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409_수요일_05:00pm
인사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9-23번지 B1 Tel. 02_735_2655
정주연은 도시를 그린다. 「거리」,「마음의 거리」,「거리에서 보다」,「거리에서」,「움직이는 거리」,「거리에 서다」 등 그의 작품은 모두 도시의 거리풍경을 소재로 하고 있다. 도시를 점거하는 온갖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가로등,간판,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각종 표지판,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 도로 등등.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는 이런 공간에서 산다. ● 어떤 사람에게는 장사터요 치열한 경합장이요 놀이터가 되며 어떤 사람에게는 광활한 사막이요, 인간사냥터다. 아직도 연탄에 의존하며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고급주택에 사는 부유층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서울의 모습이다. 도시는 이처럼 갖가지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림을 그리는 정주연은 어떨까? 그는 도시에서 창조적 영감을 얻고 도시는 그에게 활력을 준다. 올덴버그는 도시를 '살아 있는 미술관'이며, 로젠퀴스트는 '아이디어의 산실'이라고 했다. 사람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미술가에게 도시는 창작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공간임에 틀림없다. 이전에도 도시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했다. ● 도시와 예술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다. 암스텔담없이 렘브란트를 생각키 어려우며 뉴욕없이 뉴욕스쿨이니 팝아트를 생각하기 어려우며 또 음악으로 치면 비엔나 없이 하이든, 모짜르트 혹은 베토벤을 머리에 그려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술도 문명과 같이 도시와 관련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도시를 지었다면, 예술가는 그 도시속에서 창조의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정주연은 말하기를 "거리는 자유로움을 향한 하나의 출구"라고 한다. 마음이 답답하고 싱숭생숭할 때 거리로 나가 이곳저곳을 누비며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한다고 한다. 도시에서 태어난 그로서는 다른 어디보다도 도시가 편안함을 제공한다. (물론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농촌을 더 편안하게 생각할 터이지만 말이다.) ● 오늘의 서울에는 50.60년대 부르던 노랫말 '앵두나무 우물가의 동네처녀'를 유혹했던 도시의 꿈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는 발전했고 따라서 사람도 변했고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변치않는 것도 있다. 여전히 도시는 젊음으로 넘쳐나고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긴다. 앵두나무나 우물은 사라지고 없지만 카페나 커피숍, 그리고 각종 문화시설에서 연인들의 사랑은 이어진다. 도시는 삶의 주거공간이요 터전이다. 정주연은 그런 도시를 아끼며 사랑한다. ● 그의 그림은 거리를 자세히 묘사한 것에서 변형시킨 것, 그리고 추상화시킨 것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그림은 수묵의 담백한 맛과 선묘를 중심으로 하여 조형적으로 차분히 접근해간다는 특성을 지닌다. 직접 이미지를 그린 몇점을 빼고 대체로 그는 특수한 방법으로 수묵화를 제작한다. 가령 종이 뒷면에다 먹지를 깔고 그 위에 장지를 올려 손으로 부비거나 누르거나 나무젓가락같은 도구로 소묘를 하는 식으로 형태나 선을 만들어낸다. 발묵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경로를 거친다. 그의 발묵은 한지 위에 직접 붓을 대어 우려내기 보다 종전처럼 뒷면에 나무화판을 대고 그위를 눌러 형성된 것이다. 일종의 프로타쥬 수법이나 프레스 기법을 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은근한 효과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앞면의 발묵효과가 직접적이라면 뒷면의 먹지를 통한 효과는 간접적이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연성이 강조된다. 그만큼 작업공정이 까다롭고 조심스럽다.
만일 겉에서 표면처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면봉에 먹을 묻여 사용하거나 콜라쥬를 한다. 면봉을 사용할 때는 화면에 액센트를 주기 위함이며 콜라쥬의 경우 밋밋한 표면에 변주를 꾀하기 위함이다. ●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그의 화면에 조금 시선을 가까이하면 독특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 표면에 흠집이 나 있으며 심할 경우 종이가 뜯겨져 나간 흔적마저 볼 수 있다. 이런 표면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정주연이 주로 긁거나 누르거나 찍거나 문지르는 식의 제작적 특성 때문에 생성된 자연스런 결과이다. ● 정주연의 도시묘출은 작가의 대상을 보는 주관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사람같이 생겼다고 느껴 자동차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에 자동차 운전실습을 마친 그로서는 자동차가 새롭게 보이며 우리가 못 본 것을 볼 수도 있다. 자동차의 생김새에 대한 흥미 때문에 정주연은 자동차를 여러 각도에서 그린다. 앞이나 뒤에서 혹은 옆에서 본 모습을 그린다. 더러는 번호판만을 그린 것도 있으며 그리다 만 것처럼 대범하게 생략하여 처리한 것도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느낀 점은 정주연은 보통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가운데서 그가 느끼는 정서를 펼쳐내고 있다는 것이다. 도시는 불편하며 화약고같이 위험한 곳이지만 그는 도시를 긍정적으로 보며 건강하게 가꾸어가는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약동과 에너지가 넘치며 따라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도시를 방치하거나 무작정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 맛 나는 곳으로 보존하고 성장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 또하나 느낀 점은 그림이 어렵지가 않다는 것이다. 아무나 보아도, 어려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다. 그림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독특한 그림수법은 독창적이다. 그만의 언어가 있는 그림을 갖추기 위해 이제 막 도약대에 오른 정주연의 작품을 주의 깊게 지켜보기로 하자. ■ 서성록
Vol.20030408b | 정주연 채묵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