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함과 강렬함의 향기

오수경 회화展   2003_0710 ▶ 2003_0716

오수경_회상Ⅰ_캔버스에 유채_117×91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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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710_목요일_06:00pm

광주신세계갤러리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49-1번지 신세계백화점 광주점 1층 Tel. 062_360_1630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뜨겁고 치열하고 쉽게 절망하던 그 시절. 대학 1 학년을 넘기자마자 휴학을 하고 일년 동안 지방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처음 복학한 날. ●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헐렁한 흰 바지와 줄무늬 스웨터를 걸치고 허리엔 재킷을 질끈 동여맨, 눈매가 서늘한 한 친구가 커다란 캔버스를 끌면서 실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아이. 푸르고 서늘한 느티나무 같은, 아니 그 느티나무 아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멋지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던 그 친구가 오수경이다. ● 순간, 이상하게도 적응하기 힘들 것 만 같았던 나의 복학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 얘기를 했을 때 그녀가 피식 웃던 생각이 난다. 그 순간도 이제는 미소로 떠올리는 시절이 되었지만.

오수경_붓꽃Ⅱ_캔버스에 유채_53×46cm_2002

나는 그때만 해도 그녀가 누구의 손녀이고 딸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 바도 아니었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가꿔 나가고 있는 작업세계가 어떤 근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작품이 당시 유행하던 소위 쿨한 사조와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1990년대 초반, 당시 우리는 외국 잡지에 나온 최신작품의 이미지를 답습해가며 어줍잖은 설치나 매체 등 소위 ?실험적인 시대?를 보내느라 급급했었다. ● 돌이켜 보니 그 시절 그녀는 자신이 지닌 ?위대한 유산?으로부터 이미 자유로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것을 담담하게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그녀도 나만큼이나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오수경_범부채_캔버스에 유채_46×53cm_2002

이번이 그녀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7년 5월 첫 번째 개인전 이후 그녀의 삶만큼이나 그녀의 작품세계도 큰 폭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 언뜻 지난 6년의 세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증이 일 정도로 오수경의 근작들은 첫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하면서도 커다란 변화를 보이고 있다. ● 오수경이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여준 작품들은 그녀의 대학원 시절 작업의 방향을 이어가면서 팝 아트, 특히 앤디 와홀의 작품에서와 같은 차용, 반복과 병렬의 이미지, 그리고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의 화면 구성 등 방법론적 차용과 실험의 연장 선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번 두 번째 개인전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실험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안정을 찾고 있으며, 앞으로 그녀의 작품에 나타날 변화의 양상을 어렴풋이 예견해볼 수 있다. ● 선택과 실험이라는 강박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던 과거의 작품과 비교해볼 때 이번 개인전의 작품들은 아름다움과 즐거움 한 켠으로 농밀함과 쓸쓸함을 겹겹이 담고 있다. 사려 깊지 않게, 이토록 들쭉날쭉한 표현을 드러내는 것은 예전과는 다른 유려함과 더불어 어떤 변화의 신호가 개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수경_상상 수족관_캔버스에 유채_160×130cm_2002 오수경_시원한 나무그늘_캔버스에 유채_91×73cm_2001

물고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그린 작품 「상상 수족관」을 보자. ● 슬쩍 엉뚱한 행동을 해 놓고는 능청스럽게 화장을 고치고 앙증맞은 포즈로 돌아 앉은, 내숭 가득한 아가씨의 예쁜 옆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한 이미지다. 이것은 마치 한편의 뮤지컬 만화 영화의 한 컷을 떼어 높은 듯한 인상이다. 화면 가득 형형색색 떠다니는 능청스럽고 귀여운 물고기 떼들. 이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저 미소가 흘러나오고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감이 풀어진다. ● 「시원한 나무그늘」은 오수경에 대한 나의 첫인상과 닿아 있다. 시원한 느티나무 아래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다가 방금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의 그녀를 기억한다. 서늘한 이미지의 느티나무 아래 서 있던 그녀가 이제는 시원한 나무그늘을 우리에게 건넨다. ● 그 동안 줄곧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해 오던 추억이나 지나온 경험(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더라도)을 표현한 작품들이 아름다움 저편에 알 수 없는 쓸쓸함과 혼란을 담고 있던 데 비해,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에서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급격히 달라진 양상을 볼 수 있다. ● 즐겁고, 경쾌하고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어딘가 고집스러움이 보인다. 하지만 그 고집스러움은 편안함과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새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하고, 느끼고 사유하게 한다. ● 이제 그녀의 추억의 꽃밭으로 들어가 보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따뜻하고 은밀한 무언가를 바탕에 머금은 채 내뿜는 강한 힘이랄까. 동시에 기법적으로 미세한 변화들 속에서 추후 작품세계에 불러올 큰 파장이 함께 느껴진다.

오수경_가을_캔버스에 유채_33.3×24.2cm_2001

끈질기게 기억과 경험의 문제에 천착해가며 미련스러우리 만치 화면 가득 꽃을 메워간다. 유년과 성장과정의 기억으로 정서의 한 켠에 자리한 지산동 고향집 뜰에 핀 꽃들을 화면 가득 반복해 그려 넣는다. 광주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그녀의 고향집 즉, 조부 고 오지호 화백의 고택은 지역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나처럼 길가에 차들이 오가는 도회지에서 자란 사람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유형, 무형의 유산이 바로 그녀를 키운 요소들이다. 그래서일까? 첨단의 무엇을 이용하여 시선을 주목시키는,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또래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미련스럽도록 자신의 세계 안에서 화면 가득 꽃을 그려 넣고 또 그려 넣는다. ● 올 오버로 화면 전체에 피어있는 꽃들은 아름다움과 심약함과 더불어 강렬한 향기를 담고 있다. 오수경의 작품은 이중적인 의미 층을 갖고 있다.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추억하고 상처 받고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한 켜 한 켜 지워나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이중적 행위로서의 붓질 속에는 굳이 이러저러한 담론들을 예시하지 않아도 다양하게 읽히는 함의가 담겨 있다.

오수경_소국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01

앞서 예술가와 그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나 경험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듯이 그녀의 작품세계 역시 이러한 관계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작가 오수경의 작품세계가 안정감을 찾아가면 갈수록 점차 우리의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에 큰 획을 그은 그녀의 가계 혹은 미술사조에서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왜일까? ● 이 위대한 유산은 그녀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이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개인전에서 대단히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는 치밀하고 친밀한 새로운 기법적 시도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짐이 그리 오래도록 그녀를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본다. ■ 이은하

Vol.20030712a | 오수경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