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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804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을_최진욱_강홍구_유근택_강상훈_박홍천_김학량_박소영_함경아 홍영인_정주영_박준범_박진아_정세라_임민수_방병상_윤정미 김옥선_심혜정_이은종_김영경_노현정_박용석_손성진 배영환_임흥순_조해준
총기획_강수미 / 스탭_박정아 / 협찬_한국문화예술진흥원 전시관련 책자로『서울생활의 재발견』이 도서출판 현실문화연구에서 8월 16일 출판될 예정입니다.
심포지움_미술, 도시, 시각문화의 콘텍스트 2003_0816_토요일_03:00pm~06:00pm / 대안공간 루프 발제_강수미 / 강홍구 / 참여작가 6인 지정질의 및 자유토론
쌈지스페이스 갤러리 1,2,3층 서울 마포구 창전동 5-129번지 Tel. 02_3142_1695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3번지 B1 Tel. 02_3141_1377
매일 '공사중'인 삶 한 복판에서_전시와 책의 기획의도에 대신하여 1. 서울생활의 발견에서 미술(화)까지 ● 서울의 도로가 정체되는 것은 서울이 매일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 같지만, 도대체 왜 서울이 매일같이 물리적인 의미에서든 제도적인 의미에서든 공사를 해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 그리 당연한 일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더 안락하고 효율적인 서울의 생활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서울의 현재가 정신 없이 여기저기를 뜯어고치고, 새로운 것들을 도입해야 할 만큼 빈곤한 과거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혹시 그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새겨진 부정적 강박, 우리가 가진 것은 빈곤하여 정체되면 뒤떨어진다고 하는 항시적 위기의식을 잠재우기 위한 공사(空事)들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정체되지 않기 위해 정체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 움직이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류 평화를 앞세운 전쟁의 부조리, 과학기술의 발전과 동시에 진행되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 이성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보이는 광기 등, 역사가 보여주는 많은 실증적인 퇴보의 예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인들은 진보를 믿는다. 그 '진보(進步)'가 문자 그대로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의미할 때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고, 낙오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목표를 세우고 명분을 만들어, 헌 것을 새 것으로 갈아치우고, 낡은 것을 헐고 새로운 것을 세우며, 없던 길을 뚫고 앞으로 전진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명분에서 진보는 과거를 낡은 것, 뒤에 있는 것으로만 정의하며, 현재를 미래상을 뒤쫓는 '움직임'으로만 긍정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움직임을 맹신하는 그와 비슷한 정도로 우리는 안정을 희구한다. 어떤 것 안에 확정적으로 자리 잡지 않은 것, 어떤 범위로 정의되지 않는 것, 이것과 저것으로 분류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불안해하고, 의심하며,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 왔던 대통령상과 거리가 멀게 여과 없이 말하고, 국가의 소소한 일에서부터 큰일까지를 국민과 토론으로 결정하자고 덤벼들 때, 우리는 불안하다. 대통령은 불안정한 이 사회를 안정되게 만들 의무가 있는 것이지, 그 불안정함이 가진 긴장의 묘미를 함께 즐기자고 뽑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안정을 희구하는 태도는 언제나 어느 한 곳은 공사 중인 서울, 나아가 한국의 도시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짜증과 불편함에서도 발견된다. 아침에 파헤쳐 졌던 도로가 저녁에 덮이고, 다음날 다시 그 일을 반복할 때, 대로를 내겠다고 포크레인이 산을 헤집어 들어갈 때, 이웃집이 재건축에 들어가 온갖 소음과 먼지가 뒤범벅되어 내 집 창문을 넘나들 때 우리는 그만 새로움이고, 발전이고, 진보고 간에 집어치우고 그만 좀 조용히 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안정된 환경에서 고요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 그렇다면 정지를 두려워하는 우리와 안정을 희구하는 우리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이다. 진보와 안정에 대한 이러한 이율배반이 한 곳에서 동거하는 것은 분명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고, 그 이유들은 또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들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다수 혹은 전체성과 소수 혹은 개별성과 관련이 있다. 즉 진보에 대한 강박은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추구되는 것이고, 안정되고 싶어하는 것은 보다 작은 삶의 테두리 안에서 추구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작은 삶, 즉 구체적인 유대 관계에 기초하고, 정서와 이해가 통용되는 소사회적인 삶에서 끊임없는 변화는 스트레스만 줄뿐,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삶을 언제나 이미 전체라는 큰 테두리의 일부, 혹은 그 우산 아래 있는 약한 것으로 배워 왔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과거 어느 때까지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내 삶과 작은 삶의 방식이 진보와 발전이라는 큰 테두리의 목적에 기여하느라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되더라도 내버려두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내적으로는 이율배반의 심리가 언제나 '공사 중'일지라도. 그러나 전체성과 개별성의 도식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개별성 혹은 작은 삶이 온전하지 못하고 안정을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요소로 품은 전체가 진보하고 더 잘 앞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을까?
