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604_수요일_06:00pm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별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종로구 도렴동 83번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내 Tel. 02_399_1776
털과 터치 ● 작가는 한 화면 가득히 털로 채워 관람자가 작품에 다가가 마음대로 만질 수 있게 한다. 손가락으로 이리 저리 만져서 만들어내는 공간은 화면의 물결이나 손가락 자국을 남겨 또 다른 회화적인 다양한 변조를 만들어낸다. 이 때 만짐은 "인간의 첫째 감각"인 것처럼 가장 원초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 라벨은 터치에 대해서, 시각에 존재하지 않는 육체적인 감성(emotivit)이 있는 삶의 성격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감성에 기초되어 관람자에게 '보여주는 작품'에서의 터치는 시각의 세계에 촉각적 세계를 혼합하는 것이며, 이질적인 두 지각 세계를 종합하는 것이다. ● 그의 작품에서 관람자에게 제시하는 이 놀이는 시각적인 경험과는 달리, 더욱 신체적인 감각에 직접 연관되어 세계인식에 있어서 가까움과 친밀성으로 가능하게 된다. 이 친밀성은 Condiallac 의 지적대로 '만짐'에 의해서, 시각이나 후각 등 다양한 지각들을 의미화시킨다. 이 만짐의 공간은 우선 다양한 지각들을 제시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이 만짐은 다양한 지각들의 의미를 보완하는 과정이며, 다르게 보면, "즐겁게 하다"라는 뜻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쾌락의 움직임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열정에 대한 호소이다. 그것은 일종의 수사적으로 살아있는 부분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다른 change의 시리즈들에서는 털로 덮힌 평면 위에 '개'의 외곽선을 그려놓은 부분과 컴퓨터로 출력된 이미지로 형성된 부분으로 나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만짐과 보는 것의 두 다른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보다 원초적인 감각과 시각의 병치, 개와 인간의 분열 등으로 구성되어, 더욱 다양한 세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공간은 작가가 말하듯, 에로틱한 공간으로서 원초적인 욕망이 혼합되고 형상화된다. ● 그의 자화상에서는 털의 처리는 대상의 질감에 따라 재현적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인물의 특성을 잘 잡아서 표현하나, 얼굴 부분은 비워놓는다. 이 부분은 얼굴이면서도 동시에 관객이 만지게 열어놓는 빈 공간의 놀이터이다.
Change 07-09 도 털 작업을 한 것으로서, 털을 해치며 피부를 들이다 보는 행위와도 같다. 달리 보면 이는 상처와 유사하기도 하며, 양손의 힘을 주며 살을 벌리는 원초적인 행위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털 사이로 내면의 피부를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뒤지는 인위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또 다른 측면에서 갈라진 털의 의미와도 함께 긴장의 자석과 힘의 관계로서 자석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의 자석을 사용한 작품, art tree 시리즈들도 손의 긴장과 자취로 형상화시키는 특성처럼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다르게 보면, 힘의 긴장으로 운동이 정지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 그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긴장성, 즉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제시하는 것이며, 이 둘 사이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석과 털을 움직여가면서, 가만히 정지해 있는 성격은 결국 아주 작게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다르게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움직임은 자기 부정적인 양태로서의 정지된 회화-조각이면서도 최소한의 키네틱 예술이라는데 더욱 재미를 갖는다. 그래서, 그의 change 라는 주제는 '움직임과 부동성'이라는 개념과 함께 더욱 복합적인 상상을 하게 한다. 즉 움직이지 않은 것 속에서 움직임이 있는 동양적인 반전 구조와 부정 사상이 들어 있다. 이러한 작은 움직임의 가능성은 "움직임"과 "변화"(change)이며, 가능성을 실현하는(actualisation d'une possibilit) 것이다.
어찌 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주제는 움직임이 살아있는 형태로서 존재하려는 것과도 같다. "actus entis in potentia prout in potentia"라고 데까르트는 이야기한다. 즉, 가능태로서의 가능한 한 존재의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와 변화라는 측면에서, 질송의 설명을 참고하자. 보통 완벽함과 완성됨이라 함은 움직임을 갖지 않은 것이나, 만약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안정한 것으로서 무엇인가를 실현하려는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삶을 영위하는 존재는 바로 후자이며, 그래서 움직임과 변화를 갖는 것이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는 형태들을 마주 다 채우지 않고 화면의 부분 부분을 내버려둠으로써, 빈 공간과 여지를 제공하고, 관람자에 의한 행위에 따른 변화를 취한다. 이 행위는 다른 관람자에 의해서 새롭게 반복되며, 변화된 화면을 갖게 한다. 이러한 변화의 연속은 끊임없는 否定의 不定性이다. 이 때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작품은 더욱 복합적인 개념적이고 빈 공간을 산출해내고 있다.
이는 곧 삶(존재)의 이야기이며, 쾌락과 생산의 공간이다. 때로는 이 아트 트리라는 작품에서는 나무이면서도 세워진 수직적인 모티브라는 성격 때문에, 정신분석적인 남성 상징물로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면 가득히 채워진 공간은 이에 대치되는 음의 공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체계는 동양적, 서양적인 생각이 혼합된 또 다른 복합적인 개념적 체계를 갖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앞서 이야기한 '만짐'으로서, 실제적인 대상의 의미이며, 가촉적인(tactile한) 감성의 공간이며, 활동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피부와 털, 살을 은유하는 삶을 제시한다. ■ 강태성
Vol.20030608b | 곽철종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