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625_수요일_06:00pm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해에게로 가는 길 ● 사람들은 하찮은 사물에서 우주의 모습을 그려 보이기도 한다. 하찮은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고 생의 진실을, 삶의 진정성을 꿈꾸기도 한다. 늘 대하는 일상 풍경이고 별 의미 없이 마주하는 풍경이지만 그러나 한 순간 그 풍경이 삶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의미의 풍경을 꿈꾸기도 한다. ●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 자핑아오(買平凹)의 산문집 『흑백을 추억하다』를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때면 몇 줄이라도 읽곤 한다. 볼륨이 두텁지 않는데도 일부러 단번에 읽지 않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는 책이다. 그 이유를 대자면 아무래도 책의 향기 때문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책제목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저 몇 줄을 읽었는데도 마치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겨우 한 장을 넘겼는데도 마치 오랜 시간 책에 푹빠져 있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내용이 철학적이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사소한 줄거리를 풀어 가는 가벼운 산문집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책이 그려내는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는, 결코 사소하거나 가벼울 수 없는, 굵은 오랏줄과 같은 든실한 의미망을 치고 있다. 책의 서평이 말하듯이, 책은 태산의 무게로 다가올 수 있는 성찰의 풍경을 그려주기 때문에 단 번에 읽겠다는 생각보다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주 묘한 산문집이다. 책에는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참 많은데 제목이 「해에게 가는 길」이라는 아주 짧은 내용의 글이 김중태 사진과 잘 어울린다. ● "우리는 깜짝 놀랐다. 자라나는 모든 나무와 물이 바로 해님한테 가는 하나의 길이었구나. 해님한테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세상 어디에나 있었구나!" ● '자라나는 모든 것은 해님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것이 곧장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듬직한 나무가 아니라 수많은 방향 착오를 겪고, 얽히고 설키면서 나아가다가 결국 고사하고 마는 담쟁이 넝쿨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담쟁이 넝쿨을 인간의 삶으로 환유해 보았던 것이다. 관엽식물 중에는 곧게 자라 멋들어지게 해를 향해 솟구치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온갖 비바람에, 장애물에, 상처에, 시름을 겪으면서 해를 향해 기어오르는 식물이 있고, 또 그저 해에 다다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오직 해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담쟁이 넝쿨은 해를 향하면서도 해를 보지 못하고, 해를 향해 피면서도 결국 해로 인해 말라서 죽는 관엽 식물이다. 해를 향하면서도 영원히 해를 볼 수 없다는 사실, 해에 의해 피어나서면서도 해에 의해 몸이 말라죽는다는 점에서 담쟁이 넝쿨은 인간의 삶의 숙명성과 유사한 면이 있다. 중국의 소설가 자핑아오(買平凹)가 「해에게 가는 길」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하찮은 사물을 통해서 "자아와 세계를 관조하는"데 있었고, 막막한 시간의 절망을 견디며 힘겹게 살아온 생의 진정성을 말하기 위함이었지만 알고 보면 혹독한 삶으로부터 피어나는 하찮은 것들의 고독한 자취이며, 이것들을 통해서 깨닫는 거대한 우주의 섭리와 초자연적 숨결의 감식이 아닌가 한다. 책의 제목 『흑백을 추억하다』는 따라서 과거의 회상이나 지난 시간의 회한도 아니라 자연을 보는 따뜻한 눈길과, 비록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우주의 거대한 의미덩어리를 말하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 김중태의 사진 「마주보기」는 담쟁이 넝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마주보기"란 담쟁이와 넝쿨의 마주봄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것들만의 마주봄이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과 자연의 마주봄이며, 과거와 현재,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마주봄이며, 과거와 현재의 마주봄이다. 자핑아오(買平凹)가 생의 이중성을 "흑백을 추억하다"로 함축했던 것처럼 김중태의 "마주보기" 또한 흑백으로 구분되어지는 우리 삶의 모든 변증법적 이중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 이중성을 추억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마주보는 것들에 대한 마주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중태의 마주보기는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주봄이 대상들의 물리적인 마주봄이면서도, 동시에 삶의 이중성을 상징하는 변증법적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어제와 오늘이라는 이항대립적인 우주관과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재미있는 전시 제목이다.
