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박미나 회화展   2003_0709 ▶ 2003_0727 / 월요일 휴관

박미나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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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709_수요일_04:00pm~07:00pm

갤러리 빔 서울 종로구 화동 39번지 Tel. 02_723_8574

작가에 대해 ● 텔레비전에서 종종 방영되는 교양 미술사 프로그램을 주의 깊게 시청해본 적이 있다면, 르네상스 이후 회화의 역사가 원근법과 그 변형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대중매체에서 조차 '회화의 죽음'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다 보니, 메타 비평으로서의 포스트-모던 회화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누군가 나서서 회화 작업으로 당대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그 면적이 적건 넓건 간에) 개척하려 한다고 말하면, 그가 제 정신이라고 생각할 작가나 비평가는 없게 마련이다. 하지만 박미나는 회화작업을 통해 당대 미술의 외연을 약간은 넓혀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근본적인 형식실험을 지속했고, 놀랍게도 그 결과는 꽤 성공적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형식 실험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1996년 이후 박미나는 회화를 통해 세상을 재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일관되게 연구해왔다. 그의 회화는 '개념적 원근법'이라 부를만한 새로운 재현 방법에 의해 지배받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회화의 역사에 대한 소설' 같은 것으로, 예전의 회화와는 다른 방식을 통해 콘졍투어(기표와 기의를 조작적으로 관계 짓는 기호)의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박미나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얼마 전 나는 스스로에게 박미나의 작업과 유사한 사례를 꼽아보라고 물었다. 하지만 선뜻 답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미술계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개인적 자문자답을 '예술'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과, 뉴 미디어 아티스트임을 자처하며 '인터-액티브'하게 작동한다고 주장되는 오브제를 양산하는 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폭로'하는 작가들에 비해 그들이 더 최신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진정성을 버리고 트렌드를 취한 작업이 예술의 최전선에 서있을 리 만무하다. 이미 종료된 실험을 1년 뒤에 반복하건, 10년 뒤에 반복하건, 그저 '반복'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러한 작업들엔 '정치'가 되어버린 '태도'만 남아있고, 그러한 태도는 작가들에게 정치 집단화를 요구하는 법이다. 따라서 나는 당대 예술의 최전선에서 작업하고 있는 박미나가 대단히 고맙고 자랑스럽다.

박미나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박미나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이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는 점은 놀랍다. 90년대 초반, 호시절을 구가하던 포스트-모던 회화는 이미 빠른 속도로 그 실험의 유효성을 상실해가고 있고, 미술계는 정체성의 정치학과 다문화주의의 헛된 구호아래 난장판의 대형 전시를 남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미술계의 트렌드와 동떨어진 실험을 조용히 진행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작업의 특징은 사회적 서사를 작품 내로 끌어들이되 그 서사를 작가의 주관적 잣대로 가치판단 내리지 않는 데에 있다. 작품의 내부로 들어온 사회적 서사는 작가의 주체와 동급의 위상을 지닌 채 흥미로운 작업의 게임을 구성한다. 나는 이 작가의 가치가 회화의 영역에서 작가의 주체와 사회적 서사가 마주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낸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업 태도(정확히 말해, 작가 주체의 포지셔닝 방식)는 사실 90년대 중.후반에 형성된 포스트-휴먼 담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책장에 포스트-휴먼 이론을 평정한 케서린 헤일즈나, 인지과학의 철학적 지평을 정리한 프린시스코 J. 바렐라의 책이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포스트-휴먼 담론에 영향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예의 포스트-휴먼한 시도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보통 포스트-휴먼 담론에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첨단'의 시각언어를 구사하거나, 가상공간이나 신체변형의 서사에 경도된 작업을 펼치는 데에 비에, 박미나의 작업은 첨단의 이미지나 서사, 뉴미디어에 대한 유아적 상상력 따위와는 무관하다.

