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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422_화요일_06:00pm
금산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35_6317
하얀, 텅 빈 화면 ● 백색의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백색의 구릉 너머에서 미세한 점 같은 이미지가 점점 커지면서 그 형상을 드러낼 것만 같다. 한편으론 어떤 이미지가 지금 막 백색의 구릉 너머로 가뭇없이 자취를 감춰버린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밋밋하기만 한 백색의 화면은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앞으로 전개될 영상들에 대한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가 하면, 이미 끝나버린 영화의 스크린처럼 일종의 허망함을 안겨준다. 이렇듯 하얀 화면에서는 응축과 팽창의 무한한 운동성이 느껴진다. ● 구영모의 하얀 화면은 그저 하얗기만 하다. 어떤 이미지가 있어서 우리의 시선을 붙들지 않는다. 전방위적으로 하얀 그 화면 위에서 우리의 시선은 일순 당혹스럽다. 프레임 안의 어디에서도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그리고 보게 될 것으로 예상했던 어떤 이미지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하얀 그림을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 보게 되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작가가 차후에 여기에다 뭔가를 그릴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렇듯 하얗게 칠해진 화면을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든 그려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얀 화면 앞에 멈춰 선 관객이 각자의 심상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얗게 텅 빈 화면에서는 오히려 무수한 가상의 이미지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보인다.
본질적인 것, 절대회화 ● 플라톤은 미 자체와 미적인 것을 구분했다. 그리고 미 자체를 미의 순수관념에다, 미적인 것을 감각적인 미에다 결부시켰다. (미를 미로서 경험할 수 있는) 감각적인 미를 미의 순수 관념으로부터 유래한 이차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본 것이다. 절대적인 미는 하나의 순수관념의 형태로만 주어지며, 감각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 이렇듯 진정한 실체란 관념으로만 주어질 뿐, 감각적인 형태(색)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궁극적인 실체, 절대적인 형태, 절대적인 색채의 존재를 가정하는 일종의 본질주의 개념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그 진정한 실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플라톤은 엄격한 수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제시한다. 여기서 기하학적인 형태가 미 그 자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미의 순수관념을 상기시킨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보면 진정한 실체란 감각적이고 주관적이기보다는(주정주의), 객관적인 보편 질서의 추구(주지주의)에 가깝다. ● 이처럼 구영모의 작업에 대한 태도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나와는 무관하게 저 홀로 있는 미의 본질, 회화의 핵심, 존재의 궁극을 지향한다. 그러면서 감각의 흔적을 가능한 한 지우는 대신, 순수관념을 상기시키는 최소한의 회화적 장치에 자기를 몰입시킨다 (예술은 감정을 추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적인 싸움의 장인 것). ● 비록 겔 성분의 초벌안료를 여러 번에 걸쳐 반복 덧칠하는 등의 상당한 수공의 과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작가의 이번 작업은 거의 밑 칠된 캔버스 자체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캔버스 자체의 드러난 평면성에서 회화의 본질을 본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생각과도 통한다 (텅 빈 캔버스가 회화의 본질을 드러내 준다). 그에 의하면 회화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평면이란 조건인 것이며, 따라서 틀을 짜서 고정시킨, 아무런 이미지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 캔버스 자체가 이미 하나의 그림인 것이다. 평가적 의미는 도외시하더라도 적어도 분류적 의미에서 볼 때 빈 캔버스 자체가 이미 회화로서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회화를 분류적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회화의 본질과도 통하는 것으로서, 주관이 개입되기 이전의 회화의 순수 조건을 형용한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절대회화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절대란 순수한 감성의 극치를 말하며, 이를 실현한 절대 회화는 평면과 여기에 결부된 최소한의 기하학적 형태로만 구성된다. 