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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903_수요일_05:0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근대 여성 예술가 8人에 대한 오마주 1. Eight Women Artists ● 그들의 얼굴은 풍경이다. 그것도 지독히 섬세한 풍경이다. 그 풍경은 뜨겁고도 차가우며, 강렬하면서도 신산(辛酸)하고 분열적이다. 나혜석, 전혜린, 윤심덕, 박래현, 천경자, 최승희, 김소희, 박경리. 각기 다른 분야에서 '근대'를 지나온 이 여덟 명의 예술가들과 나는 2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돌이켜 보면, 내가 한 명의 여성으로 성장하는 동안에도 그네들은 나의 삶에 이러저러한 영향을 끼쳤으니 그 시간은 꽤나 묵직하다. ● 전혜린의 에세이에 배어있는 광기 서린 고독에 매혹되어 밑줄을 그어가며 밤을 지새던 중학생 시절이 있었고, 박래현의 기막힌 작품들이 남편 운보의 그늘에 가려 있음에 분개하고 「토지」라는 대작을 써내는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또한 최승희의 고혹적인 카리스마, 남의 시선 따위는 괘념치 않는 윤심덕의 열정을 동경하기도 했다. ● 이렇듯 그들에 대한 내 인식의 출발 역시 설익은 소녀적 감수성에 근거했음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들의 피상적인 명성 뒤에 숨겨진 生의 이면과 그 형형(炯炯)한 얼굴의 주변부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2. Sour Times ● 성공한 여성 예술가는 대개 하나의 전설로 변하는데 그 내포한 뜻은 명백하다..... 남성 영역에의 그녀의 개입은 예술적인 재주 덕분에 생물학적 성에서 벗어난 예외적 여성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위해 회수된다. (그리젤다 폴록/로지카 파커,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 ● '여성' 그리고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그들을 다시 나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어찌 보면 나는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불평등과 편견에 다소 둔감한 편이었는데, 그 이유란 결국 삶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어느덧 내가 원했던 일을 하게 되고, 점차 직업적인 예술가로서 독립된 삶을 꾸려나가려는 의지를 갖게 되면서는 여성으로서, 그것도 예술이란 것을 하기에 '합당한' 계급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여성으로서 그 꿈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무모하고 고된 일임을 각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그러나 1971년 린다 노클린이 이미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나는 일련의 초상화를 통해 '그녀들은 사실 위대했었다' 류의 잊혀진 역사를 조명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거나 여성들의 예술에는 다른 종류의 위대함이 있다는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태도는 다시 한번 근대라는 시간 밖으로 끊임없이 '탈주'하려 했던 그들의 생애를 남성/여성, 정신/몸, 시간/공간이라는 근대의 이분법과 흑백논리의 틀에 가두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 우리 사회의 모든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근대'라는 시간은 나의 꾸준한 관심사이기도 했다. '도대체 근대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라는 질문은 내가 직면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근대의 시공간은 여성을 역사적 타자로 규정했듯이 서구와는 다른 동양의 시간성과 문화적 자산 또한 효과적으로 배제시켰다. 한국화라는 모호한 이름의 전공을 가진 여성인 나로서는 '이미 근대에 내장된 탈근대적 계기'로 보여지는 그들의 삶이 나와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여성을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무명의 시간 속에서 주체로서의 삶을 이끌어온 그들의 '치열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치열함이 얼마나 대책 없이 솔직했으며 역사적 모순과 맞물려 있었는지는 그녀들의 전기 속에 점철되어 있는 '유랑, 도피, 객사, 자살, 투신, 이혼, 숙청......' 등의 극단적인 단어들이 설명을 대신한다. ● 동시대에 태어난 이 8명의 예술가들은 전혀 다른 색깔의 삶을 살았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이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정도일 뿐. 그럼에도 이들이 서로를 조우할 수 있는 것은 시대의 조건에 결박당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재능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이나 '성공한'이라는 형용사를 넘어 그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