박미나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선보이는 작업에 대해 ● 이번 전시에서 박미나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5종류의 작업을 보여준다. 「하늘Sky」작업에서 작가는 하늘의 색을 수집했는데, 그 수집과정은 전통적인 정물화 작업에서 화가들이 정물의 색상에 가장 근접한 색을 만들기 위해 행하는 색의 탐구 과정을 토대로 삼은 것이다. 작업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대형 화방에 나가 하늘색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물감을 구매한다. 그리고 30일 동안 화구를 챙겨들고 거리에 나가, 정해진 시간에 특정한 지점의 하늘의 색을 물감으로 재현한다. 작가는 작가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기 위해 우선 종이에 가장 근접한 색상의 물감을 짠다. 그리고 그 물감들을 혼합해서 바로 지금의 하늘과 같은 색을 만들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하늘과 수차례 비교하여 수정한다. 그러면 종이에 하늘의 색을 채집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남기 마련이고, 그것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표면처럼 시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작업에서 작품은 결과인가? 아니면 과정인가? 또한 서사의 흐름과 양에도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형성된다. 하늘의 색을 채집하기 위해 사용된 물감들의 색상과 이름은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 레디메이드 물감을 사용해 제작된 색상은 자연의 색상인가? 작가의 (개성어린) 색상인가? 아니면 사회적 통념의 색상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최소화한 작가의 개입은 회화에서 '작가 주체의 개입'이라는 문제를 또렷하게 강조해낸다.

박미나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반면 「색상의 명칭들Names of Colors」은 미국의 인테리어 자재 샵에서 나눠주는 레디메이드 페인트의 컬러 칩을 수집한 것으로, 색상의 명칭과 색의 종류 별 분류가 지닌 흥미로운 사회적 서사의 측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모든 종류의 컬러 칩을 수집하고, 그것을 색의 종류별로 분류하여 정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언제나 분류가 모호한 색상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흰색이라기엔 지나치게 노랗고, 노랗다고 치기엔 지나치게 흰 색상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각 색상들은 묘한 사회적 통념에 따라 묘한 이름들을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아일랜드의 행운Irish Luck', '미술관 수준Museum Quality', '시골 난로의 흰색Country Stove White', '테니스 코트의 흰색Tennis Court White' 따위가 그렇다. 사실 컬러 칩들을 보면 작명 방식에 별로 수긍이 가질 않는다. 작가는 최소화된 작업 행위를 통해 최적의 결과를 뽑아낸다. 에너지의 효율적 관리가 돋보이는 작업이다.

박미나_I-95_종이에 유채_각 45×29cm×10_1996

이러한 작업의 태도는 지난 전시인 『미나와 44』전에서 선보였던 "오렌지 페인팅"에서도 잘 드러난 바 있다. "오렌지 페인팅"은 그룹전을 기획하고 있던 어느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작가에게 급히 오렌지 톤의 그림이 있냐고 전화문의한 데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당시 작가에게 오렌지 톤의 그림이 한 점 있기는 했지만, 사이즈나 색상이나 모두 걸맞지 않아 결국 작가의 그림은 전시되지 못했다. 이후 작가는 어떤 조건에도 부응할 수 있는 오렌지 톤의 만능 작업을 만들기 위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오렌지 컬러의 물감을 구매했다. 물감의 이름에 '오렌지'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면 모두 구매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막상 집에 와보니 '오렌지'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물감들(버밀리언과 오리엔트 옐로)도 실수로 구매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물감들은 기각되었다. 작가는 그 물감들을 모두 사용해 높이 3cm의 색띠를 이루는 오렌지 종합 페인팅을 제작했다. 사이즈는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이지만, 일단 시제품(?)은 강남의 표준적 아파트 거실에 걸면 어울릴만한 사이즈로 제작했다. 이 작업은 특정 큐레이터를 비난하거나, 강남의 그림구매 패턴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오렌지 톤의 그림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적용 가능한 만능 작품을 만들려한 것도 아니다. 그저 덤덤히 그 사회적 서사들을 추려 한 점의 회화를 제작했을 뿐이다. 가치판단과 해석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 될 뿐이다. 흥미롭게도 오렌지란 단어를 포함하는 물감 가운데에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진한 밤색도 있다. 언제나 언어는 변화하는 실존의 표면을 미끄러져 내린다.

