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Borders

지니서(Jinnie Seo) 멀티플 드로잉展   2003_0704 ▶ 2003_0720

지니서_Blue Borders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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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사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55번지 B1,1층 Tel. 02_736_1447

촉각적 지성공간으로서의 드로잉 ● 지니서에게 선과 색채는 자신의 선험성을 담보하는 일종의 그릇이다. 선과 형태 그리고 그것이 빚어내는 공간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심은 드로잉이라는 장르로 드러난다. 현대미술에 있어 드로잉은 더 이상 단순한 기법이나 매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그것은 직관적이며 본능적인 실험의 자유가 극대화되는 미묘한 방법론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한편으론 여전히 드로잉이 자기지향적이고 심하게는 자폐적인 상태를 노정하기도 한다는 측면에서 안정된 패러다임의 밖에서 방황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로잉은 모든 유해한 담론으로부터 안전하게 예술가의 자율적인 본성에 안착하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 지점에 지니서의 작업이 놓여있다. ● 작가는 지금까지 생물학 전공이라는 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게 주로 생명현상의 본질에 관심을 갖고 생물체의 유기적인 형상과 구조를 시각화하는 한편, 건축적인 구조와 공간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표현해왔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선과 공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색채에 대한 변주가 훨씬 더 심화된 양상으로 드러난다. 특히 공간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심리적이며 철학적인 양상으로 표명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녀에게 있어 공간은 관계가 형성되고 경험되는 고도로 자의식적인 장인 동시에 심리적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 오늘날의 공간관념은 움직임의 함의가 커지고 시각적인 것을 넘어 훨씬 깊숙한 육감적 공간을 지향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지니서의 공간은 촉각적이긴 하되 매우 절제된 균제미를 가진 지적인 공간에 가깝다. 이러한 작가의 공간에서 선과 형태와 색채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존재한다. 즉 그녀의 작업에서 선과 형태와 색채는 어느 것이 우월하거나 보조적이지 않은 등가적인 관계를 유지해온다는 말이다. 근래에 잠시 색채가 우월한 듯이 보이는 일련의 작업이 보여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선과 색채 그 어느 것도 소홀히 취급되지 않는다. 예컨대 그녀의 선과 색채는 서로를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인 미묘한 평형상태를 이룬다.

지니서_Blue Borders_2003

파랑의 변주 : 그림자(음) 속의 빛(양) ● 지니서의 화면은 언뜻 일련의 색면추상을 환기한다. 작가는 견고하고 신비스러운 화면을 만들기 위해 색채가 한겹씩 층을 이루도록 여러 차례 붓질한다. 이렇게 탄생한 작가의 화면은 붓질이 아닌, 일종의 섬유의 직조처럼 세밀하고 밀도 있게 다가온다. 그것은 아마 그녀가 스코히겐 미술학교 시절 재료의 물성들이 놀라울 정도로 친화력을 보였던 프레스코기법의 전수와 더불어, 섬유무역을 하던 조부의 덕분으로 집안 가득 넘쳤던 비단과 모시 등의 옷감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유년시절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색이 마치 후각처럼 회상적이며 노스텔지어적 아우라로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마치 현대적 프레스코벽화처럼 섬세한 투명성을 보여주는 그녀의 이번 작품은 온통 파랑이다. 그런데 그 파랑은 단순한 파랑이 아니다. 모델링 페이스트와 아크릴릭을 혼합하여 만들어낸 푸른 색채의 뉘앙스는 미묘하다. 작가가 이처럼 푸른색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작가에게 이 푸른색은 항상 순수하고 지적이며 사색의 통로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푸른색은 확산의 에너지보다는 응축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원심적이라기보다는 구심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른색은 어느 색보다 깊이있는 일루전을 창출한다고 보여진다. 만리오 브루사틴(Manlio Brusatin)의 「그리스적인 색채에 관한 연구」에서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파랑은 사고와 존재의 세계(흑과 백)와 자연과 실재의 세계(황과 적) 사이에 뚜렷한 구분원칙을 담고 있는 서양적 사고에 견주어볼 때 근본적으로 동양적이며 혼합적인 성질(그늘 속의 빛으로서)을 지닌다."고 말한다. 이 언급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늘 속의 빛" 혹은 "그림자 속의 빛"이라는 구절이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푸른색 역시 이런 동양사상의 색가(色價) 즉 음에 깃들여있는 양의 요소가 선험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 이른바 그녀의 직조적 색채는 투명이라는 씨실과 불투명이라는 날실로 엮여진 것처럼 그 안으로부터 미묘한 빛이 새어나오며 마치 숨을 고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관자는 유연하게 그 호흡을 따라가며 일종의 '명상'의 체험을 갖게된다. 실제 선과 색채의 반복적이고 연속적인 사용은 연상작용 등 잡다한 외부적인 불순물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으로서 회화를 극단적 순수성으로 정화시킨다. 이런 과정에 '명상'의 정신적 상태가 자연스럽게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작업이 여느 추상미술이 표방한 구도적?철학적 차원의 것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형적이며 공간적인 형식실험에 좀더 비중이 실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니서_Blue Borders_2003