3. 경의(Homage) ● 이런 지경에까지 떨어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얼굴이다. "보물, 금괴,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다이아몬드" 이것들은 한없이 부서지기 쉬운 것. 즉 육체 안에서 전율하고 있는 '자아'이다. 이것들이 얼굴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 나혜석이 둘째 아들인 진을 낳던 해(1926)에, 윤심덕은 일본에서 마지막 레코드를 취입한 뒤 관부연락선으로 귀국하던 길에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했다. 나혜석이 이혼과 화재 등의 잇단 불행으로 수전증을 앓고 있던 시절(1933), 이화중선의 노래에 감명을 받아 소리의 길로 접어든 김소희는 이미 소녀 명창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래현은 1942년에 천경자를 후배로 맞이하며, 그녀가 우연히 운보 김기창과 만나게 되는 1943년, 최승희는 중국과 만주를 떠돌며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다. 박경리가 문단에 등단하던 해(1955), 천경자는 검은 고양이를 안은 소녀라는 문학적 모티프를 담은 '정'을 발표하여 대통령상을 받았고, 전혜린은 독일로 떠났다. ● 나 역시 이들의 예술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평가보다는 그를 둘러싼 무수한 신화와 스캔들을 들어왔다. 이를 반증하듯 기본적인 연구도 부실한 판국이라 과연 이들이 당대에 얼마큼 서로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몇 가지 일화 외엔 알 길이 없다. 그나마 문필가였던 나혜석과 전혜린의 글, 공연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최승희, 생존해 계시는 천경자, 박경리의 자료에 기대고, 그 밖의 단편적인 문헌들을 통해서 추측해볼 뿐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부족하나마 나의 손을 빌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즐거운 상상이었는데, 작업이 진행될수록 실제로 친분을 나눈 '선배님(?)'들인양 애틋한 살가움을 느끼기도 했다. ● '처음이란/얼마나 많은 세포를 배는 일이던가/공간이 없어도'라는 박라연의 싯구처럼, 나의 그림은 남루한 사진 속을 뚫고 나올 듯이 그들의 신체에 각인된 '처음' 살이의 풍경, 즉 얼굴에 대한 오마주(경의)이다.
4. 이형사신(以形寫神) ● 고개지 이후로 동양 인물화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은 전신(傳神), 즉 '정신을 전하는 것'이었고, 이는 이형사신(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리는)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상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묘사할 대상 자체를 관찰하고 연구해서 사상과 감정을 깊이 이해한 뒤 예술적인 구상을 체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각을 옮겨서 묘를 얻는' 천상묘득(遷想妙得)의 과정이다. ● 그리는 주체와 대상, 외연적인 법과 형식이 잊혀지는 천상묘득의 경지란 얼마나 요원한가. 나는 감히 동양 그림의 중요한 미덕인 이형사신을 가슴에 품되,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는 전통 화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을 접목하려 했다. ● 우선 태도였던 '오마주'는 이 시리즈를 아우르는 양식이 되었다. 오마주(homage)란 주로 영화 속에서 다른 감독의 영화나 스타일을 직·간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래현의 초상화 배경에 그녀 작품의 일부분을 모사하고 천경자 풍으로 천경자를 그린 것은 그들이 화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양식적 오마주에 가깝다면 박경리의 초상은 갈필(渴筆)의 수묵화로, 전통예술의 외길을 걸었던 김소희는 전통 초상 화법을 따르는 등의 방식은 일테면, 삶의 오마주랄까? ● 덕분에 매번 새로운 인물을 접할 때마다 새로운 기법에 접근하기 위해 쩔쩔매기도 했지만 짧은 화력(畵歷)에는 좋은 공부가 됐다. 이전 작업의 주를 이뤘던 즉흥적이고 문인화적인 필묵의 운용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대신 셀 수 없는 붓질과 두드림, 우림 모두를 수용하는 한지의 포용력을 배운 것 또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 이정민
Vol.20030905a | 이정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