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으로 바라본 삶의 정체

김영호 수묵展   2003_0402 ▶ 2003_0408

김영호_삶-자아-정체 02-13_화선지에 수묵_72.5×70cm_2002

초대일시_2003_0402_수요일_06:00pm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공평빌딩 Tel. 02_733_9512

北宋代의 미불, 米友仁 父子는 두터운墨點점만을 사용하여 양자강 이남지역의 안개 어린 산과 수목을 묘사하여 '米法山水'로 일가를 이루었다. 이후 습한 먹이 배어든 墨點은 자연과 합일되려는 문인 정신을 담는 넉넉한 그릇이었으며, 먹의 색채로서의 효용은 점차로 그 지평을 넓혀가게 되었다. ● 수묵의 위상이 서양의 재료와 화법으로부터 도전 받던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문인화의 맥을 지키려던 화가들이 끊임없이 제기했던 문제는 먹의 쓰임새에 관한 것이었으니, 과연 수묵은 동양화의 근본을 이룬다하겠다. ● 우리 시대에 이제는 고갈되어 없어졌을 것만 같았던 먹의 생명력이, 김영호의 작품들에서 '자동차'라는 새로운 소재와 결합되어 현대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김영호_삶-자아-정체 2002_화선지에 수묵_168×145cm_2002
김영호_삶-자아-정체 2002-1_화선지에 수묵_168×145cm_2002

안개 낀 산이나 물이 오른 나무대신 배기가스로 흐려진 하늘 밑 회색 빌딩이 가득한 도시에 살고 있는 도회인들에게, 고가도로 밑을 통과하거나 신호등 앞에 줄지어 늘어선 자동차는 폐쇄적인 도시생활을 상징하는 답답한 풍경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이자, 지나치게 가속화된 우리의 산업화과정을 표상하는 이 자동차라는 물건을 우리는 영원히 현대문명의 필요악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을까? ● 김영호의 작품에서 우리는 너무 익숙하여 진부하게까지 보이는 물체를, 새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정감어린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얼핏보면 다 같아 보이는 인간 군상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각별한 관심에 의해 다양한 개체로 다시 태어나듯,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역시 김영호의 신선한 조형적 언어에 의해 새롭게 형상화되었다.

김영호_삶-정체 02-20_화선지에 수묵_32×20cm_2002
김영호_삶-정체 02-17_화선지에 수묵_20×32cm_2002

김영호의 붓과 먹에 의해 포착된 자동차들에서 우리는 비포장 시골길을 터덜대며 달리는 택시를 보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방 한 구석에 함부로 쌓인 장난감 자동차처럼, 도시의 빌딩 숲 속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어진 자동차를 대하기도 한다. 그늘진 고가도로 밑 신호등 앞에서 출발 대기 상태로 정체된 자동차들, 혹은 가파른 비탈길을 비틀비틀 올라가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루하고도 힘겨운 일상과 그 속에 내재한 질주하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전시장을 메우고 있는 실물 크기로 형상화된 거대한 자동차들이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고 정겹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작가의 개인적인 비젼에 의해 '의인화' 된 이 자동차들이 삶의 내면을 소박하며 정감 있게, 때론 해학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김영호_삶-정체-4_장지에 수묵담채_165×135cm_2001

작가는 필선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순수한 수묵의 번짐 효과와 겹쳐진 먹점 들이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소박한 농담효과에 주력함으로써 먹이라는 매체가 갖은 무궁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공들여 꼼꼼하게 채워진 묵점들이 만들어 낸 밀도 있는 화면은 제작과정에 배인 작가적 성실함과 진지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밀폐된 도회 풍경에 정신적 공간성을 부여한다. ● 강렬하고 화려한 것이 인정받고 과정보다는 성과가 주목받는 시대에 꼼꼼한 필치로 일구어낸 김영호의 수묵작업들은, 근대이후 동양화단에 있어 '화두'였다고도 할 '수묵의 쓰임새'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치열한 탐구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 이주현

Vol.20030402b | 김영호 수묵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