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_Seed

이동재 개인展   2003_0521 ▶ 2003_0527

이동재_투명수지에 쌀_23×22.4×4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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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521_수요일_06;00pm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씨앗(seed), 재현하는/재현에 반하는 소립자 ● 동시대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중에서 단연 물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대량생산된 온갖 물건들이 욕망을 자극하고 소비를 종용하는 소위 구경거리의 사회야말로 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진풍경에 다름 아니다. 작가들은 이 차고 넘치는 물건들로부터 오브제를, 레디메이드를 발견한다. 이제 작가들은 예술적 상상력(다분히 신화화된)이란 삶의 변방에 숨는 대신, 온갖 물건들이 내재한 미학적 가능성에 눈을 돌린다. 예술은 이미 삶의 도처에 내장돼 있으며,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건들은 그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한 기능적인 산물 이상을 담당한다. 이제 작가를 자극하는 욕망과, 작가가 그 당위성을 찾는 리얼리티, 그리고 심지어 상상력의 계기마저 일상 속에 이미 내재돼 있는 것이다. 물건들이 이를 함축하고 있다. 물건이 갖는 이중성 곧 기능적인 속성과 함께 미학적인 성질을 대변해주는 소위 발견된 오브제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예술은 이 발견된 오브제를 매개로 하여 범속한 일상에 반응하고, 그로부터 공감할 수 있는 구실을 캐내는 일이 되었다. ● 이동재의 조각은 일상 속에 널려 있는 각종 물건들이 은폐하고 있는 미학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한낱 물건들이 발견된 오브제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건(일상 속에서 특정의 기능을 수행하는)과 사물(미학적으로 다루어도 될 만큼 충분히 중성화된)이 갖는 경계와 차이에 대한 인식이 선결되고 실천돼야 할 것이다. 즉 물건들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모든 결정적인 인식을 폐기하고, 대신 물건들의 성분을 다중적이고 중위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는 비결정적인 사물로 변질시키는 일이 요청된다. ● 작가는 이를 위해서 파라핀 왁스나 백(白)시멘트로 각종 병들을 떠내거나, 합판을 조합하여 테이블과 그 위에 놓여진 각종 기물들을 재현하거나 한다. 실물크기로 재현된 이 사물들이 원래의 물건들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시뮬라크르(simulacres, 모조)이다. 그러면서도 물건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특별한 오브제로 변질된 것이다. 한편으론 그 자체 양감과 질감 그리고 부피를 가진 물질(물체)이란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러니까 아무런 수식도 장식도 부가되지 않은 맨살을 드러낸 무표정한 사물들이 일종의 순수한 물질의 상태로 환원된 최소한의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일상으로부터 물건을 취하여 그 위상을 애매하고 다중적인 사물로 변질시킴으로써 물건과 사물과의, 일상적인 지평과 미학적인 지평과의 경계를 흔들어 놓는다.

이동재_캔버스에 콩과 팥_35×27cm×2_2003
이동재_투명수지에 콩과 팥_25×29.5×4.5cm_2003

이동재의 근작은 일상 속에 산재한 물건들 대신, 쌀을 소재로 취한다. 조금은 엉뚱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쌀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오브제란 점에서 발견된 오브제에 기초한 전작과 그다지 동떨어져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흔히 오브제나 레디메이드가 대량 생산된 그리고 대량 복제된 무기적 물건에 연유한 것임에 반해, 쌀은 그 자체 생명을 내장한 유기적 물건이란 점이 다르다. 나아가 쌀은 단순한 오브제 이상이다. 작가 또한 쌀에서 농촌의 현실을 상징하는 아이콘을 보기도 하지만, 쌀이 단순히 농민이라는 특정 계급의 정체성에 연유된 것일 수만은 없다. 조상들은 쌀을 하늘님(天主)으로, 그리고 그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인간 역시 하늘님으로 간주했으며, 그 이면에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포용하는 생명사상이 뿌리깊게 존재한다. 쌀은 이렇듯 인간의 본질(생명)에 연유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실에 그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종자전쟁이나 식량전쟁 같은 약간은 극화된 사안은 도외시하더라도 각종 유전자 변형 식품이 우리의 식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가 쌀을 소재로 선택한 것은 쌀이라는 소재적인 측면이 없지 않겠지만, 사실은 이와 같은 당대적 현실에서 발견해낸 가장 절실한 문제의식이야말로 시대적 리얼리티에 부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널리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동재_캔버스에 녹두_45.5×38cm_2003
이동재_캔버스에 검은쌀_65×53cm_2003