『서울생활의 발견-삶의 사각지대를 보라』 전시와 그 전시를 비평적 시각에서 재구성한 책『서울생활의 재발견』은, 삶과 미술의 관계를 다시 봄으로써 각자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즉 이는 '생활', '삶', '사각지대', '미술'이라는 언 듯 잘 어울릴 성싶지 않은 단어들이 조합된 제목처럼, 사회 내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작은 내부를 들여다보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유의미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각자의 작은 내부란 전체에 대해 직접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고, 비가시적이어서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의미한다. 미술은 현실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체의 자율적인 구조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는 미술이 삶과 분리되어 있다거나, 현실 사회의 메커니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메커니즘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삶과 미술은 비가시적인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서로 영향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의 작지만 구체적인 삶이 동시대 미술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며, 그 미술작품들을 통해 동시대의 큰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 이 전시와 책이 삶과 미술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 보기 위해 처음 걸음을 뗀 곳이 바로 '서울'이다. 서울의 생활이 언제나 공사 중에 있다면, 그와 함께 묶여 있는 미술 또한 언제나 공사 중에 있다. 만약 서울의 문화현상이 정체를 지양하는 가운데 현실을 신화화하는데 급급하고 있다면, 그와 영향관계에 있는 미술 또한 부지불식간에 그 문화가 선호하는 효과들에 몰두하고, 동시대 문화를 신화화하는데 기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에서는 작은 삶의 의미도 파악하기 어렵고, 미술의 자율성 또한 확보하기 어렵다. 전체와 부분 사이, 삶과 미술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기만 할 것이고, 구체적 삶과 미술은 결국 유의미성을 얻지 못한 채 전체의 메커니즘에 종속되게 될 것이다. ● 이 책에 앞서 출간되었던 『서울생활의 발견 』에서 우리는 '서울'의 현실 삶의 지층에 실증적으로 접근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서울에 대한 관념적 이미지와 실제로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공간간의 간극을 발견했다. 또한 청계천, 중림동, 인사동, 북한산 등 서울의 장소가 갖는 특이성과 내재하고 있는 힘을 보았다. 그 힘은 단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힘이 아니라 문화·역사적으로 축적된 힘이며, 정사(正史)에 기입되지 않는 작은 삶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일구어 낸 힘이다. 그 책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미술'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러한 의미로 한정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우리 시대의 감각, 지각의 방식, 공간과의 만남, 그러니까 미술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문화'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 이 책은 그 『서울생활의 발견 』의 시각과 내용이 '미술'이라는 사회 내 특수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미술이 서울의 삶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묻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 있다.
