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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기_조해준의 『생각하며 일합시다』에서 ● 1. 알베르 카뮈는 어느 글에선가 자신이 젊은 나이에 전장에서 죽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아버렸음을 한탄한 적이 있다. 그 문장에는, 생에 대한 반추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젊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아버지보다 훌쩍 더 살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해 크게 깨닫지 못했다는 카뮈 자신의 자조와 회의가 뒤범벅된 맛이 있었다. 그 맛은 모래알을 씹듯 꺼칠꺼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중년이 된 카뮈가 젊은 아버지 묘비 앞에서 쓰디쓰게 시간 앞에 선 자들의 무력함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 그리고 아들들 (그리고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과 그 딸들). 모든 역사는 핏줄로 이어진 시간이며, 부모보다 더 오래 사는 자식들이 쓰는 역사, 앞서 간 이의 현재를 뒤따라 갈 이가 과거로 받아 적는 역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결국 '큰 강물의 도도한 흐름'이라기보다는 내 선조에 선조들과 나의 삶이 질척하게 피 흘린 자리, 땀 흘린 흔적들이 아닐까. 말의 바른 의미에서 '역사'란 나의 이방인, 나의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내 아버지, 내 자식의 역사가 아닐까? ● 조해준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것 같다. 작가인 그는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사적(私的)기억을 받아 사적(史的) 기억을 쓰고 있으며, 그것을 또한 '그 어떤 미술'로 변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어떤 미술'이라는 말은 상당히 애매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될 조해준의 일련의 (미술)활동을 이미 개념 정리된 미술의 범위에서는 정확하게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며, 이것이 과연 미술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정리한 바 없기 때문이다. ● 조해준이 근 2년여 계속해 오고 있는 이 '일련의 (미술)활동'은, (이 지면에서처럼) 미술이라는 문법 안에서 말해지고 있기 때문에 괄호 친 (미술)이라는 부가 어를 가질 뿐, 기왕 정의된 미술에서는 다소 낯선 활동으로 보인다.
조해준이 「生生 - 父子 프로젝트」라 명명한 이 미술활동을 언어의 부족한 힘을 빌려 설명해 보자. 한자 표기를 보지 않고, 그냥 음으로만 이 프로젝트 명을 듣는다면,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로 대박 난 한 카드 회사의 빨간 색 사과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해준의 프로젝트는 비즈니스 마인드와는 대극에 선 그야말로 혈연의 관계에 대한 서사(敍事)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조해준으로 이어지는 핏줄의 시간과 그 이야기. 그 서사는 사실을 가상으로 변주하는 것도, 가상을 사실처럼 가장하는 것도 아니며, 영웅들의 서사처럼 신화적인 것도 아니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심적 인물은 조해준의 아버지, 조동환 씨이다. 그는 「生生 - 父子 프로젝트」의 서사에서 중심인물일 뿐만 아니라 발화자이고, 실제로 작품을 제작한 프로젝트 안의 또 다른 작가이다. 그러니까 왕년에 미술교사였으며, 조해준의 아버지인 조동환 씨는 현재 미술가인 아들 조해준의 작품에 등장인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들의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는 파트너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생각하며 일합시다, 조동환 作-1974」의 마티리얼이 된 조각상을 제작했으며, 「1937년부터 1974년까지」라는 다큐멘터리 드로잉 작품을 현재까지 제작하고 있다. 아들을 대신해서? 아니다. 그가 바로 수공적 의미에서의 제작자, 작가이다. 아들 조해준은 이 작품에서 제작자로서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와 관람자를 우리가 이 자리를 빌려 미술작품이라 부르고 있는 어떤 활동으로 이끄는 유도자(elicitor) 혹은 아버지 개인사(事 혹은 史)를 구슬 꿰는 비전문적 사가(事 혹은 史家)이다.
