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409_수요일_06:00pm
갤러리 아트링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1번지 Tel. 02_738_7381
부유하는 것은 찰나이자 감각이다. 그러나 부유하는 것은 그 중심이 무한에의 존재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부유하는 것의 중심을 알아차릴 때, 그때 부유하는 것은 숭고하다.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불명료하지만 그 일상의 일들을 모아보면 어떤 의식의 흐름을 알 수 있고 자신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표본이 된다. 일상은거대한 담론과 다른 것이나 의식의 시작과 끝이므로 나를 지탱하는 축이며 나를 보여주는 숭고의 미학이다. 현대미술이 근대성이란 프로젝트로 자신을 미화하고 포장할 때 그것은 혁명이고 과거와 결별하는 눈부신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즘과 이즘의 중첩을 요구하며 하나의 미학적 패턴을 중요시할 때 개인의 찬란한 의식은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일상을 바라보는 이유는 일상이 미술사의 중심용어로 등장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보편적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필자는 이보순의 작업을 눈여겨보게 되었으며 작품해석의 중심을 찾게 되었다.
이보순의 화두는 '일상적 인간과 사회, 그 부드러움과 딱딱함이다.' 여기서 작가 자신은 우중의 한 생명체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일체의 의식활동을 표상화 하고 조형화 한다, 표상화는 작가가 자신의 상징성으로 절대적 자연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기저를 이루지만 이야기 속의 작가는 주관적 심경의 토로가 아닌 제3자로서 객관화된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객관화된 모습은 나의 이웃이며 나의 고장이며 자연으로 눈을 뜨면 볼 수 있는 나의 일상적 인물과 주변의 것이다. 주변의 것은 비록 중심은 아니지만 작가자신의 존재를 일깨우는 생의 증거물들이며 작가의 시선은 여기에 머무는 것이다. 조형화는 주어진 표상화의 재발견과작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원천인 셈인데 작가 자신은 선과 면 그리고 재질감의 활용을 극대화하고 있다. 선은 시각적 형상을 함축하여 재구성하는데 인간에 대한 선묘가 분명하고, 면의 분할은 다양하지만 중첩의 효과가 이루어져 분석적이고 비례적이기보다는 동양적 이미지를 구성하여 작가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재질감은 다양한 기법의 활용에서 둔탁하기도 하고 콜라주의 형태도 있으나 단아하고 청아한 도자기를 연상케 한다.
이 같은 이보순의 회화를 굳이 용어로 정리하자면 일상적 깊이로서의 표상과 동양적 이미지의 조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을 말한다면 화면의 중심에서 주변까지 그리고 주변에서 중심까지 깊이 스며든 작가의 예술적 감수성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바, 즉흥적 재즈처럼 솔직한 고백의 수필처럼 다가와 우리를 일상의 깊이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 회화적 과정과 여정이 하나의 완성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거나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찬양하는 웅장한 교향곡이나 스팩타클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실험성을 벗삼아 무미건조한 일련의 화필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요 자기 답습의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보순의 작업현장을 지켜보건대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나 자기 탐닉의 언어를 남발하는 도도함보다는 주어진 일상과 현실에 충실하는 자신의 일기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 그 따스함이 창작의 근원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염려되는 것은 작가로서 고백을 이번 전시가 앞으로 작업에 대한 부담과 실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여지껏 견지해온 자신의 미학적 순수성과 회화적 순수성에 대한 믿음과 일관성을 유지하리란 기대는 작가에게 요구하는 지나친 욕심은 아닌 듯 하다. 그림은 자유이다. 자유는 구속되지 아니한 상태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림 속의 자유는 작가 자신의 교유함이 인정되는 시각적 환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의 과정은 숭고하며 결과는 존엄하다. 철학자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는 "어느날 갑자기 회개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유한을 넘어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한순간의 섬과에 의해 우주에 대한 감정이 용솟음 치고 순간적으로 그 빛에 압도되는 경험이 가능하다면, 나는 무엇보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봄으로 해서 이와 같은 기적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필자가 작가 이보순에게 거는 기대는 위대한 작가의 탄생이 아니다. 고고하게 독존하며 세상의 아픔을 지고 가는 거장에게 바라는 바람은 더욱 아니다. 작가의 만남이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듯이 생의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이웃하는 작가에게 거는 그런 바람이다. 이것이 일상의 위대함이며 일상의 가치가 아닐까. 작가는 이 같은 소중함의 의미를 그동안 자신의 화폭에 뿌려 놓았던 것은 아닐까? 또 우리가 작가의 작품을 유심히 살피게 되는 이유중의 하나는 일상의 넓이가 아닌 깊이로의 여행에 기꺼이 동행자가 되기에 그런 것 아닌가! ■ 이유상
Vol.20030409b | 이보순 채색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