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507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2층 Tel. 02_733_6469
웃음과 우울 그리고…_풍경사진의 문화 현상학 ● 최원석의 풍경사진들을 둘러보는 일은 한편의 블랙 코미디를 관람하는 일과 유사하다. 처음에 그것은 카메라가 포착하여 보여주는 풍경의 조악함과 유치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자아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웃음이 지나간 뒤에 따라오는 건 모르는 사이에 감염 당한 씁쓸하고 무거운 우울이다. 이 웃음에서 우울로의 반전은 무엇 때문일까? 최원석의 사진을 감상하는 일은 아마도 이 감정의 뒤집어짐을 숙고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러한 역설적 사진경험 안에서 이 나라의 문화현상학을 읽어내는 일일 것이다. ● 최원석의 풍경사진들이 보여주는 이 나라의 문화현상학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몇 겹의 시각이 필요해진다. 우선 문화 인간학적인 시각으로 그의 사진들을 읽을 때 우리는 문화 생산력과 인간의 상상력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이해하게 된다. 즉 문화 생산력이란 꿈 혹은 소망이라는 이름의 비물질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구체화하고 물화 시키는 호모 파버의 미적 능력임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문화사적 시각에 의지해서 이 나라의 문화가 어떻게 중심이동을 겪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많은 문화사가들이 도식화하여 보여주듯 우리의 문화도 신화 (단군상)에서 종교 (불상)로, 종교에서 역사 (이봉창/안창호)로, 역사에서 시장자본주의적 문화산업 (마를린 몬로/미키 마우스)으로 중심이동을 하여 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문화비판적 시각을 동원하여 그러한 문화중심의 이동이 문화 생산력의 내재적 발전이 아니라 당대마다의 지배문화 이데올로기와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때문에 문화란 한 시대 구성원들을 지배적인 이념과 제도 안에 구속시키기 위해서 고안된 정치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이며 문화는 불편한 것이라는 프로이드의 문화진단에 거부감 없이 동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위 포스트 모던적 시각을 빌려서 최원석의 사진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모던의 문화론을 결정하는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탈중심의 문화라면 최원석의 풍경사진들이 보여주는 상징적 조형물들의 몰중심적 퓨전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당대 문화가 부정적 포스트 모던 문화론의 좋은(?) 모델임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즈음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시각을 접어두고 웃음과 우울의 반전이라는 주관적인 사진 경험으로 되돌아가 다시 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최원석의 풍경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이 감정의 역설은 정작 무엇 때문인가?
이 감정의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풍경에서 눈을 돌려 풍경을 구성하는 조형물들 하나하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개개의 조형물들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고유한 의미 때문에 상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최원석의 사진 속에서 그 조형물들은 그 어떤 강압적인 손에 의해서 저마다의 고유한 영역으로부터 탈취되어 인위적인 낯선 영역으로 강제 수용되고 있다. 그 인위적인 영역의 이름이 시장이라면 시장으로 고유한 개체들을 강제 수용하는 강압적인 손은 아마도 도구주의적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시대의 평범한 욕망일 것이다. 도구주의적 욕망 앞에 개체의 고유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는 자본의 논리를 따라 도구화되고 상품화되기 위해서 차용될 뿐이며 시장의 논리에 따라 다시 폐기될 뿐이다. 그래서 불상은 절에서 끌려 내려오고 돌하루방은 고향에서 추방당하며 광개토대왕은 아파트의 수문장이 되고 마를린 몬로와 미키 마우스는 태평양을 횡단하여 동방의 나라로 건너오지만 때가 되면 재고품처럼 다시 시장 밖으로 폐기되어 버려진다. 최원석의 사진들로부터 받아들이게 되는 우울은 이러한 형상물들의 자본주의적 운명을 우리가 엿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나 자본주의적 운명의 대상이 과연 말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조형물들뿐일까? 전통을 상실하고 의미를 탈취 당하고 기억을 몰수당한 채 오로지 시장이라는 화려한 허허벌판으로 내몰려 소비주체로서의 역할만을 강요당하는 우리 또한 도구주의적 욕망의 대상은 아닌가? 무력하게 방치 당한 형상물들처럼 우리 또한 이 나라의 사회와 문화 위로 범람하는 자본주의적 욕망 앞에서 자신을 방어해 볼 길 없이 무력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얼굴이 풍경이라면 풍경은 얼굴일 것이다. 주변의 건축물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남은 사진 속의 텅 비인 풍경, 그 황량한 풍경은 결국 우리들 자신의 얼굴이며 풍경 앞에서의 우울은 모르는 사이에 소비문화의 대상으로 전락한 자신의 얼굴과 만나는 우리들의 아픈 자기확인일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재현이면서 재현 이상이다. 보여주는 것이 모두라고 말하면서 더 많은 어떤 것을 보여준다. 최원석의 풍경사진들도 예외는 아니다. 웃음을 우울로 변압하듯 그의 사진들은 우울 너머의 그 무엇을 또한 연상케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최원석이 인물상들과 더불어 포착하는 배와 비행기 그리고 종이학 등의 인공 구조물들이다. 산 속으로 끌려 온 여객선, 땅 위에 묶여버린 비행기, 철물 속에 감금당한 종이학 - 이들은 모두 떠나지 못하고 날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구조물들 모두의 속성이 여행이라는 걸 우리는 뒤늦게 기억한다. 그 기억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이 상실해 버린 욕망에의 기억이라면 어불성설일까? 롤랑 바르트는 사진 체험을 위해서는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최원석이 보여주는 황량한 풍경 안에서 우울 대신 꿈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 또한 바르트의 광기를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그 광기를 통해서만 문화의 폐허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진영
Vol.20030510a | 최원석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