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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전력문화회관 1층 Tel. 02_2055_1192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홍지윤의 '새'는 여러모로 작가 개인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다. '새'는 젊은 작가를 막아서고 있는 모든 제약들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존재로, 혹은 그 의지로 상정된다. '새'는 회화적인 관습과 동양적인 사유체계 그리고 젊은 작가가 자본중의 사회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삶과 예술의 괴리 등, 예술가로써 추구해야 할 이상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일종의 장치로, 혹은 작가 자신으로 감정이 이입되어 있다. 홍지윤의 새는 홍지윤을 이루는 모든 주변환경을 날며, 나아가 그의 과거와 미래를 난다. 일종의 일인칭 시점의 전기적인 소설처럼 '새 혹은 그녀'가 나는 공간은 그녀가 살았던 삶이며 앞으로 살아갈 삶으로, 삶 자체를 아우르는 총체성의 구면에서 상정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새는 삶을 통괄하는, 한번에 구만리를 난다는 붕(鵬)이 된다. 작지만 큰 새가 그녀의 마음 속을 난다.
홍지윤의 특장(特長)은 어려서부터 체득된 자유로운 선묘와 그것에서 비롯된 감칠맛 나는 먹의 운용이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들은 가벼운 리듬과 율동적인 선묘 그리고 잘 번진 먹(水墨)의 투명성을 특징으로 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까지의 홍지윤의 그림은 위의 장점-내가 생각하기로는-을 두루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아마도, 그녀의 그림에는 좀더 진지하게 혹은 좀더 '현대미술답게' 하는 일종의 도그마(dogma, 獨斷)가 존재한 듯 싶다. ● 현대미술의 강령처럼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믿었던) 형식미의 추구와 물질 혹은 재료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사유로서의 서사성과 몸에 밴 자유로운 선묘 대신에 먹이 주는 '맛'과 그것으로 인해서 조성되는 화면에 천착하게 한 듯 보인다. 나는 그녀가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 형식이 형식 자체로 본래적인 의미가 되는 모더니즘의 강령과 수행은 기실, 일시적인 일이며 불행하게도 '본래적인' 일도 아니다. 형식은 그냥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그 자체가 내용이 될 수는 없다. '형식 자체가 내용'이라는 형식주의(formalism)의 강령은 일종의 엄숙주의이다. 그곳에는 기능과 공리가 배제되어 있다. ● 나는 그녀가 자유로운 선묘와 서사적인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가볍고 즐겁게 말을 걸었으면 한다. 유쾌하고 즐거운, 게다가 약간의 파격이 덧붙여진 말 걸기. ●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새는 현대미술의 강령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혹은 자유스럽고 싶은 그녀의 첫마디 정도로 생각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매우' 초보적인 애니메이션은, 그 효과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다. 식물성의 투명함과 색조를 배제한 그녀의 움직이는 그림은, 먹으로 그린 그림이 움직일 때 얼마나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지 혹은 우리의 정서에 호소하는지를 보여준다. 움직이는 그림의 관건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여러 가지 효과가 아니라 내용과 표현의 적합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예술에서, 아날로그적 기초(사유체계와 체화)가 디지털의 기술을 우선하는 주요요소라는 것을 그녀의 움직이는 그림은 보여준다. ● 그녀는 움직이는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그림이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의 문제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그림의 공리(公利)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는 듯하여 기뻤다. 그녀의 움직이는 그림의 배경들은 전시장에 걸리러 하나의 화면으로 순수형식적인 회화가 되며, 흡사 새가 지나가는 궤적이 그대로 붓질이 되어 만들어진 것처럼 움직이는 그림에서는 표현된다. 그녀의 움직이는 그림과 벽에 걸린 그림은 서로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상호보충적이며, 완성태로써 호환된다. ● 이러한 상호보충적 호환은, 관계설정에 있어서 자족적이며, 지가완성적인 순환구조를 가지게 되어 자체적으로 문맥(context)을 형성케 하여 보는 이는 이로 하여금 중간조정(mediation)의 처리과정을 거치게 하여 상호텍스트적(intertextual) 성격을 띠게 한다.
선묘, 리듬, 감수성, 경쾌함 같은 말들이 그녀에게 어울릴 것이란 생각을 문득 한 적이 있다. 홍지윤의 그림-그것이 움직이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을 보면 그림과 그녀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홍지윤이 만들어내는 화면은 탁월한 공간감을 특징으로 한다. 그 공간감은 먹의 탁월한 운용에 기인한 바 크지만, 정서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흡사, 대기처럼 보이는 그녀의 화면은 좋게 말하면 우수(憂愁)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고, 정확하게 말하면 공허함 같은 것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가 그 공허를 메우고 있지만 전체적인 음조는 여전히 단조이다. 아마도 현대화된 수묵이 가져야 한다고 어른들이 생각한 정신적인 기저를 고수하려는 태도와 그녀의 '고독'이 만들어낸 듯한 이러한 단조적 화면은 그녀가 체득한 자유로운 선묘나 서사적 창의력이 배제되어 있다. 가볍고 밝은 그리고 현대미술의 도그마에서 자유로운 화면을 만드는 것이 홍지윤의 기질에도 맞고,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새'가 기질에도 맞고, 잘 할 수도 있는 것을 하는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蛇足 ● 나는 그녀의 작업실에서 놀라운 드로잉들을 보았다. 재기 발랄한 상상력과 능숙한 솜씨로 그려진 그녀의 감성적인 드로잉들을 보면서, 간혹 적혀있는 감성적인 문구들을 보면서 그녀가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꼭 전시장에 걸리고, 팔리고, 이력으로 적히는 그런 그림들이 아닌 꼼지락 꼼지락 재미있고 유쾌한, 간혹은 심금을 울리는 그런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 ■ 김영민
Vol.20030526b | 홍지윤 수묵.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