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서다.

임현락展 / LIMHYUNLAK / 林賢洛 / painting.installation   2003_0403 ▶ 2003_0508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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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락 홈페이지_www.limhyunlak.com

창동미술스튜디오 갤러리 서울 도봉구 창동 601-07번지 Tel. 02_995_3720

엄격한 의미에서 임현락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일반적으로 개입하는 인지와 표현의 과정, 대상을 포착하고, 이해하고, 그 이해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자기화 등, 일체의 방식이 거기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상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나무와 대지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을 주체와의 표현적 관계로 끌어들이는 '대상화' 와는 다르다. 즉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고 최종적으로 이름을 부여하는 사후의 과정은 거기에 없다. ● 임현락은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한다. 무엇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그가 이번에 실현하는 것은 나무이며, 그것들은 경험하고 호흡함으로써 실현된다. 여기에는 주체와 객체의 실제적이면서도 관념적인 혼연일체가 있다. 나무는 호흡의 한 단위 안에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언어적 이성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무와 임현락 사이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나무의 신체와 작가의 신체는 미묘하게 교환된다. 나무에는 작가의 호흡과 호흡의 정지가 반영된다. 하나의 정지 동안 가능한 이동과 중단, 곧은 진전과 선회의 마디에 얽힌 힘의 실행들이 접목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모든 것이 다른 종류의 질서 안에 놓이게 된다. 그 질서는 대상의 외관을 파악하는 시각주의자나 그 본질을 파악한다는 관념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나무는 대상이 아니고, 임현락도 단지 행위자가 아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는 결별만큼 소통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시간 안에서 뒤섞이고 하나의 호흡 안에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실현되는 것은 표현이나 묘사, 사유와도 다른 것이다. ■ 심상용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동양화가 갖는 특성 가운데 일필휘지는 독특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붓이 지니는 자동성, 종이와 먹이 자아내는 독특한 선염의 깊이는 동양화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만큼 단숨에 이루어지는 일회성과 집중된 정신의 응결이 동양화가 지니는 매력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최근 수묵화를 추구하는 작가들 가운데 운필의 자동기술과 선염적 표현의 깊이를 체득해 가고 있는 작업이 늘어나고 있어 관심을 끌게 한다. 온갖 실험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기법을 실험의 장으로 끌어내고 있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띈다고 할 수 있다. ● 임현락의 작업은 형식적 실험이 두드러진다. 액자라는 관념에 가두지 않고 나무라는 생명체를 자라나는 형상에 맞춘 화폭의 설정이 인상적이다 천장에 매달린 현수막 같은 긴 천에 그려진 나무들 사이로 빠져가다 보면 마치 숲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양화의 화론에는 나무를 그리되 단순한 외형을 따르지 말고 자라나는 나무를 그리라 했다. 임현락의 작업 역시 생성하는 생명체에 충실하려고 하고 있다. ■ 오광수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임현락_나무들 서다_한지에 먹_가변설치, 크기_2003_부분

온몸에 푸른빛이 감도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어느 날 숲과 나무를 바라보았던 그는 지천으로 있던 갈대를 붓으로 삼고 진한 먹을 물감으로 사용하여 소나무를 그렸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그 이후로 네 번 째의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나무들 서다"인데 이전의 그것과는 또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일찍이 그 이처럼 공간을 잘 이용하는 화가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금호갤러리에서는 좁고 긴 바닥과 높은 천장을 이용하여 그림을 천장(하늘)으로부터 흘러 내렸고 그 방향을 엇각으로 비틀어서 각각의 그림들이 교차되게 보이도록 하는 뛰어난 감각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천창으로부터 유입되는 빚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그 미술관 전체를 커다란 캔버스로 생각하여 그림을 그린 듯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람회를 통해 한국의 동양화단을 강타했습니다. ● 창동에는 총명한 화가들만 모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현대미술관의 직영 작업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14명중의 한 일원인 임현락은 그곳에서 작업한 또 다른 나무들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공간을 읽고, 이용하며, 또 장악하고 있는지가 너무나 궁금하던 나는 그야말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창동을 찾게되었습니다. 역시 그였습니다. 그의 나무들은 바닥으로부터 시작되고 벽을 기어 붙고 더러는 천장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액자에서 탈출한 나무들은 자유로움을 구가하며 사이좋게 무리를 이루고 있는 듯 심심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나무마다 그 농도가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먹의 묽기를 나타내는 단순한 농담이 아닙니다. 바로 원근이죠. 그렇게 됨으로서 옅은 나무들은 점점 숲으로 사라지고 그저 열 여덟 그루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뒤 보이는 숲은 참으로 깊고 깊습니다. 따라서 현실로 보이는 그 벽은 그저 그림을 걸 수 있는 도구 일 뿐입니다. 그 벽에 의지한 그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벽은 어느덧 사라지고 나무들만이 존재합니다. 아니 숲이 존재합니다. 이걸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람자의 고급스런 심안이 아니라 다소곳한 태도와 긴 호흡 일 겁니다. 그러면 누구나 숲은 거닐 수가 있으며 촉감 좋은 안개도 만질 수 있습니다. 분명합니다. 그리고 놀랍지 않습니까? 두 뼘쯤 되는 한지와 시커먼 먹을 가지고 실존의 경계를 여지없이 제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이제 벽이나 천장 따위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혼령처럼 3차원의 한계를 부정하며 가볍게 날아다니는 듯이 보입니다. ● 화가는 불가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가로서의 태도는 이제 눈에 보입니다. 근데 현실에 대해서는..." 임현락 그는 경지에 올라있습니다. ■ 김재관

Vol.20030502b | 임현락展 / LIMHYUNLAK / 林賢洛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