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아티누스 홈페이지로 갑니다.
개막행사_2003_0523_금요일_06:00pm
책임기획_이대형
대북공연_박미르_서승희 무용공연_이순_이지언 마임공연_강정균 퍼포먼스_김백기
갤러리 아티누스 서울 마포구 서교동 364-26번지 Tel. 02_326_2326
욕망을 통합시키는 힘으로서 디자인에 대해 ● 사람은, 제 스스로에게도 막연하지만, 기다림을 가지고 산다. 그 기다림을 우리는 수많은 언어와 개념으로 제 각기 달리 부른다. 기다림을 우리는 즐겨 희망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이 말 안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기다림을 짧게나마 사랑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끝내 자신에게 도달하지 않을 기다림의 안팎을 제 자신이 먼저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희망(사랑)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최악의 재앙이다. 사람에게 있어 희망(사랑)은 끝내 고통을 연장하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의 긴장 사이에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고통을 감수하도록 작위적인 위안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제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고통을 전제하는 무의미한 생산에 사회적 의미를 붙여가는 과정에 편입한다. 아주 당당하게. 예술 또는 예술적 행위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 시작하는 편이 옳다. ● 디자인은, 섣부르게 결론짓자면, 욕망하는 모든 '애씀'을 통합시키는 힘이다. 이런 디자인의 특성은 자기세계만을 고집해도 무방한 여타의 예술장르와 확연한 경계선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의 작업은 자신의 세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타자의 생각과 희망을 녹여내는 일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특징이 있다. 대체로 타자의 생각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디자인을 디자인답게 만드는 절대 요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여러 욕망의 결합적 요소들은 디자인작업을 구성하는 수평적 제 요소 중 하나일 뿐 디자인의 특질을 대표하는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당연히 디자인의 결과는 디자이너의 개인적 산물임에 분명하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일반적 예술작업의 가치 평가와 동일한 방식으로 디자인 작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타자의 욕망을 결합시키거나 중개하는 따위의 방법을 통해 통합에 이르게 하는 디자인의 속성은 어디서 출발하는가 하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디자인은 사회적 의미망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의 개성과 창의성은 언제나 그 의미를 공유하려는 기본적인 공공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상업성으로 쉽게 치부하거나 장르적 갈래의 특성에 대해 독단적 판단을 우선해서는 곤란하다. 고강철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타자의 욕망을 통합시키려는 개인화된 욕망의 엇갈린 구조를 이해하는데서 출발하는 편이 좋다.
그의 작업들은 시각적인 효과 이전에 사회 그물망 안에서 디자인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데 더 치중되어 있다. ● 그의 작업들은 일정한 시기로부터 사물의 질감이 가지는 개성들을 통해 우회적인 말 걸기를 집요하게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개념적 존재감을 넘어가는, 현실적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데 성공적이다. ● 그의 작업들은 정연한 논리를 앞세우거나 거창한 이론을 통해서 사실감을 확인하기 이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그 와중에 순간 존재가 또렷해지는 기이한 사실적 상황들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성을 내세워 보인다. ● 위 세가지 고강철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색깔들은 바로 그의 디자이너로서 욕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고강철의 작업들을 보면 우선 그 형식적 파괴와 발상의 천연덕스러움에 대한 순간 놀라움이 첫 인상으로 자리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들이 가지는 이 시각적 효과에 열중한다면 그가 이 '놀라움'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 싫증을 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벼려내는 시각효과를 통해 보게 되는 사회 그물망의 '찢어짐 효과'는 그의 작업들을 풍부한 의미로 감싸게 만든다. 포스터의 순기능을 시대적 한계상황에서 재해석하는 작업들은(인형처럼 생긴 포스터, 겹 끼워 높이 조정이 되는 행사안내 포스터, 야외로 나가야 될 기능적 숙명에 착안한 포스터 등) 많은 디자이너들이 포스터가 가지는 생명력의 한계에 공감하는 그 측면을 사회적 징후에서 읽어내는 노작들이다. 쓰임새라는 절대적 욕망은 디자인을 거부하거나 더욱 밀착하게 만드는 사회적 그물이다. 그 쓰임새에 화장을 시키는 일이 마치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의 임계점이다. 이 한계의 선분 상에서 디자이너의 생각들은 움직임을 빠르게 가져가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우선 찢어 내는 일이다. 그 돌발적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그 출발점에서 고강철은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인 제안으로 바꾸어가면서 타자와 교감을 시도한다. 아직 우리는 고강철과 충분하고 확실한 교감을 가진 바 없다. 아마도 그의 제안방식에 비해 우리의 접근방식이 그물망 안에 잡혀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포스터는 포스터 아닌가? 왜 행사명이 작은 거야? 일시와 장소가 잘 안보이잖아! 라고 우리의 생각을 스스로 득달한다면 우리는 디자인을 포기하는 편이 좋다.)