2. "나는 아버지가 제작한 작품을 다시 작품화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사는 시대 사이의 관계 맺음을 말하고자 한다." 작가 조해준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 조동환 씨가 1973년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중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제작한 조각상 「생각하며 일합시다」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상정한 듯 하다. 그래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모방한 이 시멘트 조각상은, 아들 조해준이 아버지 조동환의 시대와 삶으로 거슬러 가기 위한 기억의 한 사물이며, 조각상이 제작된 1970년대에서 지금 ? 여기로 관통해 온 역사의 한 산물이며, 이제 바야흐로 미술이 되려하는 한 작품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父/子, 공적역사/개인사, 작품제작자로서의 작가/유도자로서의 작가라는 경계에서 서로를 관계 맺게 하려 한다. ● 아마 그 시대를 거쳐왔던 사람들 누구나 기억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한국에 있어 1970년대는 '근면', '자조', '협동'이 공적 표어로서의 역할을 넘어 한 가정의 가훈이 되고, 삶의 태도가 되었던 시대이다. 여가나 문화라는 말이 사치스럽다 못해 낯설게 들리던 그 시절에 모든 활동은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때 목표는 잘살기, 즉 경제발전이었다. 그래서 미술 또한 학교에서, 국토개발사업의 현장에서, 체육관에서, 환경미화나 포스터 그리기로, 경축 플래카드로, 카드섹션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동원되던 때였다. 조동환 씨 또한 "정부에서는 한창 새마을 운동이 요원 불길처럼 번지고 있"던 그 70년대, "뜻한 바가 있어 학생들에게 강조하기를 '일하는 것이 배우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깊이 생각하면서 일하자'라는 뜻으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조각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 그런데 무려 30여 년이 지나 이 거칠지만 성실한 느낌을 주는 父-조동환 씨의 조각상이 왜 子-조해준의 관심을 끌었을까? 그리고 왜 미술가 조해준은 자신이 직접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미술교사였던 아버지가 교육용으로 제작한 작품을 끌어오고, 아버지에게 일종의 "다큐멘터리 드로잉"을 제작토록 해 자신의 작품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 답의 일부는 이미 인용했던 작가 조해준의 말속에서 설명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는 듯 하다. ● 그것은 먼저, 조해준이 역사와 기억을 사고하는 태도에 있다. 벤야민은 보편사로서의 역사 서술, 각 시대의 지배자에 감정이입 된 역사서술로는 폐허화된 현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사실들을 단순히 첨가하는 방식인 보편사 서술은 현재를 해명할 아무런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고, 각 시대의 정복자, 권력자의 의도와 취향에 따라 역사를 기술할 뿐이어서 실제 그 시대를 살아냈던 다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를 삭제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벤야민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구원할 힘을 보편사를 기술하는 태도가 아니라 "결에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태도에서 찾았던 것이다.(W. Benjamin,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어떻게 보면 작가 조해준이 아버지 개인사를 작품화하고 있는 것은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결을 거슬러 솔질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이다. 정사(正史)에 기입되지 못한 사소한 사물들, 개인의 기억들, 그것을 기록한 메모들에서 우리는 실제 과거가 어떠했는지,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추체험하고 현재로 불러들여 보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비릿한 추억과 함께 오는 것 같지만, 어떤 경우 그것은 잔혹할 정도로 과거를 직시하게 하는, 그래서 오히려 현재를 각성시키는 힘을 갖는다.
3. 1937년 생 조해준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다 그랬듯이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겪었다. 일제치하, 해방, 6?25전쟁, 4?19의거, 박정희 정권 등 굵직한 한국 근현대사가 개인의 몸 속에 체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아들의 권유로 자신의 기억을 소박한 드로잉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한국 근현대사가 아주 사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재구성된다. 이 때 재구성된 기억은 한편으로 그 자신만의 것이어서 다른 이들에게는 낯선 풍경으로 보이고, 어떤 부분은 공적인 기록들과 삼투된 것이어서 우리에게도 잘 아는 풍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52년의 용산 역을 그린 드로잉을 보자. 그것은 6?25전쟁의 참화로 폐허화된 용산 일대풍경을 보여 주는데, 아마도 미디어에 공개된 당시 사진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폐허화된 건물과 기차선로를 부감으로 그린 이 그림은 조해준의 아버지가 그 당시 그 곳을 비행기를 타고 보지 않은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점과 풍경이다. 우리가 6. 25 전쟁 기록사진에서 보았던 풍경과 흡사해 보이는 조동환씨의 드로잉은 아마도 완전히 자신의 기억에만 의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후 다른 매체에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한 개인의 기억이란 고스란히 사적으로 보존된다기보다는 미디어와 같은 외적 맥락들에 따라 재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와는 좀 다르게 1960년 4?19의거를 그린 그림에는 부감으로 찍은 사진 구도를 바탕으로 삼아 개인적인 표현이 기입되어 있다. 즉 당시 시위 학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졸라맨'같은 인간형상이 종로쯤 되는 위치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사진 구도 속에서 조해준의 아버지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과 감정이 오버랩 된 것으로 보인다. 조해준 아버지의 드로잉 중에 가장 압권인 것은 "호남고속도로 개통식 축하 카드섹션"을 그린 그림이다. 박정희 정권시절인 1969년 전주의 한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아버지는 호남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육영수 대통령 내외를 위해 그들을 그린 그림으로 카드섹션을 펼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통령으로부터 하사금까지 받았음을 그 드로잉의 여백에 써 놓았는데 아마 아들에게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보는 우리는 한편으로 한국현대사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일화를 듣게 되는 동시에, 박정희 정권을 일종의 향수로 기억하는 아버지 세대의 심리 또한 엿보게 된다. ● 조해준은 이렇게 제작된 아버지의 드로잉들을 전시한다. 이를 통해 과거 기억에 대한 이중의 왜곡 혹은 간극이 발생한다. 먼저 아버지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로서의 아버지는 그 역사적 시간대에서 빠져 나와 제3자로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아니면 7-80년대 본 영화에 앞서 상영되던 "대한 뉘-스"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조해준은 그러한 아버지의 드로잉들을 전시 상황에 따라 재배치, 재배열함으로써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마치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처럼.