2. 재발견, 삶의 사각지대를 보라. ● 상징적으로 표현하자면, 흔히 우리는 '미술'을 삶의 위에 혹은 옆에, 그것도 아니면 아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미술은 언제나 삶과 면대면(face to face)의 관계에 있어왔다. 즉 한 쪽이 우세해서 동일화되는 관계가 아닌, 분리시킬 수 없지만 일정한 거리를 가진 영향권의 관계에 있어왔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 내의 소우주들, 예를 들어 문화·정치·예술에서부터 그 안의 각 직업들까지를 장(場, champ)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사회 내의 각각의 장들은 하나의 소우주로서 그 자신의 법칙을 갖고, 전체 세계 안에서 위치를 획득하기 위해 다른 소우주와 친화·배척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술이라는 장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미술은 사회 안에 위치하지만, 자율적 구조를 갖는 하나의 소우주로서 고유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그 때 고유한 성격은 여타 사회의 장들과 친화와 배제의 정치학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배제가 없다면 미술은 사회 안에서 개별성을 띠며 존립할 수 없고, 사회와의 친화력이 없다면 이미 사회 내에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세계의 것일 것이다. ● 나는 우리 현실사회에서 예술이 사회 전체를 변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으며,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는 예술이 처한 오늘의 문화적 곤궁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가 좀 더 변혁되기를, 사회가 최고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을 발휘해서 그 윤택함의 여파가 예술에까지 미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예술도 먹고 살만 해져서 좀 할만해지고, 비난 섞인 '유미주의'라는 말을 푸짐하게 들어먹어도 좋으니 예술이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되길 바란다. 결국 어떻든 간에 예술은 한 사회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 내에 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 우월한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관계에 있다는 말로 새겨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점증하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력과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예술 자체가 '문화 산업'에 종속되어 가는 처지이지만. ● 나는 한 사회의 전체적인 수준과 내용은 그 사회의 예술의 수준과 내용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소재의 선택과 소재의 전개 방법이 문화적 기억에 의하여 지배되고, 이 문화적 기억이란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는 김우창의 말처럼 예술작품은 작품의 소재라는 출발점부터 작가와 작품이 속한 사회의 터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문화가 축적되면서 구성되는 서사 안에 있다. 그리고 다시 예술작품이 그 서사의 일부를 써 나간다. 따라서 개별 예술작품은 정치·경제·문화의 집합적 사회 속에서 읽혀질 수밖에 없으며, 역으로 개별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당대 사회의 지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우리의 눈이 먼 것과 가까운 것, 정면에 있는 것과 측면에 있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없듯이 사회와 예술작품 각각, 그리고 그 관계 속에도 사각지대는 있게 마련이다. ● '사각(死角)'이란 사전적인 의미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눈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나 범위"를 일컫는다. 정의에서 보듯 사각은 시각(視覺)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각의 사각은 물리적 공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행정의 사각지대", "인식의 사각지대"라는 말에서 함의되듯이 제도적, 인식적 공간에도 적용된다.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말에서나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봄(見)'을 단순히 보는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연결 지어 생각하듯이, 사각의 뜻풀이에서도 시각은 안다는 인식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한편으로 안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도하게 성실한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어려운 수학 공식이나 지리학 같은 걸 공부시키면서 "꼭꼭 씹어 네 것으로 해라"라고 말할 때, 그 선생님들은 앎이란 결국 나 아닌 모든 외부를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 과정을 통해 소유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각'이란 보는 행위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면서 알 수 없는 곳, 혹은 아직 보지 못하며 알지 못한 것, 그리고 앎을 통한 소유가 일어나지 못하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공간이나 대상이겠다. ● 나는 이 책과 전시에서 우리의 신체적·인식적 시선이 미치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보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서울 삶의 사각지대를 조용한 가운데 탐색해 온 미술가들의 미술작품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그 작가와 작품들이 위치한 서울의 실제적 공간과 제도가 형성하는 의미망들을 문제시하면서. ● 예컨대 여러분은 미술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미술관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미술작품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흰 벽과 조용하다 못해 침묵하는 공간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그 마름이 잘 된 침묵의 사각형 공간에 들어서면 그 공간 내부는 열려 있어서 모든 진열된 사물이 한 눈에, 일망타진하듯 들어온다. 