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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0806_수요일_06: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겹겹_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기록 ● 나에게 있어 사진은 나를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것만큼 어려우면서도 즐거운 일은 없다. 보여지는 진실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사진에 담기 위해 대상과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 ● 할머니들과 인연 또한 우연이 아니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을 전국에 계시는 할머니들과 함께 하며 운이 좋게도 가슴 속 깊은 곳까지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처음에는 낯가림이 심하던 할머니들과도 잦은 만남을 통해 가까워질 수 있었고, 어느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시간이 어언 8년이 돼간다. ● 2001년부터 중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살고 계신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더 깊은 내면까지 이해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할머니 한 분 한 분을 기차로 버스로 배로 혹은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는 길이 할머니가 겪었던 과거의 삶 일부나마 더듬어 보게 했다. 나라 없이 떠도는 할머니들의 비참한 실상은 과거의 삶을 그대로 연장시키고 있는 듯했다. 이러한 현실들이 나로 하여금 할머니들을 찾아 다섯 번에 걸쳐 중국으로 발길을 향하게 했다. ● 할머니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살아있는 진실을 순간 순간의 사진 한 장으로 포착하는 것은 극도의 긴장을 요구했다. 이미 할머니들과 울고 웃는 속에서 내 마음 깊이 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기의 파인더를 바라보는 순간 자유로이 대상과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인간적인 면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피사체로서 아슬아슬한 경계를 팽팽하게 인식하며 그들의 진실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 파인더 속의 할머니는 한 사람의 인간 그 자체였다. 깊게 패인 주름에서, 사방에 널 부러진 손때 묻은 물건에서, 글썽이는 눈망울에서, 할머니의 한 맺힌 가슴을 보았다. 모든 것이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삶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이미 할머니들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홀로서기라는 사투가 시작된 지 6~7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낯선 이국의 비바람 속에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한 맺힌 생명력만을 가질 뿐이다. 그들은 또 다시 어디로 가야할까. 그저 찬바람에 실려 역사의 뒤안길로 흩어지고 말 것인가. ■ 안세홍
겹겹이 쌓인 그들의 내면을 보는 눈 ● 중국의 할머니들을 찾아다닌지 어언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들의 피맺힌 경험과 인생 역정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무수히도 많은 셔터를 눌렀다. 말을 글로 옮겼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는 그분들의 표정과 그 표정 깊이 숨겨진 슬픔과 분노와 회한과 그늘과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을 공유할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 안세홍을 만난 것은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국내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찍어오고 있었다. 그가 찍은 할머니의 사진은 단순히 기록으로서의 사진만은 아니었다. 그 사진들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따뜻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은 얇삽하지 않고 진중하며, 기교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진솔하다. 그러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어둠과 그림자를 볼 줄 알고,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수성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내면을 꿰뚫는 깊이와 무게가 있다. ● 중국이라는 땅 덩어리는 워낙 넓고도 다양하고 변화무쌍 하여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는 여행 자체가 구도를 하는 순례자와도 같은 고행을 요구한다. 더구나 대도시가 아닌 오지 지역에 사는 할머니들을 찾아가는 일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재현의 경험을 겪게도 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번 작업은 땀과 열정과 우직한 도전-사스가 창궐하던 시기에 그는 막바지 작업을 위해 중국을 돌았다-과 치열한 문제의식과 할머니들에 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이 사진들을 눈으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보아야할지 모른다. 그래야 그들의 수난과 비극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와 삶과 현실과의 고투가 겹겹이 중첩되고 있는 상황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뛰어넘어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미래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안세홍의 사진은 중국의 할머니들이라는 피사체를 통해 전쟁과 평화, 민족과 여성, 계급과 이데올로기, 식민지와 분단, 젊음과 늙음, 한국과 중국, 이해와 몰이해, 과거와 미래, 그리고 우리의 삶과 죽음까지 겹겹이 쌓인 인간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 고혜정
국가와 민족의 겹겹 속에서 ● 지금 이름은 '리숴두안(李壽段)'이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히도미(ひとみ)'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후 그의 본래 이름인 '이수단'이 공식적인 문서에 오른 적은 없다. 그저 '리숴두안'일 뿐이었다. 그는 지금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중국인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한반도의 평양 근처 농촌에서 태어났다. 우여곡절의 젊은 시절 중심에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산 경험이 그를 계속해서 고된 삶의 질곡으로 빠트렸다. 전쟁이 끝나고도 그의 공식적인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나 고향에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결코 그의 고통을 보듬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박힌 주름살은 겹겹이 쌓인 불행의 역사처럼 보인다. ● 사실 요사이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위안부(慰安婦)'란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일본군의 '성노예(sexual-slavery)'라고 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위안부'란 말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성노예'란 표현이 지닌 현상 그 자체가 당사자 개인에게는 너무 큰 짐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마저도 '위안부'란 표현을 통해 사실 자체를 일부 은폐하려는 심리적 질곡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위안부' 사건은 국가.민족.젠더(gender)와 같은 문제가 겹겹이 쌓여 있는 진흙탕일지도 모르겠다. ●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겨우 1991년에야 일제시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 놓고 다루기 시작했다. 이제 1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잊혀진 세월을 따라 잡기가 무척 어렵다. 비록 그 사이에 200여 명이 넘는 국내의 피해자를 발굴했고, 그들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당시의 범죄자인 일본군은 결코 이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마치 끝없는 외침과 항의만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 그래도 국가와 민족이 하나의 존재로 움직이는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나름대로 힘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고향으로 둔 재중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다. 한번 큰 소리로 젊은 시절의 한(恨) 풀이를 하고 싶지만, 함께 사는 이웃들은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생각과 달리 입에서는 중국어가 튀어나와 고향사람들도 속내를 곧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더욱이 이미 마음처럼 자리 잡은 중국 땅에서의 타성이 더 이상 자신을 '위안부' 이전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아! 한스럽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나, '성노예'의 삶이나, 찢어진 한반도나, 타향살이나. 그래서 파안대소(破顔大笑)할 수가 없다. ■ 주영하
Vol.20030802a | 안세홍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