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429_화요일_05:00pm
참여작가 윤명로_송수남_석철주_민병헌_이형우 정종미_정광호_도윤희_정상곤_심현주
'유아트스페이스'는 1973년 개관한 인사동 '삼경화랑'이 2003년 청담동으로 이전하면서 마련한 새로운 전시문화공간입니다.
유아트스페이스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번지 Tel. 02_544_8585
'모호함'에 관한 조형적 탐색 ●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듯, 있는 듯 없는 듯한 도(道)가 바로 '무(無)'다. "천하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기는데, 유는 무에서 생긴다. (天下萬物 生千宥, 有生千無) (_장파(張波), 유중하 외 옮김,『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중 「老子」 40장 재인용, 푸른숲: 서울, 1999, p.38) ● 그림이란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물상(物象)을 헤아려보고 그 속에서 진(眞)을 얻는 것이다. 형태라는 것은 형을 얻어 그 기(氣)를 남기는 것이요, 진(眞)이라는 것은 기질(氣質)이 모두 왕성한 것을 말한다. 모든 기(氣)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形)을 남기는 것이며 상象은 죽는 것이다. (_김종태,『동양회화사상』중 형호(荊浩)의 「필법기(筆法記)」에서 재인용. 일지사: 서울, p.67) ● 동양의 예술사상 속에는 '확정되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에서 미의 본질을 찾으려고 했던 일련의 모색들이 있어 왔다. 그것이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공간' 과 '묵(墨)'의 조형성 이었던 것이다. 비어있는 질료적 바탕조차도 '보이지 않는 형상'의 존재공간으로 보았던 것이며, 검은 먹의 흔적들을 통해 추상적 사유(思惟)의 의미들을 표현해 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들은 사실적 묘사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이 회화의 본질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자연의 이치를 담아내려는 작가의 사의(寫意)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의 예술론에 의하면 철인(哲人)이나 지자(智者)들은 예술이나 기술 혹은 우주에서 어떤 진리를 깨달았을 때 그 진리의 실체에 대해서 "입으로는 말할 수 없고, 마음속에 그 비결이 들어 있다.(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中)"『장자(莊子)』고 하거나 혹은 "그것은 세속인에게 설명하기 어렵다(此難與俗人道也)"「장언원(張彦遠)」는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 요컨대, 마음으로 알 수는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정신으로 깨달을 수는 있지만 분명한 형체로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_장파(張波), 유중하 외 옮김,『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푸른숲: 서울, 1999, p.67) ● 그런데 서양적 사고에서의 진리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만이 참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서양의 실증주의적, 합리적 사상을 낳았고, 확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는 자연과학적 태도는 곧 사실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낳게 된 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사유방식의 다름과 문화적 전통에서 드러나는 '명료함과 모호함'에 관한 미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 다시 말하자면, 선과 악, 인공과 자연, 남성과 여성들과 같은 대립적 구도로 현상을 바라보려는 이분법적 사고가 서양의 실증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한' 것과 같은 불확실성과 미결정성에 바탕을 둔 사유방식은 동양사상에서의 중용론(中庸論)과 중성적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사물이나 대상을 논할 때, 하나의 사물은 그것의 다양한 측면 중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며, 우주 전체와 연관된 부분적 존재임을 인지시켰다. 그래서 중국문화 속에는 어떤 현상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의가 없거나, 그 개념이 정의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다른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즉, 기·음양·오행과 같은 우주를 구축하는 체계들은 자연 그 자체의 우주로서가 아닌 사유된 우주로 보고 이를 객관화된 실제의 세계로 대입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질서에 순종하는 하나의 개체로서, 그 안에 살고 있는 많은 생명체들의 상생과 순환의 법칙 속에 놓인 작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은 자연조차도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유된 자연과 물질적 자연을 엄격히 구분하여 보았던 것이다. 