김중태의 사진은 작품으로서도 그것들을 보여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화석처럼 굳어진 면벽(面壁)의 담쟁이 넝쿨이 해를 향했으나 해로부터 버림받은 모습이고, 해를 향했다가 해로부터 말라죽은 형상이고, 해를 좇았다가 해로부터 버림받은 형상이고, 그렇지만 또 다시 해를 향해야 하는 비운의 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주보기"란 그저 넝쿨이 담쟁이와 마주보기가 아니라 삶의 이쪽과 저쪽을 횡단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묻거나 살려고 발버둥친 혹독한 생명력의 흔적이기도 하다. 사진 속의 오브제들은 매우 정갈하고 담백하게, 마치 수묵화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고즈넉함이 있다. 시형상(視形象)들은 어떤 것은 한 줄로, 어떤 것은 여러 줄로, 또 어떤 것은 구상적인, 또 어떤 것은 매우 서구적인, 예를 들면 잭슨 폴록의 올오버 페인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김중태의 "마주보기"는 그렇지만 매우 사진적이며, 아주 사진적인 물리적인 프레임 워크를 보여준다. 형상은 추상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짜여진 틀은 정교한 사진적인 틀을 유지한다. 그리고 여기에 탄탄한 조형성, 무게감 있는 화면 분할은 사진적인 안정감과 튼튼한 기본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사진은 조형에 따라, 그리고 시선과 인식에 따라 물리적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심리적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태어난 담쟁이 넝쿨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서 제 생김대로의 생명의 모습을 보이고 또한 그들 스스로 지나쳐온 삶의 자취를 고스란히, 그러나 매우 담백하게 현재까지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이 또한 작가와 피사체 간의 진지한 관조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정갈한 톤과 차분한 음색이 오랫동안 사진을 해왔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김중태의 사진이 자핑아오 산문 「해에게 가는 길」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까? 그의 "마주보기"가 해를 향한 담쟁이 넝쿨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오직 담쟁이 넝쿨만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함의하고 있는가? 이것이 궁금하다. 그런데 작가 김중태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사진은 해를 향했던 담쟁이의 족적들을 추적하고 있으며, 또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 담쟁이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벽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들은 애초부터 의식적으로 벽을 프레임했던 것에서 알 수 있고, 벽을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하나의 사진적 프레임으로 인식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때문에 "마주보기"는 담벼락과 넝쿨과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말하게 한다. 여기서 우연이란 서로의 만남을 이룬 구상적인 모습이며, 필연성이란 둘이 만나 서로가 알 수 없는 시간의 형상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매우 은유적으로 그것들에 대해서 말한다. ● 김중태의 사진은 그래서 넝쿨뿐만 아니라 벽 또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물성들이 맞부딪치고 변형되는 생의 공간을 연출한다. 넝쿨 못지 않게 벽의 대한 존재 의미가 여기서 비롯된다. "담쟁이+넝쿨=담쟁이 넝쿨"은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것, 그리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존재성을 보여준다. 담쟁이와 담쟁이 넝쿨이 보여주는 "해에게 가는 길"은 하찮은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알아가는 삶에 대한 인식공간이면서 동시에 예술로 형상화되는 표현의 공간이기도 하다. 김중태는 바로 그곳에서 유동하는 시간의 흐름, 사유의 형상을 보았던 것이다. ■ 진동선
작업후기-마주보기가 그리운 그대에게 ● 더위가 시작되는 시기에 자네가 담쟁이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촬영한 것들로 첫 사진전을 연다는 소식을 바람처럼 접했다네. 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갖는 사진전 진심으로 축하하네. ● 언제나 꿈을 꾸듯 이리저리 담쟁이 넝쿨들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살아감을 바라보며,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게 살고픈 꿈을 꾸는 것 같네. ● 그들이 서로 살을 부비고 섞는 진한 감동들을 숨기며 살아가는 소리들을 자네는 들었는가? 서로 만나고 헤어짐을 수 없이 반복하며 그려 가는 그들의 삶들이 기쁨의 환호로, 때로는 아픔으로, 어쩌다는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으로 다가와 그대의 삶을 슬프게도 했겠지. 살아감의 어우러지는 삶의 웃음소리들이 묵묵히 묻어나고 있음을 자넨 아는가? 그들의 환호와 그들의 아픔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옴을 자넨 얼마나 마주보기 했는가? ●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삶을 순리대로 풀며 살아가라는 삶의 조언자로 그대에게 다가선 담쟁이들의 살아감이 자네에게 어찌 그리도 아픈 마주보기로 다가왔는가? 여보게 친구…. 그리움이 있어 만남의 기쁨이 있고, 외로움이 있어 함께 하는 아늑함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꺾이고 채이는 아픔이 있어 안으로 안으로 끌어안은 포근함을 간직한 마주보기가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인가 문득, 그 그리움들의 마주보기가 자신이 붙어살며 공존하길 원했든 그 벽들을 뒤덮어 저 혼자 다 독차지하려는 욕심장이로 변한 것을 보게도 될 걸세….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 찬 아귀처럼 한없는 포식 성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말일세. 더구나 그들이 공존하는 곳은 이쪽과 저쪽, 안과 밖으로 구별하는 벽에 마치 외줄 타기처럼 서럽게 서럽게 붙어 있음을 그대는 아는가? 더구나 마주보며 함께 살자고 해놓곤 어느 날인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싹뚝! 제거해 버리는 비정함을 저들은 알까? ● 누군가 곧은 삶은 외로운 거라고,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곧은 삶일수록 더불어 마주보기 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부대끼며 빚어내는 웃음소리들이 그렇게 풀어내지 못해 쌓여 가는 그리움처럼, 세월의 상처를 안고 허물어지듯 지친 담장을 타고 넘나들며, 길동무가 되어주는 공존하는 삶이 필요한 거라고 무언의 압력을 주는 것은 아닐까? ● 자네의 담쟁이 애찬에 나도 모르게 그만 담쟁이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에 눈길을 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네. "에너지가 있는 이세상의 모든 생명체(사물)는 근본적으로 추상이다. 그들은 무(無)구속적이고, 탈(脫) 중심적이다. 그것은 개연성이 없이 우연히, 형식없이 작동하는 순수한 자율성이다." (진동선-한 장의 사진미학 113쪽) 비평가가 이야기하는 들뢰즈의 추상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네가 마주보며 살아가려는 삶이 추상으로 보이는 내 눈을 어찌 탓하겠는가?
사오 년 전에 작업한 것들을 이제 사 들고 나오는 자네 심정 이해하네. 아직 마주보기를 다 못 했다고…. 꼭꼭 쌓아두었든 필름들을 꺼낸 자넨 이렇게 말했지…. 담쟁이들이 벽에 붙어 마주보기하며 살듯 예전에 느낀 감정들을 다시금 마주보기 하겠다고…. ● "내 안에 가득한 그리움을 한 움큼씩 떼어 내어 쌓아둘 수 있는 창고가 있었음 좋겠다"가 어느 해인가? 자네의 화두라 했었지? 그 그리움의 마주보기를 전시장에서 느껴보겠다고? 부럽기만 한 친구여! 내내 건강하시게. ■ 김중태
Vol.20030625b | 김중태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