말레비치는 절대회화가, 마치 무한을 향해 열려진 의미의 광활한 바다를 형용하는 절대 세계가 그런 것처럼, 더 이상 하나의 대상에 대해 일대 일로 대응하지 않는 비재현적인 회화를 실현한 것으로 본 것이다. ● 말레비치의 이런 일련의 시도는 마침내 흰 바탕에 흰 사각형을 그려 넣은 그림으로 이어지며, 이로써 '비대상적 표현이 철학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선언하게 된다(이는 흰색과 사각형이라는 제한된 요소로 구성된 작품을 통해서 하나의 순수한 사물을 추구한 로버트 라이만의 흰 그림과도 통한다). 이 말은 그대로 그 시효를 다한 감각적 예술이 다음 단계인 철학 (순수개념)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논했던 헤겔의 '예술종말론'을 상기시킨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감각적 형상을 떠나서는 예술적 표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순수개념으로서의 예술 자체에 대해서는 사실상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일련의 논의들은 회화적 프로세스에 간여하는 감각적 형상화와 순수개념과의 상호 포괄적인 관계를 말해주며, 최소한의 미술 (미니멀리즘) 혹은 개념미술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 그런가하면, 구영모의 회화에서 드러난 캔버스의 질료적인 조건 (말하자면 캔버스 표면의 미세한 결이나 벽면에서 일정하게 돌출돼 보이는 사각형의 입체) 은 회화가 더 이상 회화이기를 포기하고 (특히 일루전적인 회화), 그저 임의의 물체가 될 때까지 회화의 조건을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도널드 저드의 '특이한 오브제'나 '기본구조'와도 통한다 (예술작품은 사용된 재료의 질에 의해 규정될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특히 '기본구조'에 대한 저드의 생각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과도 사실상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회화의 절대치를 넘어서 ● 그러나 구영모의 작업은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일체의 재현적 암시를 부정하는 한편, 회화의 조건을 하나의 순수한 그리고 가치중립적인 물질적 조건에 결부시킨 프랭크 스텔라의 전언을 넘어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이미지란 어떠한 식으로든 무언가를 암시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회화란 하나의 순수 형식의 장일 뿐만 아니라 의미의 장이기도 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비록 그것이 아무런 이미지가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화면, 텅 빈 화면으로 드러날 때조차도 그러하다. ● 공간적으로 볼 때 전시장의 하얀 벽면에 걸린 작가의 하얀 그림들은 프레임 너머로까지 확장돼 보인다. 하얀 벽면과 하얀 그림을 경계짓는 액자조차 없다. 다만 그림의 틀이 벽면에서 조금쯤 볼록 쏟아나 보일 뿐이다. 벽면에서 불과 6, 7 센티 정도 떠 있는 화면으로 해서 우리는 그림과 벽면의 경계를 겨우 가늠할 뿐인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품은 사실상 전시장의 벽면까지 자신의 작품으로 어우르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전시장의 벽면이 바탕 화면이 되고, 작가는 그 화면 위에다가 크고 작은 하얀 사각형의 이미지를 얹고 있는 것이다. ● 이렇듯 공간적으로 하얀 화면은 자기 외부 곧 건축적 공간으로까지 확장될 뿐 아니라, 의미론적으로도 그것은 무한공간 무한세계에 맞추어진 낭만주의의 관념을 자기 내부에 불러들인다. 그 낭만주의 관념의 동양적 회화관에 해당하는 것이 여백이다. 그리고 그 여백은 하나의 이미지로써 붙잡을 수 없는, 하나의 언어로써 고정시킬 수 없는 모든 암시적이고 부유하는 그리고 덧없는 이미지와 언어를 향해 열려 있다. 말하자면 앙드레 말로 식의 침묵의 언어를, 상상의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현실적인 (그러면서도 하나의 암시로서만 존재하는) 장소인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지워진 회화의 영도 (zero degree) 지점은 아이러닉하게도 모든 가능한 이미지들을 오히려 자기 안쪽으로 불러들인다. 그 가능한 이미지들은 불가 (佛家) 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 (색) 는 일시적인 모습일 뿐 사실은 그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거의 즉물적으로 대변해준다. 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모든 감각적인 이미지(형태)란 사실 순수관념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이런 감각적인 이미지를 지워 나가는 과정이 순수관념에 이르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의 고승들의 면벽좌선 (面壁坐禪) 을 연상케 한다. 한지가 발라진 선방 (禪房) 의 하얀 벽면을 마주한 고승들은 하얀 벽면을 통해 먼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하얀 벽면에 반추된 자신의 욕망과, 그로부터 수반되기 마련인 희로애락 (감각적인) 을 죽여나간다. 하얀 벽면이 그저 하얀 벽면으로 남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그곳에다 투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될'때까지. ■ 고충환
Vol.20030423a | 구영모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