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공간-농인표정연구

엄은섭 사진展   2003_0716 ▶ 2003_0722

엄은섭_느끼다_흑백인화_40×5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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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716_수요일_06: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최초의 작업의도 ● 언젠가 깜깜한 밤에 버스를 타고 바닷가 마을을 지난적이 있습니다. 해안선 도로를 따라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빛이 턱없이 부족해 버스 바로 앞을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죠. 운전자의 익숙한 길눈과 본능적 방향 감각에 의해 버스가 안전하게 길을 따라 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 파도소리가 참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바다 냄새도 물씬 들어 왔구요. 단지 어둠 때문에 바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 다음 날 아침해가 뜨면 파도소리보다, 짠 바다 냄새 보다, 바다의 존재감이, 그 푸른빛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겠죠.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파도소리와 짠 갯내음이 바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 파도소리와 바다냄새를 표현해서 보이지 않는 그의 존재를 암시하고 드러내는 것- 바로 제가 사진으로 하고 싶은 일입니다. ● 제가 훌륭히 그것을 제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바다의 존재를 의심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다는 아침이 되면 그 존재가 드러나지만 세상에는 아침이 되어도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엄은섭_느끼다_컬러인화_110×86cm_2003_부분

왜 농인인가? ● 자, 저의 사진 작업으로 가보지요, 청인(hearing people)들에게는 농인(the deaf)들의 대화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청인들은 수화를 보아도 이해 못합니다. 저 같은 청인이 수화(sign language)를 알려면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에게 수화는 보이지 않는 세계, 느끼고 감지해서 표면 위로, 사물로써 끌어 내어야 할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농사회에 들어와 보니, 제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던 손말, 즉 수화라는 것이, 손의 기호와 얼굴 표정 그리고 제스추어, 농인의 문화 등이 모두 합쳐진 언어, 즉 수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단순 기호가 아닌 언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 최초의 작업 의도인 보이지 않는 세계 드러내기를 농인들의 수어 가운데 표정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의 공간-농인표정연구」입니다.

엄은섭_느끼다_컬러인화_110×86cm_2003_부분

사진 방법론 ● 저는 「언어의 공간」 사진 촬영방법을 객관적 사진의 역사적 맥락에서 끌어냈는데요, 「언어의 공간」 촬영법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말 그대로 깨끗하게 촬영했습니다. 모델 외의 정보의 간섭을 피하기 위한 흰 배경지, 플랫한 조명 등 우리 주민 등록증 사진과 같은 포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사진이 결국은 -앞으로 이야기 되겠지만-, 자료로서 기능하기를 바라고 그 목적에 부합한 촬영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언어의 공간」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까지 연령의 남녀 농인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농사회에서 꾸준히 다른 농인과 교류를 하며 수화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선택한 7개의 단어를 연출했는데요, 같은 단어를 다른 연령대의 농인 남녀에게 동어 반복적으로 요구 했구요, 관객이나 독자에게 격자형식의 배열을 통해 보여주게 됩니다.

엄은섭_느끼다_컬러인화_110×86cm_2003_부분

전망 ● 농인의 표정 작업은 저의 최초의 사진작업 의도, 즉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면위로 드러내기-와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농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즉 세상과 통하는 장치를 만들어 낼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작업과정 중에 불행인지-농사회 입장-, 행운인지-작가 입장-, 우리나라에 농인들의 표정 자료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미국이나 독일 등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대해 배려를 좀 한다는 나라에서는 이미 이런 표정 자료집이 있습니다. 눈썹의 움직임, 눈동자의 방향, 입술 모양 하나 하나가 문법으로 인정될 정도로 정교한 체계를 갖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수화교재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수화교재를 보면 대부분 수화만 표현하고 있고, 얼굴 표정 표현이 모두 같습니다. 심지어 기쁠때와 슬플때의 표정까지도 말이죠. 분명 우리의 감정은 아주 섬세해서 쪼개고, 나눌수 있으며, 그 결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 그리고 그 감정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새로운 수화교재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수화가 아닌 다양한 농문화가 포함된 수어가 표현된 교재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예술이라는 장르의 효용성과 만나는 지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바로 제가 하는 작업이 자료로서 기능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제가 표현하고 싶어했던 사진이면서, 동시에 교재로서의 기능을 하는 사진. 이것은 저와 농사회가 동시에 시너지를 갖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무적인 것은 대학에서 수화 통역을 공부하는 젊은 농인 친구들이 모국어로서의 수어 연구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의 한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저의 인물 표정 작업에도 큰 관심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농사회와 그 속에 존재하는 농문화의 정체성 찾기 일환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제 자신과 자료로서의 사진을 적극 활용할 농인 학회 또는 교육기관이 함께 공동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언어의 공간」이 그 토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 「언어와 공간」이 청인과 농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다수와 소수,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 되고, 또 앞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엄은섭

Vol.20030719b | 엄은섭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