사물의 질감을 날 것으로 보여줌으로써, 만지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들은 디자인의 개념적 존재감을 넘어 현실적 존재감으로 '그 곳에 있게' 한다.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손을 사용하여 우연성이 개입되고 의도한 바가 작은 생각의 떨림에 의해 바뀌어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유연한 사고의 흐름은 확실한 존재감이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의 작업들에서 이런 실험들은 우리가 디자인을 생각할 때 가지는 합목적성에 대한 희망을 고통으로 바뀌어 놓는다. 합목적성이란 사실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통용되는 사고의 질서다. 이 질서는 사실 그 뒤편에 있음직한 기득권에 대한 맹종과도 닮아있어 타자의 욕망을 한 자리에 모으는 디자인 작업에서는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작업방식이 되기도 한다. 이 역설적 어법은 모던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수행하였던 바우하우스 이후 가장 공격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술계 안에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탈정치적인 입장에서 포스트모던한 사유를 즐기는 편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치기와 취향을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포장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강철은 이 부유하는 디자인의 실체를 합리적이지 않는 과정을 통해 합목적성의 '가짜 사실'을 재료의 질감과 질감의 드러냄을 이끄는 수작업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강철의 이야기는 아직 공명을 얻지 못한다. 그가 선택한 이 방식은 아직 개인적인 교감에 멈춘 프로젝트 안에서만 기능했기 때문이다.(고강철이 이런 방식으로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할 때면 항상 그 과정의 지나친 예산처리와 비효율성 등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지적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바로 이런 작업에 기대감을 부풀리게 한다. 희망은 고통을 연장하는 수단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디자인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할 수 있다.)
고강철의 작업들을 이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수다를 떠는 와중에 순간 존재가 또렷해지는 기이한 사실적 상황들처럼 가능한 정연한 이론의 틀을 먼저 들이대지 않는 것이다. 몸의 경험에 대해 솔직할 수 있다면(결코 쉬운 방법은 아니다.) 그의 작업들은 풍부한 노가리로 무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천일야화를 통해 우리는 깊이와 너비를 분간하기 힘든 이슬람 세계를 엿볼 수 있듯이 자근거리는 다양한 관심을 쭉 늘어놓는 사유의 방사를 통사를 통해 그의 작업들이 거두어 낸 디자인적 성과를 이해하게 된다.
아마도 그는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도 않은 채 속박으로부터 제 의지로 해방을 꿈꾸기 때문일 텐데, 우리가 섣불리 니체가 설파하려던 '자유정신'으로 또 그를 속박하지 않는다면, 이 규정하기 힘든 그의 흔들림은 바로 모든 존재가 가지는 불안이기도 하다. 그는 그 불안을 작업 안에서 솔직하게 다루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수다를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해왔던 것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포와 의심, 선동적이고 의식적이며 의도된 방랑과 냉담, 소외와 환멸을 통해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은 꼭 고강철 자신이 그렇다는 점에서라기보다 그의 작업이 지닌 성질들 때문에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버린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실존하는 '사실적 상황'을 생활의 다분함 와중에서 찾아내는 일이다. 고강철의 작업은 이 쉼 없는 반복의 새롭고 기이한 또 다른 시작 앞에 서 있다.(디자인에 대해 궁극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치장기술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복의 생명력을 수다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들에게는 완고한 이론의 틀로 제압하는 편이 낫다.) ■ 이섭
Vol.20030531b | 고강철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