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813_수요일_06:00pm
동덕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51-8번지 동덕빌딩 Tel. 02_732_6458
無距離의 距離 Ⅱ ●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순박한 믿음과 그를 바탕으로 한 역사의 단선적 발전을 상정하였던 모더니즘적 삶의 양식들이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더니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포스트모던적 제안들이 결코 어떤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답답하기만 했던 절대이성의 통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적 열망들은 한편으론 자유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 그 자유는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불안한 것은 이러한 자유분방하고 다기한 포스트모던적 삶의 방식아래에서 과연 우리들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 있다. 여기에 근대산업사회에서 문제되었던 소외의 문제가 역시 포스트모던의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포스트모던적 자유는 자칫 소외된 자유로 경도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미적 형상화 작업은 과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더 솔직히 과연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지금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모던적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또한 의사소통에 대한 고민이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그렇다고 결코 해방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접을 수는 없다. 한 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미적 감성의 발로를 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떠오른 것이 이상향, 무릉도원, 그리고 유토피아 이다. ● 유토피아(Utopia),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뜻으로 토마스 모어(Thomas Sir More) 이후 그곳은 현재의 지점에서가 아닌 미래의 삶을 준비하기 위한 곳으로 현실과 격리된 섬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동양에서도 역시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 이상향 모두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아 별천지 비인간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이렇듯 현실과 떨어진 한없이 자유로운 그 어떤 상상의 장이면서 동시에 누구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그 사실자체에 의해 이상향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즉 이상향은 그 어떤 우리들의 깊은 내면의식 속에 남은 자유로운 내면의 공간이면서 이 자유로운 공간에 대하여 서로가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함께 할 수 있는 기제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樂園 또한 어떤 특정한 '장소'로서의 단순한 공간적 접근보다는 시간 이라는 차원을 포함한 입체적 전망 속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시간을 담보로 하지 않는 공간에서 만의 구도로는 유토피아를 제대로 형상화 낼 수 없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을 풀어 가는 모습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현재 지점보다 미래에 구원 받기를 소망하는 요소가 더 많았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백 년 동 기다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시간적으로 미래보다는 과거 속에서, 특히 5,60년대 우리의 풍경묘사와 공간적으로 현재와 과거의 복합시점으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4회 개인전의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였다. EX-INTERIOR라는 타이틀로 진행된 지난번 전시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붙이고 살아가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을 '무거리적無距離的 거리距離' 즉 자유롭기 만한 포스트모던적 조건 아래에서 한편으로 감지되기 시작한 인간의 소외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었다. 그러나 추상적 묘사와 평면 설치라는 전시방법으로 일반관람자와 소통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작업의 연장으로서 이번 전시회는 새롭게 이들 소외를 넘어 가능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미적 감성의 발로를 찾기 위한 고민의 결과들이다. 이러한 고민들의 결과 그 동안 포스트모던적 양식에 부합하는가의 여부에 차원에서 줄곧 고집하였던 비구상적 요소를 대신하여 보다 널리 공유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구체적 이미지들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나의 작업이 내용에 있어서나 전시방법에 있어서 좀도 우리 사회에 공유되기 위하여 구체적인 이미지(5,60년대 풍경)를 사용하였다. 특히 낙원을 상징하는 과거의 이미지 표현을 위하여 6_25전쟁 종군기자였던 성두경의 사진집 '다시 돌아와 본 서울'과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의 작품집인 '촬영금지'(이상 눈빛 출판사)에서 몇 부분을 차용하였다. 