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402_수요일_06: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신관 1층 Tel. 02_733_6469
우리는 환경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 환경은 단순히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고 제도이며 관습이다.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규정지으며 가능한 한 그것에 충실해지고자 한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예술가로서 등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아를 통해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한다. 이제 환경은 더 이상 나를 둘러싼 단순한 외적 환경이나 보편적인 일반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이며, 또한 나의 내적 세계이다. ● 박은선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우리를 둘러싼 환경적 공간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통로나 바닥, 계단과 같은 건축적 요소를 암시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에서 비롯된 자신의 정신 세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건축적 구조물이 그가 자신의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의 결과물임을 감지해낸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내적 시선은 시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그는 관람자들이 환경적 실제 공간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건축적 구조물들을 구성, 설치한다. 우선 그의 「통로」와 같은 작품을 보면 파라핀 덩어리가 벽돌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양 벽을 이루고, 그 가운데를 관람자들이 지나가도록 되어 있다. 그 벽은 우리를 안전하게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삶의 공간 대신 파라핀과 같은 연약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고 우리의 신체를 외부를 향해 노출시킨다. 이렇듯 작가는 일상 공간을 기묘하게 변형시킴으로써 그 속에서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 박은선의 작품에서 재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액체와 고체의 양성을 지닌 파라핀은 환경 속에서 부서지기 쉽고 흔들리는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를 은유한다. 그리고 속이 비워진 파라핀 블럭들의 집합은 깊이로서 빛을 함유하여 부드럽고 모호한 느낌으로 이 은유를 가중시킨다. 이러한 것은 또 다른 작품 「통로」에서 사용된 실리콘이라는 재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약한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는 질료와 그것이 지닌 반투명한 색조는 뚜렷이 파악되지 않는 외부 세계에 대한 긴장감과 불안정한 방어심리를 대변한다. ● 파라핀이나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벽면, 야트막한 기둥들 위에 설치되어 천장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거즈로 된, 관람자의 어깨 위를 에워싸는 사각 틀 등은 관람자의 신체를 통제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일반적인 건축적 공간을 연상시킴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이 지나치게 낮거나 높거나 또는 좁아서, 관람자는 그 곳을 지나갈 때 신체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심리적 자극을 불러오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통로의 특성상 이미 들어선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데다가 그 통로가 지닌 방향의 전환, 좁다가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는 등의 환경의 물리적 변화 속에서 관람자들은 신체에 가해지는 다양한 자극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에 따라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지면과 거의 비슷한 높이로 파라핀 판재를 깔아놓은 「바닥」과 같은 작품은 관람자들이 그 판재들 사이, 즉 전시장 바닥을 걸어가면서도 파라핀 판재를 밟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시킴으로써 주변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불안 심리를 한층 촉발시킨다. 그러다가 마치 방과 같은 사각 틀 안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되지만 그것도 잠시, 동시에 그것이 사방으로 뚫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에 있는 부유하는 자아를 확인한다. 이러한 것은 「계단」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사실 관람자들은 그의 계단 위로 감히 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평지를 걷는 것과 달리 특별한 신체적 압력이 요구되는 계단 오르기는 관람자들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상상 속에서 계단의 부서짐은 바로 부서지는 자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물리적 공간이면서도 심리적 활동이 일어나는 감각적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환경에 대한 관람자의 일상적인 관념과 실제 경험이 만나는 지점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박은선의 작품에는 관람자의 신체의 움직임, 신체에 통제를 가하는 공간, 그리고 그 체험에 요구되는 시간이 내포되어 있다. 작품들이 현존하는 불변의 '오브제' 상태로 전시장 안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관람자가 실제로 체험을 해야만 작품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시간성을 함유한 '과정'이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각 작품은 각기 고유의 환경을 만들어내면서도, 관람자들이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도록 동선을 고려하여 설치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을 하나의 전체적인 상황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따라서 작품과 작품들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들 역시 단순한 허공이 아닌 관람자들의 경험의 장소이다. ● 이와 같이 박은선은 자신이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관람자들에게 몸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마침내 "세계를 신체로 경험"하는 것을 성취한다. 그리고 인간과 교류하며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 작품을 통해 그는 세계의 문턱에서 머물러있는 자아가 아닌, 세계 속에 있는 자아를 구현한다. ■ 박숙영
Vol.20030406b | 박은선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