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30601b | 유휴열展으로 갑니다.
2003_0620 ▶ 2003_0626
전북예술회관 Tel. 063_284_4445
2003_0620 ▶ 2003_0704
얼화랑 Tel. 063_285_0323
Ⅰ. 유휴열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작가, 활화산처럼 뜨거운 정열의 작가로 부른다. 특별히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않는 소박한 천성의 그에게는 문인을 비롯하여 소리패, 풍물패, 춤패 등 다방면의 예인들이 많이 모여드는데, 그의 예술의 형성은 일정 부분 이러한 친교에 빚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화에서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각에까지 표현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유휴열의 창작행위는 이러한 친교의 산물이자 그 총화이다. ● 그의 작품들이 발산하는 무속적인 내음, 그 스산한 듯 하면서 폭발적인 원색의 파열음은 천상 예인으로서의 그의 유전인자로부터 나온다. 이미 오래 전에 전북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에 창작의 둥지를 튼 그는 모악산에서 흘러나오는 무속의 정기를 마시며 오늘도 창작의 삼매경에 빠져 있다. ● 모악산이란 어떤 곳인가. 이 인근은 한때 충남 공주의 신도안에 버금갈 정도로 무속신앙이 번성했던 곳이 아닌가.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오방색은 모악산 주변에 산재해 있던 서낭당과 당집에 걸려있던 울긋불긋한 헝겊들, 또는 그가 자주 접했던 상여나 절집의 단청에서 연유한다. 그는 일찍부터 이 일대를 자주 왕래하면서 이러한 시각적 잔치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예술에 스며있는 문화적 원형성은 토착신앙으로서의 무속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소리가락이다. 슬픔, 기쁨, 한, 흥이 어우러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발산이 그의 창작의 기저를 이룬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삶에 대한 진한 파토스를 드러낸다. ● 유휴열의 삶의 역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풍물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한때 '갱지갱'이란 농악패의 일원이 되어 직접 풍물을 쳐본 경험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엿보이는 가락의 요소, 선의 흐름의 완급과 정지, 즉흥성은 이때 자연스럽게 몸에 밴 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생래적(生來的)인 것일 수도 있다. 몸에 익어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좌도농악이 지니고 있는 유전자적 요인이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된 것이라는 해석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986년 아르꼬스모 미술관의 개인전을 비롯하여 1991년의 금호미술관 개인전, 1993년 공평아트센터 개인전에 출품됐던 작품들의 명제가 한결같이 「생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흥'의 요소와'놀이'적 성격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삶과 죽음, 놀이와 같은 문화적 원형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휴열의 작품세계는 그러한 까닭으로 해서 원초적 생명력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생명력의 심층에는 강한 토착적 민중성이 자리잡고 있다. 좌도농악이 보여주는 흐드러진 가락과 오방색에 기원을 두고 있는 색채는 유휴열의 예술세계를 관류하는 양대 요소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서 숱한 변형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Ⅱ. 이 두 요소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은 1991년 무렵의 「生놀이佛」 연작이다. 이 연작은 금호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발표된 바 있다. 농경사회의 놀이에 기저를 두고있는 가락과 무속신앙에 기원을 둔 오방색은 80년대 초반이후 유휴열 작업의 근본을 이루는 화두였지만, 대작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개진된 것은 1986년 아르꼬스모 미술관의 개인전 이후 오년 만에 가졌던 이 전시회에서였던 것이다. 지금은 면 중심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있지만, 이 무렵만 해도 유휴열은 선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1천 호에 가까운 대형캔버스에 전면적(all over)으로 펼쳐진 춤추는 사람들의 배치는 춤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의 환희를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붉은 황토색 바탕에 그려진 등장인물들은 좌도농악이 보여주는 유장한 가락의 선묘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는 진양조에서 시작하여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진행되면서 흥의 엑스터시를 보여주는 우리네 전통 산조 가락의 리듬감이 호흡이 긴 선묘를 통해 체화돼 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을 묘사한 이 작품(「生·놀이」181.8×454.6cm)은 역시 춤추는 사람들을 다룬 근작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1991년 무렵, 유휴열은 비단 춤추는 사람뿐만 아니라 영기(靈氣)를 지닌 산, 동물, 숲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병행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삼라만상이 모두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때 입체와 콜라주를 병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도는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전통 필법에 뿌리를 둔 즉발적이고 거친 운필과 토속적인 색채와의 결합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그의 고뇌를 보여준다. 유휴열은 1982년과 1984년 각각 1년 간씩 파리와 뉴욕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때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서 얻은 견문과 경험이 작업의 방향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근작에서 보여지는 유휴열 회화의 세련성은 자신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볼 수 있었던 이 무렵의 해외미술에 대한 체험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