이러한 구체적 이미지는 그림을 읽어갈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제공되며, 비록 현재의 풍경은 추상화시켜 묘사하였지만, 그러나 그러한 단서를 통해서 관람자 스스로가 작품 전체를 독해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 동양화는 현상적 시각보다는 관념적 시각을 우위에 두었다. 이로 인하여 눈앞의 현실에 대한 재현이나 사물의 구조를 분석 해체하는 시각보다, 관념적 미의식에 부합하는가에 여부에 더욱 중점을 두는 방식이 발달하였다. 부감법俯瞰法이 이러한 관념적 시각의 소산이다. 화면을 깊이감 있는 장場으로 인식함으로써 역원근적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 회화의 구성방식인 부감법, 이동시점移動視點은 모두 기억표상이나 관념이 양식을 제한하도록 하며 우리에게 이 세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각(Total View)을 가져다 주었다. 예를 들면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나, 고굉중의 「한희재의 밤잔치韓熙載夜宴圖」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고굉중의 그림에서는 몇 날 동안의 축제의 현장을 시간적, 사건의 축으로 연결시켰다면,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는 있지도 않은 꿈속의 이상세계를 현실의 한 공간 축으로 살려내 표현한다. 결국 시간의 연장 내지는 같지 않은 다른 시간의 축을 한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탁견이 아닐 수 없다(나는 이것을 統時間化라 부르고자 한다).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어떠한 특정한 사안에 대한 동양화의 구도법(經營位置, 章法, 布局)은 아직도 매우 탁월한 표형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통의 회화적 구도를 살려 낙원풍경과 현재풍경을 한 화면을 구성하려 하였다. 화면 상단의 과거 이미지에 해당하는 부분은 석회를 주재료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석회는 현존하는 미술재료 중에서 가장 시원적인 것이기에, 시간상으로 과거를 나타내기 위한 이상적인 재료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 위에 목탄과 먹으로 풍경을 묘사하고 난 후, 센드 페이퍼로 벗겨 내거나 다시 호분胡粉으로 덮는 과정을 반복한다. 마치 선지宣紙가 미세한 운필運筆도 기억하는 것처럼 석회 또한 담담하게 이 모든 과정을 견뎌준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탄산염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견고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끝이 나면 사라져 가는 흐릿한 기억과 같은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화면의 일정부분에 콩댐을 하였다. 콩댐한 부분은 호분 속으로 견고하게 굳혀진 풍경으로 이미 석회와 한 몸이 된 부분을 다시 현재 지점으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 화면 하단은 시간상에서 현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소외현상을 더욱 차갑고 불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의 상징적 재료로 유리를 사용하였다. 불행하게도 앞으로 이 땅에 지어질 많은 건축물들이 커튼 월(Curtain Wall)공법으로 지어진다는 전망이 있다. 그런 만큼 소외 층의 상실감은 더 깊어 질 것이며,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욱 더 멀어 질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사람들 간의 상호 소외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리를 사용하였다. 또한 폐목閉木은 건축자제로, 혹은 수화물 받침대로, 선로 버팀목으로 더 이상 이 땅에서 그 용도가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변두리 공터에서, 뒷마당에서 오랜 풍상을 다 견뎌낸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하는 과정에서 화판 무게 등 여러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무늬 목으로 대체하여 작업하였다. 이 무늬 목에 목재용 염료로 폐 목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후 이를 다시 화판에 접착시키고 셸락(Shellac)으로 마감 처리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드라마틱한 현재의 모습과 기억에서 사그라져 가는 과거의 상황, 이 둘을 대비시켜 보았다. 그 방법은 역설적으로 현실은 물질성을 띤 추상으로 표현하고 과거를 비교적 구체적인 이미지로 연출하였다. 이러한 역설적 배치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시공간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우리들이 공유할 수 있는 유토피아 그 자체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Grand Narratives로서 통사적 서술들과 개인들의 그것이 오늘날은 다를 수 있다. 물론 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과 역사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역사가 개인들에 대해서 언제나 우선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강요된 현실도 없다. 그런데 Grand Narratives가 붕괴된 오늘 자유 못지않게 의사소통이 역시 소중하다. 아마도 가능한 방식은 공간과 시간 모두에게서 구속 받지 않는 조건 아래에서 미적 감성의 발로를 통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를 형상적 무거리 전략으로 부르고 싶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거리를 무거리無距離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 삶 속에 녹아 든 호흡과 사람에 대한 온기로 인하여 살아있는 육체화 된 풍경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實景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상日常 속에 녹아 든 이상異常을 찾기 위하여 앞으로 눈을 더욱 크게 뜰 것이다. ■ 최익진
Vol.20030812a | 최익진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