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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403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심철웅_마리온 세베스타 Marion SCHEBESTA_김병직 크리스티안 놀팅 Christian NOLTING_한계륜_김민선&최문선(mioon) 하르트무트 스톡터 Hartmut STOCKTER_이한수
한전프라자 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전력문화회관 1층 Tel. 02_2055_1192
과학과 미술의 공통점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발달이 에너지의 적절한 활용에 있었다면, 미술은 그 에너지를 시각화하고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 예술의 역할을 이해하였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가 제작한 회화와 설계한 잡동사니 기계들을 비교할 때, 그의 기계들은 역학구조와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한 아이디어에 불과 하다. 당시 technology의 한계 때문에 조형물로서 시각적 가치는 별로 고려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한 복잡한 기계 구조와 바퀴 등, 그러한 기계는 섬유를 대량 생산하거나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증기 동력 기관처럼 실용성과 역동성만이 요구된다. 그때 기계의 모습은 우리의 시선을 부드럽게 이끌기보다는 과학이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로 보여지기도 한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기계는 괴상한 물건에서 서서히 경이로운 시각적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디자인과 건축으로 사회를 재건하겠다는 생각은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조형성의 진보와 함께 유토피아 사회를 기대하게 된다. Technology를 실용화 한 것들이 순전히 기계적인 역할만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기계의 형태가 문제되지 않았지만, 이제 기계에서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동력전달을 위한 톱니바퀴와 회전축, 저항을 최소로 하고 속도를 내기 위해 설계된 유선형의 곡선, 역학적 설계에서 나오는 강렬한 직선에서 심미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파리의 에펠탑은 무쇠 덩어리를 쌓아올리는 technology대한 새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다. 철골구조가 지닌 무겁고 둔탁한 금속의 선입관을 벗어버리고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조와 조형적 곡선미를 제시하며 과학의 위용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파리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그 탑의 높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올릴 수 있는 건축술의 잠재력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그 탑이 기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것의 내부에 지탱하고 있는 technology의 시각적 감동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technology에 대한 경의는 Robert Delaunay의 에펠탑 작품에서 강렬한 에너지의 흐름으로 보여지게 된다. 유사한 의미로 동력을 생산하는 피스톤의 운동이 피카비아의 눈에는 넣고 빼는 육감적인 행위로 비쳐지기도 한다.
Technology의 예술성은 또 다른 곳에서 이미 잔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는 것을 재현하고 고정시키는 사진영상 technology이다. 그 사진영상은 시간의 변화 앞에서 '실제 대상이 거기 있었음(In Situ-Roland Barthes)'를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사진이 실재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기계적 도구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기계가 만들어주는 많은 생필품처럼 실용적인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인 영상은 technology를 감춘 채, 영상자체가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영화 또다시 TV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디어 영상은 우리의 행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영상은 점차 우리 사고의 중심에 이르게된다. 이때 이 새로운 미디어는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강렬한 힘을 지니고있음을 보게된다. 그렇지만 작가의 눈에는 다르게 보여진다. 영상을 사용하는 다양한 작업들 중에서 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양면 위에 있을 때 그가 사용하는 technology는 다르게 수용된다. 작가들은 그러한 영상을 규정하기 위해 다양한 그들의 관점과 technology 이용하며, 그들이 새롭게 사용하는 영상은 우리가 보는 것 자체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특히 비디오작가들의 시각은 카메라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상에서 그것의 내재율을 분리한다. 그들은 모더니스트들처럼 모니터와 모니터에 흐르는 영상 technology의 현상적 가치에 집착한다. 따라서 비디오 작품은 영상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사용되는 측면과 영상의 해석적인 맥락이 강조된다. 영상제작이 영화에서 비디오로의 진화는 영상의 '직접성'이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즉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한 이미지의 녹화와 방영, 그것을 보는 시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이 작품의 주제가 된다. 작가는 그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전시장에 나열하여 보여준다. 즉 비디오 설치작품의 특성은 영상의 제작 과정에서부터 결과까지 연결된다. 또한 영상 technology는 계속 진화되고, 영상의 직접성에 비해 그 영상마저 순간적인 조작이 가능한 디지털 방식의 등장은 더욱 매체로서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디지털 technology는 영상을 조작함으로써 실재의 상실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근래의 비디오 작품은 단순하지 않다. 특정 장르로 분리 할 수 없는 복합성을 보여주고 영상과 조형, 시각화의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매체의 변화로만 규정할 수 없다. 비디오 작품의 경험은 매체를 통하여 제시되는 영상과 그 매체를 함께 인식하여야 함으로써 복합적이다. 대부분 관객들은 TV라는 매체에서 일상적으로 영상만을 보지만 그것이 갤러리에 전시될 때 미디어 영상의 제작과정과 전시, 그것을 제작하는 technology를 함께 보게 될 것이다. 파리를 찾은 많은 관광객은 에펠탑을 단순한 기념물이나 상징물로 보고 있다. 그 탑이 19세기 프랑스 철강산업의 자존심이며, 물리역학 technology의 단면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드로네나, 피카비아의 눈에는 그 반영을 보았던 것이다.
요즈음 영상 technology를 사용하면 모두다 비디오 아트처럼 생각하기가 쉽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러한 영상 매체를 사용한 작품들, 근래에 사용되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가 주종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영상 technology의 다양성이 중요하지 않다. Technology의 복합적 사용이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고 재구성하고자 한다. Technology의 진화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변화시킴으로서 우리의 사고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장에서 상품생산 방법의 변화와, 빠르게 움직이는 교통체계, 통신체계, 컴퓨터,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같은 technology는 우리의 사고를 지배한다. 여기에서 우리 자아의 위치를 확인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의 사회 모든 상황이 보드리야르의 생각처럼 우리가 만든 실체(reality)가 없는 가상세계로 빠지고 있음을 무엇으로 판단 할 수 있는가? ■ 조광석
Vol.20030403b | 부드러운 테크놀로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