물론 개중에는 시야를 가로막는 벽도 서 있고, 설치 작품들도 있어서 한 눈에 들어온다는 말이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미술관이란 무엇인가를 본다는 행위 자체만이 행해지는 공간이라는 면에서 우리가 미술관에서 행할 수 있는 행위란 '열심히 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미술관이란 앞서 언급했듯 내부적으로 열려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내부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보고 있는 우리 또한 보여 질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미술관의 폐쇄회로를 통해서 보여 질 수 있다는 의미이지만, 전시를 관람하는 우리 서로 서로가 시각 장에서 관찰하고 관찰 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화적이고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미리부터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전시장 내 정숙" 같은 미술관 관람의 자세를 숙지하고, 그러한 태도로 작품들을 관람하며, 작품이나 전시의 제작자가 유도하는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미술관이 요구하는, 혹은 작품의 컨셉이나 전시기획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작품감상 및 작품 읽기를 한다. 여기서 관람자 개개인인 우리의 시각과 감수성은 제한된다. 그렇다면 미술작품을 잘 보기 위해 제도적으로 마름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도 필연적으로 사각지대가 생겨날 것이다. 물론 이 작품과 전시의 사각지대는 미술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이미 미술관 제도, 조율되고 개념화 된 작품이나 전시의 의도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서울생활의 발견-삶의 사각지대를 보라』展은 이러한 여타의 전시와 외양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시 기획의도를 디테일하게 알지 못하는 관람자는 왜 이런 전시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오는 경우 전시 명을 떠올리며 자신이 아는 서울의 낯익은 모습 혹은 학습된 풍경을 보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풍경인지 나는 모르겠다. 학습되었다 해도 개개인이 조금씩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 또한 한 명의 서울 생활인으로서 현상적으로 그려 볼 뿐이다. ● 그러나 이 전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행위가 이미 언제나 보여 진다고 하는 사회적 설정 안에 놓여 있듯이, 서울에 대한 미술이 서울이라는 사회 안에 놓여 있고, 현재 서울이라는 세계가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 안에 있다는, 그 '역학관계의 풍경'이다. 말하자면 『서울생활의 발견-삶의 사각지대를 보라』展은 모더니즘에서 유래한 흰 벽의 미술관들이 애써 경계를 만들고자 하는 '예술' / '삶', '미적 체험' / '일상적 체험', '미적 문제' / '생활의 문제'라는 도식에서 기호(/)의 이쪽저쪽을 같이 보고자 한 것이다.(경계를 지우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울 이유도 없다.) 그 보기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보여 진다'는 보기의 변증법을 인정하면서, 미술과 사회라는 서로의 개별성이 인정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지점에서 사각지대는 오히려 발견될 것이므로. ● 외국 작가든 국내 작가든 미술 전시 기간동안 행해지는 숱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당신은 미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다소 식상한 질문에 '나는 삶이 미술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한다. 이 대답은 다소 불성실하게 들리지만, 사실 이러한 진술만큼 작가와 작품을 한데 묶어 진실하게 설명하는 말도 없다. 도대체 작가가 도원(桃園)에서 이슬을 먹고, 이슬로 작업하지 않는 한, 삶과 예술이 분리될 수 있겠는가? 물론 작품의 미학적 질에 대한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미학 또한 예술처럼 사회 내 하나의 소우주, 장(場)이고 학문세계에서 하나의 분과여서 미학적 평가라는 자체가 미학으로 수렴되는 학문적, 사회적, 제도적 형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행위, 활동은 삶 안에서 일어나거나, 삶의 행위일 뿐이다.
『서울생활의 발견-삶의 사각지대를 보라』展과 이를 통해 동시대 미술작품과 서울을 재발견해 보는 책『서울생활의 재발견』은 "삶이 미술 혹은 예술"이라는 생각을 쫓아가 보는 전시이며 글이다. 공간적으로 서울에 한정시켰던 것은 모든 특정한 삶의 장소를 일반화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여기의 글과 전시는 현재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미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서울이라는 매트릭스에 놓아 보고 그것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동시대 예술과 문화와 삶의 현장을 가늠해 보고자 한 것이다. ● 서울의 모든 것, 그리고 그에 비견할 만큼 복잡하고 섬세한 미술작품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가능한 것은 그때 그때의 좁은 지역에서의 제한된 의미를 큰 맥락과 대조해 보고, 단편적인 작품에서의 예민한 울림이 공명할 좀 더 너른 지점을 찾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 기획자는 그러한 일의 매개자이거나 유도자(elicitor)일 뿐이다. 벡터(vector)는 미술가이고 그들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서울의 삶의 공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한 꺼풀 벗긴 인식의 층위를 그리는 화가들. 서울을 현상학적으로 접근하여 카메라의 기계적 재현을 넘어 실존하는 서울의 삶과 그 삶의 지각을 보여주고자 하는 사진가들. 그리고 기왕 정의된 미술 장르의 경계들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사진·영상·설치·다큐멘터리, 그리고 여기서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작업의 작가들. ● 전시와 글은 다양한 연령과 경력, 그리고 상이한 원천을 배경으로 한 작품세계를 가진 우리 시대 미술가 총 27명의 80여 작품에 힘입은 결과이다. 그러니까 이 전시와 글은 동시대 미술작품들을 통해 '서울'과 '삶'과 '미술'의 문맥을 돌아보고 반성적으로 사유해 본 것이다. 그 미술작품이라는 개별자들이 전시와 이 글들에 도움을 주어 서로 공명하면서, 그들이 발견한 서울 삶의 사각지대를 보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 강수미
Vol.20030729b | 서울생활의 발견 : 삶의 사각지대를 보라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