서양에서는 17세기-20세기 전까지는 수학적 엄밀성을 근거로 모든 지식에 명료성의 체계를 부여하려 하였고 이러한 결과 헤겔의 변증법이 등장하면서 '의식의 모호성'을 '철학적 명료성'으로 대치하려 하였다. 20세기 들어서서 아인슈타인은 불확정적인 상대성 이론을 주장했고, 프로이드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새롭게 탐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철학적 진보 속에서 서양인들은 형식과 내용, 의식과 무의식, 과학적 실체와 철학적 사유 등의 문제에 관한 이론을 탐구하면서 실증적 시각을 지켜왔다. ● 이와 같은 사상들이 서양의 회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면서 시각예술의 조형적 조건들 즉 원근법과 투시도법에 의한 2차원적 화면에서의 3차원적 표현 가능성의 탐구, 새로운 물감의 발명, 점·선·면의 기하학적 구성과 같은 외적 실체화를 위한 지난한 탐색들로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회화는 필묵의 선과 농담처리에 의한 시간성과 공간성, 표현된 실체와 바탕 여백과의 조화 등을 우선시 해 왔다. 이 때문에 서양의 회화가 물감과 캔버스와 같은 질료를 표면에 고착시키는 '결합의 예술'이라면, 동양의 회화는 심미적이고 사유적인 '조화의 예술'을 탐색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적어도 19세기 이전 까지는 중국의 사상을 모태로 하였으나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가운데 자생적인 실경산수의 전통을 이어 왔다. 서예와 문인화는 서양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양의 독특한 회화 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직업 화가들의 사실적인 그림과는 달리 철학적이고 지적인 미술로서 사의(寫意)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동양의 회화는 사물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그려내려 하였기 때문에 외형의 묘사나 형식화된 화법에 치중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서구문호의 개방은 우리를 서구의 아카데미 교육과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동기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은 서구미술을 피상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한국적 정서나 미적 전통을 부단히 모색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s)는 우리의 사유적 예술양식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사조라 할 수 있다. 일본인 미네무라 도시야끼(峯村敏明) 같은 이는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동일성의 반복, 침투, 흡수, 중간성의 존중, 전일성의 의지'로 규명한바 있다. 그에 의하면 한국 모노크롬 작품에 나타나는 행위의 반복이나 지나치게 일체화하려는 질료의 포화상태,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전면화 현상은 화면에서 적극적인 일루전을 제거하고 물성을 초극하려는 의지로 표상되면서 독자적 형식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_ 오광수 『한국의 모노크롬과 정체성-사유와 감성의 시대』전 도록 중 미네무라 도시야끼 『한국현대미술의 12인전』도록에서 재인용, 국립현대미술관, 2002)
이러한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보이는 이중성의 모호한 성격이야말로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가 지닌 특성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색채로서의 질료, 물성으로서의 캔버스의 공간을 애초에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데서 한국의 모노크롬 회화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중성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모노크롬 이후 우리나라 현대미술 조류 속에 설치미술이 급부상하고 모든 미술의 영역이 이에 합류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서 서양화, 동양화는 사진, 판화와 더불어 '평면'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화, 서양화, 조각의 장르 자체가 모호해지고 물성에 대한 탐구와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해 진 오늘날의 상황은 현대미술의 경향 속에서 내재되어 있는 한국적 정체성을 모색하고, 조형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하여, 사의적 태도로서의 표현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본 전시는 이러한 시각예술의 상황에 관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하여 동양예술과 서양예술의 사유방식에 관한 차이점을 드러내고자 기획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동양예술의 본질적 특성을 '모호한 표현'과 '공간에 관한 사유의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고, 그러한 경향의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서양화, 한국화, 사진, 비디오 영상 및 설치작가 들을 초대하여 '모호함의 공기' 속에서 드러나는 형상의 문제, 실체로서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사유적 반향, 질료와 공간의 문제 등을 새로운 시각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 신경아
Vol.20030428a | 모호한 空氣_A Vague Scen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