4. 젊어 죽은 아버지를 가진 까뮈와는 달리 조해준은 자신의 기억을 아들에게 하나 남김없이 전해 주고자 하는 이제 노령이 된 아버지가 계시다. 그 또한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이지만. ● 인간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것은 나나 당신이나 조해준이나 그 아버지 당신 또한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보관하고 싶어하고, 기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보관과 기념의 형태는 사진일 수도, 동영상일 수도, 짧은 노트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내면 저 깊은 곳에 아직 형태 없이 비가시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가시적이고 아직 형태를 부여받지 못한 것이 삶의 어떤 계기에 어느 지점에서 밖으로 튀어 나와 비로소 형태를 부여받을 것이다. 가시적이 될 것이다. 어떨 때는 말로 읊조려 질 것이고, 어떤 때는 회고록처럼 쓰여 질 것이고, 또 어떤 때는 그려지거나 만들어질 것이다. 조해준이 아버지의 삶의 기록인 여러 조각 작품들과 성경필사본과 유언항아리를 자신의 작품들과 조합하여 재구성하는 것처럼. ● 작품 「기념수」는 그렇게 언젠가 앞으로 닥칠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대비하는, 그 부재를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로 현존(現存)시키려는 이른 준비로 보인다. 자소상, 성경구절을 새긴 부조, 아들 조해준이 어린 시절 오줌 누는 모습을 조각한 상 등 아버지가 삶의 어느 계기마다 새겼던 조각들. 한지에 성경을 빼곡하게 필사한 것들. 손수 그림 그려 구운 당신의 흰색 유언항아리가 조해준이 만든 기념의 나무 가지 가지에 열려 있다. 조해준의 삶의 기록이라 할 다른 작품들과 함께. ● 이 부자간의 집합적 기억을 기념하는 나무, 작품 「기념수」는 우리에게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야산에 자란 어느 이름 없는 나무처럼 거친 가운데 씩씩하고, 균질하지 않은 가운데 아름답다. 마치 이종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것처럼 보이는 이 「기념수」에는 여러 시간의 상징들이 놓여 있다. 조해준이 태어난 쥐해를 상징하는 쥐 인형들이 시간을 좀 먹는 것처럼 혹은 반대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부터 '조해준과 그 아버지의 기억'을 방어하려는 것처럼 가지 끝마다 눈을 뜨고 있으며, 마치 과거의 기억을 낚으려는 듯이 녹색그물이 가지들에 늘어져 있다. 이 한편으로 조악해 보이고, 한편으로 의미심장해 보이는 잡다한 사물들, 기억의 편린에서 추출된 작품들이 하나의 「기념수」가 되어 어떤 서사를 만들고 있다. 그 어떤 서사는 이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보편사의 역사기술론으로 써진 것이 아니라, 조해준과 조해준의 아버지, 어떻게 보면 공적 역사에 기입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써진, 역사를 '거슬러 솔질'함으로써 현재로 온 서사이다. ● 오늘 여기의 삶은 조국 근대화의 '잘살기' 표어가 여전히 "부자 되세요"라는 뻔뻔한 메시지로, 그러나 군복입고 선글라스 쓴 독재 대통령의 강압적인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쁘장한 여배우의 달콤한 미소와 함께 스며들고 있는 곳이다. 우리 몸으로, 의식과 무의식으로. ●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의 '잘살기'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이 풍요로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삶의 어떤 계기마다 자신의 기억을 일반론의 결을 거슬러 솔질해 봐야 하지 않을까? 조해준이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미술은 그것을 제안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어떤 태도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조해준이 여기까지 아버지의 기억을 얻어듣는 것을 마치고,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들의 큰 역사를 솔질함으로써 그 어떤 미술의 서사를 다시 써 보기를 바란다. ■ 강수미
Vol.20030815a | 조해준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