"하고, 다시 90년대의 유럽사회로부터 "망명"하고, 지금 이 땅의 "모오든 쇠붙이들"로부터 "망명"중인 사람이라고 신동엽 님에게 고한다. 나는 지난 십 여년 동안 수많은 디자이너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혁명과 일상들을 함께 나누며 때로는 동지로서, 때로는 적으로서 서로를 주목하고, 응시하며 살았다. 늘 이야기의 끝은 새벽에 닿아 있었다. 그 자리에 디자이너 윤희수는 "망명" 중이었고, "디자인 현장"과 경계하고 있는 "디자인 조형"을 내놓았다. 디자인의 새벽길, 기초의 디자인 문제, 일상의 기록과 해석, 이해와 관심의 느린 말걸기, 숨 내쉬기. ● 1. 벽에다 못을 박지 말자. 저고리는 의자 위에 걸쳐놓자. 무엇 때문에 나흘씩이나 머무를 준비를 하느냐? 너는 내일이면 돌아갈 것이다....... 2. 네가 벽에 박아 놓은 저 못을 보아라. 언제쯤 너는 돌아갈 것 같으냐? ......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망명 기간에 관한 단상')
20세기의 디자인 전 역사를 지나서 21세기의 새로운 디자인 패러다임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나는 늘 "디자인 조형의 회복과 부활, 디자인의 예술적 담론의 재구성과 미학적 기술의 재조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생각은 '디자인인가, 예술인가' 또는 '디자인은 예술인가, 산업인가'의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로 오해되면서 매번 역사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궤변론자가 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 생각을 접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 나는 '디자인은 조형의 문제이다. 다만 이 조형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방식을 새롭게 전망할 수 있다면, 여전히 디자인의 조형론은 디자인 문제의 중요한 화두다."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디자인계의 모든 관심은 경영 마케팅과 사업 컨설팅의 기재로서 디자이닝(디자인 행동과 행위)전 영역과 범주, 절차에 쏠려 있다. 그래서 디자인의 전문적 활동에 대한 경제적 의미 판단과 가치 평가가 디자인 이슈와 토픽으로 무성하다. 이는 20세기 중반까지 치달아 온 '예술의 민주화, 사회화'를 문화적 코드로 읽어내는 전통의 맥이 순식간에 단절된 때문으로, 이른바 미학적 인식(감성적 인식의 철학적 성찰)의 소멸이나 무효를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디자이너 스스로가 하나의 직능인으로서 사회적 기술과 재화의 생산, 소비의 주체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땅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디자인이 성립, 완성되는 문화적 동인과 가치의 창조, 수용의 주체임을 간과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조형예술의 도저한 세계는 디자인 발상과 시각 언어의 추상능력(관찰과 표현)을 제고하는 자산으로서 지난 세기의 미분화한 유물이나 흔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구, 연마해야 할 디자이너의 유물론적 존재방식과 존재형태인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신 있게 탐구하는 디자이너는 누구이며, 자신 있게 주장하는 디자이너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주변은 언제나 위협하듯 달려드는 트렌드, 덤벼드는 스타일만 난무하고 있고 이 또한 정처를 따져보면 늘 어느 곳, 어디에선가의 무엇을 추종(모방과 표절)한 것이 대부분이다. 자기의 영혼, 그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디자인 조형", 그 근본적 기초의 디자인, 디자이너의 태도를 만나고 싶다. ● "한국에는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나. 이렇게 자기 앞 얼굴만 닦으며 살면, 희망이 없을 리도 없다. 자기 얼굴만 잘 씻고 나와, 종횡무진 활보하는 사람들.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두렵다. 무섭다. 씻고 난 후엔, 화장까지 하라고 강요한다.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 화장을 신봉하는 사회. 너도나도 공들여 화장하는 사회. 아이 얼굴에 화장 묻을까 얼굴 길게 쳐들고, 아이 안고있는 젊은 엄마의 진한 화장. 진한 화장을 한 젊은 이십대 여자와, 화장을 안한 젊은 이십대 남자. 낯설어 보인다. 햇빛에 얼굴이 상할까봐 바깥에 제대로 나가지 않는 사회. 몇 겹씩 햇빛을 차단하는 화장품 광고. 자연을 겁내는 현대인들. 자연을 피하는 사회.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단단하게 보호하고 무장하기 위한 장치들이 내뿜는 악취와 폐수의 속도. ......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에 충족감을 느낀다. 초연함. 집중력. 다시 시작하기! 사십이 되기까지 차별과 억압을 피해갔다면, 이제는 호기심 있게 다시 바라보자. 놀고, 웃고, 울며,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발견되는 나이. 아이가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질 때, 아이는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사물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회의적이지도 않다. 시작하는 하루가 있을 뿐이다. 독립적이고 초연하며,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조용하면서도 한결같은 따뜻함. 무게 중심이 자기 안에 있는, 그녀가 지닌, 자기 안에서 충족된 삶을 살았던 침묵. 깊은 물은 고요히 흐르고. 안으로 향한 자아와 그 의미. ...... 이제는 자신에게 정직한 것을 찾고 싶다. 정직. 겉돌며 살아온 나에게 정직해 진다는 것이 어렵다. 아니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정직하게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들여다봐서 그 무게를 빼는 것. 이미지는 그 무게를 빼고 남는 것이 되겠지. 그것을 작업으로 연결하고 싶다."
이쯤에서 나는 "망명" 중인 윤희수를 소개한다. 아니 그에게 "망명"의 끝을 종용하고, "그러나 조용히 애매모호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강하고 분명하게 말할 것"을 명령한다. 다시 이우환을 읽는다. "존재감으로 압도하는 작품이 있다. 독기 어린 이미지로 덤벼드는 작품이 있다. 환각작용으로 농락하는 작품이 있다. 거기에는 종종 작위가 판단불능의 겁주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작품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일방적으로 폭력에 당하여 자기 해체를 합리화하는 무기력한 사디즘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지금 한국 디자인이 사디즘의 시대라면, 젖은 소를 찾아가야 한다. 향나무와 나뭇잎을 따라서, 윤희수의 "귀환"을 독촉해서 그도 함께! ● 알몸 하나로 젖고 있었다 깨끗해야 그를 만날 수 있다고 香나무들이 말했다. 차가운 밤이슬들의 꿈의 날개 터는 소리, 꽁꽁 걸어 잠근 마른 가슴 여는 소리 때묻은 우리들 욕심의 거적때기론 만나지 못한다고 세속의 갈기만 커간다고 그는 조용히 타이르고 있었다. 파란 우뭇가사리의 작은 소망도 수북히 꺾인 푸른 이끼들이 꿈꾸던 희망도 깨끗해야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나뭇잎도 끄덕이며 가고 있었다 저벅 저벅 따라서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를 찾아가고 있었다. (원희석, '소를 찾아서') ● 달력에서-지우기 : 달력에서 지워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진에서-남기기 : 고정관념이나 아우라 등등 분명한 화면의 이미지들을 지우지만 경험이나 기억 혹은 상징 등을 남겨놓아 분명한 것과, 지운 것, 남긴 것들이 서로 대응해서 동시적으로 다 살아있게 하기 지우기와 남기기의 시공적 연상으로 이들의 간격과 사이를 살아있게 하기 지움과 남김이 서로 대응하길... ■ 권혁수
Vol.20030907a | 윤희수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