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519_화요일_05:3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목요일_11:00am~08: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 내자빌딩1층 T. 02_737_9011,9013
머나먼 우회의 길_이민주의 작품 세계 ● 수묵화의 함정은 오랜 기간 끊임없는 수련이 요구되는 각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여백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정신적 분출구를 제공하지만 가필(加筆)을 유혹하는 빈 공간이고 운용의 묘를 요하는 도전의 장이다. 한번 잘못 그은 선은 돌이킬 수 없는 패수(敗數)이며 여백의 활용이란 실력을 시험하는 엄청난 도전이다. 잠시라도 붓을 놓으면 기량이 퇴보하는 수묵 특유의 작업은 작가에게 이중의 고뇌를 안겨준다. 이민주는 실험성 짙은 작품을 발표하는 동안에도 수묵 훈련을 지속해왔고 선보여 왔다. 이민주의 실험은 수제 종이, 프레스코 벽화기법, 발색(跋色)기법, 다양한 혼합매체의 채용, 부조의 도입들로 이어졌다. 그의 화면의 복합성은 매재보다는 화면의 형식적인 면에 기인한다. 만다라, 동심원, 입방체, 마름모꼴 등의 추상적 이미지와 인체, 동물, 종이나 토기 등 구체적 이미지들을 한 화면에 병치, 중첩시켜 복합적인 화면을 만들었다. 수면(垂面) 중이거나 부동(不動)의 인체, 입방체에 갇힌 인체들이 자유가 억압된 인간, 개인의 세계에 갇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을 시사하기도 하고, 새에게서 비상과 탈출의지를 찾기도 하며, 갈등의 해결은 기도로 표현하기도 한다. 「공명(共鳴)」 연작은 우주 현상의 이치가 자신에 전달되어 오는 깨달음을 회화의 형태로 그리려한 것이다. 기법으로는 불화 중 선화(禪畵)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이민주는 여백과 먹 두 가지 만을 사용했다. 연속되는 긴 곡선으로 형상을 그려내는 만만치 않은 필력을 과시하여 윤곽선과 내부를 함께 연결하여 묘사한다. 긴 곡선이 그려내는 형상은 발묵 효과와 더불어 독특한 화면을 이끌어낸다. 그는 이제 거창한 담론이나 사회에 대한 발언보다도 다방면에 걸친 실험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야 한다. 먼 우회의 길을 걸어온 이민주의 앞으로의 진행을 지켜보는 기대가 크다.
무심(無心)에 이른 순간_조순호의 수묵 ● 조순호의 수묵에서는 거친 붓 놀림과 역동적인 제스처가 전해진다. 수십 장의 파지(破紙) 이후에 비로소 '만나'지고, 오랜 수련과 기다림 끝에 거의 무의식에 이른 붓 놀림으로 그려지며, 즉발성(卽發性)과 직관으로 완성된다. 어떤 관념의 표현 이라기엔 너무나 큰, 그의 실존(實存)을 쏟아낸 결과이다. 그리기 전 명상과 같은 의식(意識)의 침잠을 거친다. 평정 속에 그리기 시작해서 자신과 그림이 합일되는 무아의 순간, 실지로 그리는 시간은 십 분도 안 된다. 기를 모아 긋는 넓은 선, 빠른 속도로 잇댄 붓자욱은 선을 넘어 면(面)으로 남는다.
송(宋)나라 양해(梁楷) 이래의 선화(禪畵)나, 20세기 중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액션페인팅을 연상시키고, 무의식의 상태에서 긋는 붓은 자동기술이다. 먹과 여백은 즉흥적이고 빠른 붓의 마더웰(Robert Motherwell: 1915-1991)의 흑백 그림에 가깝다. 그러나 조순호의 그림에서 마더웰이 의도한 삶과 죽음, 또는 상실과 영웅적 저항에 대한 암시는 없다. 암시나 의미가 없는 것이 그의 먹이다. 선화가 찰나의 각성을 위하여 이용된 점과 무관하지 않고, 그린다는 행위에 의미를 두었다. '아무', '어느' 것도 아닌, 행위 자체가 그림의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뿌리기 그림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그림 안에 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얼마간의 '친해지는'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했는지 보게 된다. 나는 변화를 주는데 두려움은 없다. 왜냐면 그림은 그 자신의 생명이 있으므로."(잭슨 폴록, 'My Painting', Possibilities 1,no.1,winter_1947-48)
조순호는 수년간 '날지 않는 새'에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 처럼 분노와 절망을 투사했다. 자신이 씌운 굴레였다. 요즘은 들꽃, 나무, 파랑새, 또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과 같은 일상의 사물, 또 악몽, 개꿈 등 내면풍경을 그린다. 무심(無心)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격정적인 붓 놀림은 정리되고 있다. 집중력과 격정이 갈아 앉은 것이 아니라 쏟아냄과 멈춤의 제어가 자유로워진 것이다. ■ 염혜정
Vol.20030819b | 조순호.이민주 수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