박미나_Providence_종이에 유채_각 45×29cm×10_1996

전시에 대해 ● 박미나는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고, 또 작가와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작업은 최종 결과물의 색상이 만화적이라는 이유로 이동기의 아토마우스 그림과 나란히 걸리거나, 혹은 만화를 차용한 팝아트로 오해되는 일이 잦았다. 작업 논리에 주목하지 않은 일부 큐레이터들의 안일한 전시기획이 낳은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박미나의 작업논리를 정연하게 정리해 그 시작과 성장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작가에겐 앞으로 작업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 하나의 기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미술계에겐 보기 드물게 실험적 작업을 진행해내고 있는 작가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다섯 작업들은 모두 공통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연작들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5=1'은 하나의 실험으로서의 다섯 가지 연작이라는 뜻이다. 전시될 작업들의 구체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 하늘_Sky_종이에 유채_각 45×29cm×30_1996 / 섭리_Providence__종이에 유채_각 45×29cm×7_1996 / I-95_종이에 유채_각 45×29cm×10_1996 / 색상의 명칭들_Names of Colors_종이에 유채_각 30×21cm×20_1997 / 드로잉 연작_Drawings_혼합재료_각 28×19cm_1997~2003 ● 작가는 이번 개인전이 자신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전시 장소의 물색과 선정에 많은 고민을 했다. 갤러리 빔은 박미나씨의 리서치 베이스 작업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구조를 지닌 소형 갤러리다. 작가가 이번 전시를 보다 그럴듯한 '전시장'이 아니라 '갤러리 빔'에서 열기로 결정한 것은 적절한 결정이었다고 믿는다. 소형 작업들의 도큐멘테이션에 적절한 공간과 그 공간이 이루어내는 관람 동선은 적이 매력적이다. 나는 이 전시에 많은 사람들이 들기는 기대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소위 '눈높이' 전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박미나의 개인전은 회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사람들과 당대 예술의 외연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 전시다. 따라서 나는 한명의 관람객으로서, 이 전시를 눈 밝은 감식가들이 많이 찾아주길, 그리고 그들과 '많은 대화'가 아니라 '적절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미술 및 디자인의 비평가로 일해 온 나는, 소위 '커리어를 관리하는 작가'들의 요란한 홍보성 전시와 엉터리 '대안 미술'에 신물이 난다. 미술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당대 예술의 최전선에서 지금 막 수행된 실험을 보여주는 전시가 보고 싶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에게 이 전시를 강력히 추천한다. ■ 이정우

박미나_Names of Colors_종이에 유채_각 30×21cm×20_1997

상상하고, 특정한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일은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한다. 예술은 의식과 감감각의 의미를 형성하고 그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에서 신을 찾아 나아가는 일과 같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고 묘사하는 일이 환영처럼 인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러한 일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생각해내는 일은, 신념처럼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게르하드 리히터) ● 나의 작업은 생각의 패턴과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결합하고 조립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들은 직접 찍은 사진들, 광고, 아이들의 색칠공부, 만화, 기계의 작동 설명서, 게임 매뉴얼과 문화?정보지들에서 시작된다. 나는 각 요소들을 해체하고, 서로 다른 것들과 재결합시켜 작업의 원료로 삼는다. 따라서 나의 작업은 경계, 가장자리, 차이, 이동, 변화, 변형, 혼합 따위의 낱말 사이에서 순회한다. ● 회화는 시각 언어를 통해 관객과 교류한다. 나의 언어는 색상, 숫자와 문자, 기본 도형과 문화적인 부호와 기호들이다. 내가 회화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은 과학의 프로세스와 흡사하다. 예를 들어보자. 아이들에게 숫자와 언어를 가르치는 색칠공부를 보면,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아이들에게 수리와 언어의 기본 개념들을 가르치는데, 나는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한 뒤, 그에 다른 의미를 덧붙이고, 이리저리 바꾸어본다. 색칠공부를 통한 개념습득의 인습적 측면을 따져보려는 것이다. ● 기호론과 과학의 이론, 특히 정보의 원리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의 다원론을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 케서린 헤일즈의 책, "How We Became Post-Human(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은 세논과 와이너가 설명하는 '의미를 지니지 않은 정보'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은 정보는 의미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며, 다만 선택권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미 라깡이 설명했듯이,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는 일대일로 고정된 의미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표들은 독립된 개별 단위에 짝 지워진 것이 아니라 유연한 사슬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과 재건의 작업은, '정보는 패턴이며, 정보가 없다는 것은,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모든 정보의 조합들은 불규칙 하다는 점을 가시화한다. 따라서 내 작업에서 '정보'들은, 여러 기호와 구호의 새로운 조합으로 변화.변형.혼합되어 새로운 패턴이 되고, '의미'들은 새로운 이야기와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 박미나

Vol.20030710b | 박미나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