작가는 쌀(백미, 흑미)과 함께 콩, 팥, 녹두 등의 각종 잡곡을 소재로서 도입한다. 각 잡곡들은 그 크기나 색채가 달라서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다양한 표정(표면질감)을 연출해낼 수 있는 효과적인 소재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잡곡 한 톨은 마치 인상파의 터치처럼, 점묘파의 점처럼, 각종 인쇄매체의 망점처럼, 그리고 디지털 프로세스의 픽셀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조합해내는 소립자(원자, 모나드, 단자)이다. 이런 소립자야말로 모든 유물론적 본질론의 핵심임을 생각하면, 작가가 생각하는 사물의 본질(쌀 또는 잡곡으로 나타난)이란 근본적으로 생명사상에 깊이 연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런 각종 잡곡들을 동원한 작가의 근작은, 전작이 일종의 트릭을 통해 사물이 잠재하고 있는 다중성과 다의성을 열어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말의 개념적 유희에 천착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는 입체 구조물의 형식을 빌려서 모더니즘 조각과 이에 따른 사물의 변질(변형)된 위상을 묻고 있는 것에 반해, 근작에서는 평면 이미지를 통해 모더니즘 회화를 문제시한다는 점이 다르다. 예컨대 외관상 모더니즘 회화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그림(엄밀하게는 잡곡화라고 불러야겠지만, 편의상 그림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이 한눈에도 색면화파의 그림(캔버스의 평면과 여기에 부가된 최소한의 색면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는)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작가의 그림은 무미건조한 평면이 아닌 다양한 표면질감을 가진, 그 표정이 풍부한 화면이란 점에서, 더욱이 잡곡의 입자들로 재구성된 것이란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이를테면 작가의 개성 같은 것이다(색면화파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회화의 원리인 것이며, 그 과정에 작가의 개성은 끼여들 여지가 없다).

이동재_캔버스에 검은쌀_35×27cm×7_2003_부분

이런 색면 한가운데에 숫자가 기록된 일련의 작품은, 흑미로 재구성한 바코드 그림과 함께 인간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정신적 가치마저 수치화, 계량화, 계측화하려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논평한 것이다. 자본의 논리란 언제나 질적인 것보다는 양적인 것이 우선하는 법이며, 일단 양적인 것으로 환원된 모든 가치(특히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그만큼 통제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일말의 제도적인 책략마저 내재돼 있는 것이다. 물론 바코드 그 자체는 디지털로 인해 가능해진 생활의 편의를 위한 일면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일목요연한 감시와 이를 통한 효율적인 지배를 통해 개인을 억압하기 위한 권력의 기제가 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바코드는 자본주의와 후기자본주의의 시대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아이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동재_캔버스에 콩과 팥_26×18cm×4_2003

이동재의 작업에는 자기 지시적인 요소가 있다. 예컨대 녹두로 녹두장군(전봉준)의 이미지를 재현하는가 하면, 콩과 팥을 가지고 내장기관인 콩팥의 형태를 조형하기도 한다. 또한 실제의 콩과 팥 그리고 쌀을 소립자로 하여 각각 콩, 팥, 쌀이라는 문자를 재현한 것 또한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의 동어반복적인 명제에 기초한 토톨로지(tautology) 곧 동일성의 원리를 말해준다. 이러한 자기 지시적인 요소 자체는 하나의 이미지가 하나의 기호에 일치하는 것임을 의미(콩은 콩이다는 식의 축어적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그 관계가 느슨한 것임을 증명해 줄뿐이다. 예컨대 실제의 콩을 가지고 콩이라는 문자를 조형해낸 그림에서 기표와 기의와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 관계는 기표와 기의와의 관계이기보다는 오히려 기표와 또 다른 기표와의 관계에 가깝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기 지시적인(동어반복적인) 의미와도 어울린다. 이러한 애매한 관계는 콩과 콩이라는 문자가 하나로 중첩된 것에 연유한다.

이동재_캔버스에 콩과 팥_28×120cm×3_2003

그리고 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 존재를 다의성 속에 풀어놓는다. 부연하자면, 그 그림은 콩(실제)이기도 하고, 콩이라는 문자(기호)이기도 하고, 이와 동시에 일정한 색채와 질감 그리고 심지어 두께마저 가졌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미지(재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딱히 무엇(예컨대 콩)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이미지를 매개로 한 실제와 재현과의 전통적인 관계마저 흔들어 놓는다.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흑미를 이용하여 텍스트의 형식을 재구성한 작업 역시 이미지(재현)와 텍스트(기호) 그리고 흑미(실제)와의 중층화된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동재_투명수지에 색을 입힌 쌀_40×40cm×25_2003

작가는 흑미를 이용하여 일련의 초상화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들은 한눈에도 디지털 프린터 특유의 무미건조하고 평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디지털 프로세스의 픽셀처럼 흑미 한 톨 한 톨은 이미지를 공고히 하기보다는 그 이미지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든다. 모든 종류의 소립자는 그 자체가 마치 브라운관의 주사선이 만들어낸 이미지처럼 거의 허상에 가까우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뿐인 덧없는 이미지에 봉사한다. 그만큼 기계적인 이미지 그리고 영상 이미지에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있는 흑미는 디지털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보충한다. 이를테면 생명, 생태,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아날로그적인 물질(물체)을 보충해준다. 그리고 수면(水面)을 재현한 또 다른 작업에서 느껴지는 일말의 낭만주의적 감수성이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증폭시킨다. ■ 고충환

Vol.20030521b | 이동재 개인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