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작가 정정엽_이강화_이성현_윤영섭_고찬규_함명수 조상근_김희석_한은선_박재웅_민재영_안성하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PAINTING_회화 ● 단순히 평평한 2차원 위의 이미지가 회화라면, 지금은 회화가 넘쳐나는 시절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많은 시각물에 둘러싸인 지금 '회화'라는 단어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박물관의 퇴물처럼 취급되고 있다. 지상최대의 가치로서 회화의 깃발을 올릴 필요는 없지만, 회화로만 획득되어지는 예술적 성취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요구하고 싶다. ● 흔히 사진술의 발달과 회화의 쇠락을 연결짓는다. 이미지를 복제할 수 있음으로 시각 예술의 민주화와 대중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막연한 예측은 영화와 TV, 광고, 컴퓨터와 시뮬레이션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시각적 자극으로 증명되었다. 만들어진 이미지는 더 이상 희소하지 않다.
화가의 손과 물감과 천이나 종이가 질척이며 엉겨 만들어지는, 오랜 시간동안 연마하고 실패하여 얻게되는 소묘력, 그리고 소묘적 감각은 우리의 눈을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세련되지 못함에 비해 유일성을 내세워 회화작품의 가격은 얼마나 고가(高價)인지! 이미지 생산에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놓아두지 않는 빠른 스피드와 변화무쌍한 문화 속에서 젊은 예술가들에게 회화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현상의 반복으로 점점 멋진 회화를 만들어내고 누릴 수 있는 경우도 줄어간다.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데 있어 회화가 가진 품성은 이미 20세기까지의 미학으로 마감된 것 같다. 이제, 미술은 있으나 회화는 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우리의 감각과 감성과 이성을 자극한다. 특히, 음악과 미술은 감각의 부분에 호소를 하는 장르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미술에 있어 제작과 감상 모두에게 이성적 접근을 요구하는 수위는 거의 미술=철학, 미술=사회학이라는 도식을 낳게 한다. ● 하지만 회화의 중심에는 '그리는 행위'가 있다. '그리는 행위'는 화가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감을 안겨준다. 화가는 그리는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결과물을 통해 창작자로서의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 회화의 특성상 美를 추구하면서 얻는 또 다른 쾌감이 있다. 그것은 선의 궤적이 이루어내는 미와 색의 조화로움이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발견은 개별 작가들의 고유한 감성을 드러나게 한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타인과 더불어 그 물질(회화)을 매개하여 공감하고 소통하게 된다. 소통은 일단 작가로부터 관람자 순서로 흐르지만, 다시 순환되어 작가에게도 감동을 준다. ● 회화를 통한 공감은 시각이라는 감각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또한 감각을 넘어 심리적, 감정적, 때로는 영혼의 만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basic nature)이 발현된다. 이 공감의 세계 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쾌감이, 시대에 대한 통찰이, 박애가, 존재의 고양(高揚)이 모두 가능해진다.
PAINT_그리기 ● 사진, 영상과 설치미술의 물량 동원과 매체 자체의 새로움을 마딱트려, 회화는 서슬 퍼런 할로겐 앞에 희미한 촛불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자원의 풍요함과 다양함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이유는 이 사실을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 ● 투기대상으로서 받들어지는 슈퍼스타급 회화작품은 열외로 하고 미술, 회화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난 이유는 그만큼 회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 지금은 정보의 시대, 자본의 시대이다. 현대미술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회화의 논리는 이 정보와 자본의 논리로부터 가장 멀리 위치하고 있다. 이때 회화는 차가운 이성과 경제 논리의 정반대인 '회화적 감수성'을 개발하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삶에 관여해야한다.
이성의 회화, 감각의 회화가 아닌 바로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마음의 회화'이다. 이성과 감각과 감성,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야함은 물론이지만, 총체적으로는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회화가 절실하다. ●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경향을 따르는 것과는 무관하다. 예술가들조차 분석과 논리로 삶의 불합리한 부분을 꼬집어낸다. 상처의 시대에 비판의 심연 속에서 단순하고 소박한 이상을 건져 올리는 진지한 믿음과 따스한 감성이 필요한 것이다. 분석과 비판 이전에 고통과 희망을 만나는 일은 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 작품은 회화로서 존재하기 위해 작가의 부단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얇팍한 아이디어는 장구한 노동으로 빚어지는 힘과 겨룰 수 없다. ● 생각과 느낌과 열정은 손의 노동을 통해 회화라는 물질로 화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노동한다는 것의 경건함은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창작도, 교감도, 한시대의 문화도 결국은 일-성실한 노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소묘적 감각은 예술적 노동의 결과물이며, 더 나아가 회화의 완성도 또한 장인적인 노동 없이는 빈약할 뿐이다. 회화는 정보가 아니다. 회화 한 점은 인간의 감수성과 노력의 집결로 이루어진 소중한 열매인 것이다.
PAINTER_예술가 ● 12인의 회화는 청년의 회화다. 20대 말에서 40대 초반까지 10여 년의 터울이 있는 작가들이지만, 회화의 가치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확신이 분명하다. 결과물의 다양성처럼 이들의 관심사와 표현방식 또한 다양하다. ● 작품만 보아서는 기존의 동서양화의 구분은 없다. 재현적이기도 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형식을 실험하기도 하고, 감성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회화를, 자기 작업세계를 만들어내는데 분주한 젊음을 느낄 수 있다. ● 회화는 이들에게 아직도 가볼 곳이 넓은 미개척지다. 아직도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회화의 영역은 먼저 딛고, 많이 밟는 자가 보여줄 수 있으리라. ● 나무를 심는 사람에게 10년은 훌쩍 간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당장 눈앞의 결과물에 따라 움직이는 현대사회의 흔들림 속에 우뚝 서서 회화를 고집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중첩된다. 다 자란 나무의 울창한 그늘과 같은 회화의 깊고 풍요로움을 기대하며 이들의 행보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신혜영
Vol.20030504a | PAINTER PAINT PAINTINGS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