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휴식과 생명의 정화

이지은 조각展   2003_0507 ▶ 2003_0512

이지은_천, 조명, 염료_90×67×20cm_2002

초대일시_2003_0507_수요일_05:3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2층 Tel. 02_733_6469

석양의 노을 아래서 반짝이는 은빛물결과 희미한 달빛이 가득한 잠수교에서 바라보는 강물의 흐름…. 우리는 그 곳에서 고요 속에 펼쳐지는 생성과 소멸을 바라본다. 수면위로 확산되어 흐르는 끝없는 파문들,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 그 안에는 나를 감싸안는 어떤 위무가 존재한다. ● 수면 위에 흐르는 생성과 소멸의 파노라마는 어찌 보면 우리 삶의 여정을 닮아있으며 그 곳에서 무심코 드러나는 자아를 발견하여 나를 투영하기도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물과 꿈」에서 무의식적 추억의 단편들이 자신을 구상화시키는 대상이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이지은_석고, 합성수지, 염료_25×25×10cm_2002
이지은_석고, 합성수지, 염료_25×25×10cm_2002

이지은의 작업은 그렇게 물의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무의식의 저편에서 발견되는 자아와 그 자아의 고정된 지점으로서의 의식상태를 작업의 필연적 과정이자 토대로 삼는다. 즉 신체 구조 속에 물이 담긴 형태로서의 아우라를 통해 육체와 정신의 교차지점이 생산해내는 내밀한 의미망을 비밀스럽게 엮어냄으로써 잠재의식과 고정관념에 반향 되는 어떤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방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물과 신체의 이중적 코드를 오브제화하여 그 것의 상징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조형언어의 방법론 사이의 적절한 조화의 지점을 필연적으로 모색하게 마련이다.

이지은_박스, 합성수지, 기포장치, 염료_30×193×62cm_2002

이지은은 '물'이라는 형태와 개념을 구현하기 위해 물의 물질성과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의 합일점을 찾기 위한 연금술적 합일점의 방법론으로서 투명 F.R.P와 Epoxy의 결합을 실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것이 여전히 공정상의 난맥을 남기고 있다 하더라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일정수준의 투명성과 완결성을 보이고 있음은 그가 작업의 프로세스에서 요구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화합물을 직조해낼 수 있는 조작의 용이성을 찾기에 몰두했음을 증거하기도 한다. 그 결과물이 잉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작가가 체험했을 나르시시즘적 환상과 상상 속의 죽음, 그리고 무수한 좌절과 기대의 반복이 심리적 파문과 물결의 섬세한 조정을 드러낼 때 그의 작업들은 죽음 같은 짙푸른 휴식과 생명의 정화를 동시에 흡입한다. 그리고 그 측량할 수 없는 심연의 지점은 우리의 시선을 작가자신의 내적 동기 속으로 깊게 빨아들이는 단서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지은_합성수지, 천, 물, 염료_8×168×32cm, 39×175×12cm_2002

한편 손과 가슴, 얼굴 등의 신체부위를 캐스팅 하는 과정은 정신의 함유체로서의 신체의 즉물적 표출로 읽혀지는데 그러한 시도는 자아의 정체성을 반영하거나 자문하는 매개체로서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실존의 주체인 나의 내면성·일회성을 통한 삶'을 반증하는 장치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 경우 이지은의 파편화된 신체 이미지들은 몸 자체를 행위의 장으로써 미술상의 매체로 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몸을 주제로 욕망과 자유의지의 주체로서의 표현적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신체는 본능적이고 자연 발산적으로 표출되는 자아의 의미가 분열과 해체의 형식으로 강조되고 동시에 실체적 자아의 상실을 비판하는 이중적 전략의 코드를 수반하게 된다. ● 그럼으로써 결국 신체에 담긴 물의 이미지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나 이성의 결과물을 좇는 현대사회 속에서 사고의 보편성과 객관성보다는 주관적 심리의 공간으로 전이되는 지점을 지향하고 있으며, 물에 투영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정신 분열적 황홀경과 착란의 지경까지를 끌어안는 '평정'의 지평을 소망하고 동시에 권위와 높이들을 무화시키는 물의 속성에 기대어 조르쥬 바따이유가 얘기한 '수평성'의 의미를 실천하려 하고 있다.

이지은_박스, 필름, 합성수지, 조명_26×34×34cm_2002

이제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의 고민의 흔적들을 두려움과 설레임 속에 풀어놓는 신예 작가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나 적어도 그의 작업에서 현란한 수사나 무의미한 테크놀로지의 쇼비니즘이 거세되어 있다는 점에서, 표현의 반복성이 주는 다양성의 결핍이라는 숙제를 지적하는 수준에서, 스스로 정화되는 물의 속성을 환기시키는 향후 작업의 충분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이원일

Vol.20030509a | 이지은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