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공간 반디 2003년 기획공모 당선展
대안공간 반디 부산시 수영구 광안2동 134-26번지 Tel. 051_756_3313
어린 시절을 남해의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테레비'라는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마을 몇 몇 집에 있었던 테레비와 전화기 신세를 지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서 외삼촌이 가지고 온 테레비는 마을에서 가장 큰 20인치 테레비었다. 눈높이를 맞춘 테레비 다리가 있고 양쪽에는 천과 나무로 잘 감싸진 스피커가 있고 전체적으로 나무 윤기가 흐르며 스피커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는 여닫이문도 있는 멋진 흑백 테레비였다. 테레비를 마음놓고 보는 것도 좋았지만 큰 테레비를 포장하고 온 두꺼운 종이 박스와 스티로폼은 몇 달을 심심하지 않게 가지고 놀 수 있었던 장난감이었다. 지금의 대형 냉장고 크기로 느껴졌던 두꺼운 종이 박스는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멋진 자동차였고 스티로폼은 내부를 구성하는 의자와 창틀 등이 되었다. 박스 안쪽에서 필통 크기 만 한 구멍을 뚫고 그 밑에는 운전대를 달았다. 편안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 컬러텔레비전이 나온 뒤 그 테레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컬러텔레비전을 감싸고 왔던 박스는 나의 관심을 사기 힘들 정도로 나의 키는 이미 박스보다 두 배는 되어 있었다. 또 다른 화려한 세상을 만난 것 같은 삼성 이코노 컬러텔레비전 앞에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오며 잠시 졸았다. 잠시가 아니었다. 눈을 떠보니 '괴정' 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문이 막 열리고 있어 급하게 내렸다. 우습게도 다음역이 괴정역이었다. 밖으로 나와 괴정역까지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었다. 동주대학을 지나고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누가 텔레비전을 길가에 버려 놓은 것이 보였다. 작업실에 TV가 필요했었는데 잘 됐다 생각하며 꽤 무거웠지만 들고 천천히 작업실 쪽으로 걸어갔다. 신호등을 지나서 조금 지나가다 뒤돌아보니 경찰과 젊은 청년이 급하게 이쪽으로 뛰어 오는 것이 아닌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가는데 경찰관의 손은 나의 어깨와 팔목을 잡았고 옆에 있던 청년은 상기된 얼굴로 이 사람이 재활용 센터 앞에 둔 TV를 훔치더니 뻔뻔스럽게 경찰서 앞을 지나 건널목을 지나가는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뭔 잘못이 있다는 건지 그 땐 술기운에 아무 생각 없었다. 오히려 우스웠다. 난 단지 조금 고장나고 오래 되면 버리는 흔하디 흔한 길가에 버려진 TV를 주워 고쳐 쓰겠다는 것뿐이었는데. 경찰서로 갈 때는 경찰관이 증거물이라 생각했었는지 직접 들고 가는 바람에 편하게 경찰서까지 갈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청년이 시끄럽게 설명하고 있었고 신분증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 난 몇 초 후 경관의 말은 참 신기했다. "깨끗하군." ● 경관이 바라보고 있던 컴퓨터 브라운관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나는 또 다른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고 있었다. ■ 정만영
Vol.20030523c | 정만영 설치.영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