Ⅲ. 내게 있어서 최근(2003년 5월)에 열린 갤러리 편도나무에서의 유휴열 회화전은 감동을 안겨준 전시회였다. 대작은 아니지만, 이번 출품작들은 그가 이제까지 보여준 그 어느 대작들보다 더욱 짜임새가 있으며 세련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의 새로운 지평을 분명히 제시해주고 있는 듯 했다. 끓어오르기만 했던 이제까지의 열정과 의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조형의 문제를 치열한 의식을 통해 풀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어나푸돗던고」 연작은 종전의 대작들이 지니고 있었던 격정과 그로 인한 표현의 과잉이 사라지면서 대상의 추상화(抽象化)에 필연적으로 도출되기 마련인 형태와 공간 구성상의 조율 문제에 제작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점은 그가 춤을 주제로 한 인체조각에 손을 댄 이후 두드러진 것인데, 회화와 조각은 상호 영향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면서 조각에 있어서는 회화적 표현이, 회화에 있어서는 대상을 사각의 면으로 파악하는 조각적 관점이 교차되게 된다. 또한 색채의 변화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우선 두드러진 것은 화려한 원색의 퇴조이다. 오방색에 뿌리를 둔 화려한 원색이 사라지면서 화면의 바탕은 회색이나 검정 등의 중성색과 옅은 청색이나 녹색, 황토색 등으로 채색된다. 채색은 붓질보다는 페인팅 나이프에 의해 캔버스 바탕을 말끔히 다지는 기법에 의존하고 있다. 그림이 속도감과 함께 경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이프에 의해 반질거리는 캔버스 표면의 질감과 차분히 가라앉은 중성색조에 기인한다. 이는 특히 흰색과 회색, 검정색 등 무채색으로 그린 「추어나푸돗던고」 연작의 특질을 이룬다. 「추어나푸돗던고」 연작은 대상(인물)을 해체하여 사각의 단위로 환원하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 까닭에 작품은 더욱 추상적으로 보이며 평면적인 느낌이 이전의 작품들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된다.
유휴열이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잃어버린 시간」91×117cm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의 이번 개인전에 대한 나의 감동의 대부분은 이 작품에 기인하는데, 이 작품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회화적 관점이 이동하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망가진 검정색 우산을 그린 것이다. 누가 쓰다 버린 것 같은, 아니면 세찬 비바람 때문에 방금 누군가의 손을 벗어나 아스팔트길의 한 복판에 거꾸로 처박힌 것 같은 이 우산 그림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사물의 도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등이 약간 휜 듯한 손잡이가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조금 전에 비를 가렸을 성싶은 검정색 천은 군데군데 찢겨져 있다. 아니다. 어쩌면 원래의 손잡이나 천은 온전한 것인데, 작가의 표현이 이처럼 거칠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은, 이 그림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말인가.
우선 그림을 좀더 꼼꼼히 살펴보자.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에 그려진 우산의 위치이다. 우산은 그림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의 중앙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정 중앙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좌우의 폭도 캔버스의 가장자리로부터 비슷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서 균형 잡힌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림 속의 우산은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견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당혹시킨다. 차분히 가라앉은 청회색조 바탕에 검정색의 격렬한 터치와 이로 인해 어지럽게 튀고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은 찢겨진 우산의 거친 이미지를 한결 강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그린 우산보다 더 우산다움, 즉 우산의 존재성과 사물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그림에 있어서 두드러진 것은 사물의 존재이다. 작가의 세련된 미감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다시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진리의 비은폐성'을 보여준다. 검정색 우산을 그린 이 그림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은 이미지의 현전이다. 쓰다버린 듯한, 낡고 형해화된 우산이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우산을 접하고 있지만, 그 이미지는 우산의 사물성과 도구성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과거의 한 시점에 대한 기억과 회상이 이 우산을 매개로 재생된다. 유휴열의 이 그림은 우산의 이미지를 통해 도구성과 관련된 사물의 존재 양태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유휴열은 이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의식의 선회를 기도하고 있다. 놀이에서 사물로, 특수에서 보편으로, 원초적 생명성에서 존재와 이미지의 현상학에로 의식의 지평을 전환시켜 가고 있다. 그 그칠 줄 모르는 정신적 방랑의 끝은 과연 어디쯤인가. ■ 윤진섭
Vol.20030622b | 유휴열 회화.설치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