극적인 드로잉과 관객의 개입 ● 그녀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상상력은 급기야 이차원의 일루전으로 존재하던 공간적 형태를 삼차원으로 끄집어내어 한층 극대화된 실험으로 가시화된다. 이를테면 이번 전시는 두 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첫 번째 방에서는 이전의 작업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신체구조와 유사한 버티컬한 평면드로잉을 보여주고, 두 번째 방에서는 이런 드로잉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공간에 점유하는지, 그 프로세스를 가늠할 수 있는 작업이 보여진다. ● 특히 두 번째 방에서 보여지는, 기존의 유기적이며 기하학적인 형상의 평면드로잉이 보여주던 공간의 층(layer)을 한켜 한켜 벗겨내듯 칼로 오려낸 '오리는 드로잉'들은 천장에서 바닥에 내려질 정도의 길이로 설치, 조각적 회화 혹은 건축적 회화를 연상시킨다. 한점 한점 독립된 작품이기도 한 동시에 전체가 하나의 유니트로 기능하는 이 '오려진 드로잉'에서, 오려서 생긴 선들로 말미암은 형상은 공간인 동시에 빈 공간이며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횡의 여러 겹으로 설치된 이 '오려진 드로잉'들은 정면?측면?뒷면은 물론 그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오려진 빈 공간은 열린 의미의 창 혹은 프레임이 되어 자칫 배경으로 머물 수 있는 뒤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어쩌면 이런 네가티브의 공간은 실제의 공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야기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려서 생긴 이 빈 공간이 다시 전시장의 바닥과 벽면에 투사되어 마치 유동하는 그림자와 같은 새로운 극적인 일루전이 창출되는 등 매우 다중적이고 다차원적인 공간의 이미지가 생성되는 것이다. ● 작품이 적당한 크기로 벽에 걸리면 관람자들은 작품을 느끼고 관찰하고 감상하지만, 거대한 규모로 설치되거나 특정장소성(site-specific)을 가지게 되면 작품은 일종의 무대출현과 같은 연극적 상황을 연출하게 되어 관람자를 낯선 경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런 연극성은 모더니즘의 사물성을 거론할 때 야기되는 것으로, 그것은 관람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작품이 일종의 무대상황 속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니서의 '오려진 드로잉'은 작가 자신은 물론이고 관객에게 신체의 사용을 극대화할 것을 요구하며, 따라서 더 이상 작품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관자가 작품에 둘러싸이는 연극적 경험은 회화가 더 이상 시각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촉각적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촉각적 공간 속에서 작가와 회화, 그리고 관람자는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 역시 관객의 참여와 소통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늘 여백을 채우며 의미를 생산하고,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수용자의 역할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녀의 작업 역시 관람자의 상황을 포함한 작품의 체험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유경희

Vol.20030715b | 지니서(Jinnie Seo) 멀티플 드로잉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