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立戱弄 직립희롱

김해민 영상설치展   2003_0321 ▶ 2003_0420 / 월요일 휴관

김해민_직·립·희·롱_프로젝터1, DVD1, 거울4, 스크린4_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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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320_목요일_05:00pm

일민미술관 2전시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Tel. 02_2020_2055

동시성의 예술과 삶의 타임코드, 그 비밀스러운 만남 ●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당신은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것은 언제, 어디서였는가? 그리고 어떤 이미지를 당신은 보았는가? ● 이 질문을 많은 친구들에게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 대답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텔레비전은 가정의 거실에 있다. 즉, 우리는 태어난 날부터 텔레비전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텔레비전과 함께 자라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란 현실성이 없는 질문이다. ● 그러므로 누군가 그것을 기억한다면 드문 경우가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처음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내가 태어난 집에는 라디오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도쿄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가서야 흑백 텔레비전을 사셨다. 그 때 나는 네 살이었다. 그날 이사를 마치고, 아버지는 새 방에서 갈색 상자의 스위치를 켜셨다. 그 상자에서 눈부신 빛이 나왔고, 곧바로 이상한 그림들이 비추어 나왔다. 내 또래 아이들이 화면 한쪽에서 차례로 나와 산꼭대기를 향해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화면의 다른 쪽으로 하나씩 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인기 있던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이 한쪽에서 나와 다른 한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았었다. 그때 나는 텔레비전의 의미-저 너머의 영상-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현존과 부재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경험 중 하나였다.

김해민_不條理한 알리바이_프로젝터1, DVD1, 전구2, 센서1_1999
김해민_發光으로부터의 발광_모니터2, DVD3, 사진6, 전구6, 센서1_1997

김해민의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유년기에 느꼈던 경이로움과 상당히 비슷한 경험을 했다.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그것은 여전히 기적으로 남아있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영화는 특수효과의 기술로 나를 놀라게 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러한 경이로운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경이로움은 피상적인 기술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딘가 더 깊숙한 내면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 김해민의 비디오 아트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한 가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개 우리는 어떠한 작품을 볼 때, 프레임 안에 있는 내용을 보게된다. 비디오의 경우에는 모니터나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가 내용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김해민의 작업에서는, 이미지가 모니터나 스크린에 투사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프레임 너머를 바라보게 된다. ● 「發光으로부터의 발광」에서 나의 눈은 빛을 발하는 사진과 모니터 사이를 움직여 다닌다. 그리고 「不條理한 알리바이」에서는 두개의 스크린 사이 빈 공간에서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리바이를 찾으려 하고 있다. 실제로, 스크린 밖의 공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無)는 아니다. ● 그것은 채워져 있고 긴장이 있는 공간이다. 무엇이 그것을 채우고 있는가? 전기적 파장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스크린과 모니터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된 신호나 파장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대개 '주의(注意)'라고 불리는 우리의 능력에 의해 채워져야 할 무엇인 것이다. ● '주의'는 일본어로 '이시끼(注意)'이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의식을 쏟아 붓는다'는 뜻이다. 여기, 공간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쏟아 붓고 있다. 만약 우리가 김해민의 작품을 볼 때 '의식을 쏟아 붓게 된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김해민 작업의 중심에서 '동시성'이란 현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날 때, 주의를 기울이거나 '의미'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사건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있을 때,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조로 해석이 되곤 한다. 예를 들어 서구 뿐 아니라 동양에서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누구의 탄생이나 어떤 일이 시작되는 것의 전조로 해석되었다. 동시성은 인류가 고대부터 가꿔온 오랜 지혜 중의 하나이다. 근대 합리주의가 이를 미신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만약 과학자들이 동시성의 현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과학적인 발견이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해민_R.G.B 칵테일_프로젝터3, DVD3, 유리잔3_2002
김해민_TV 해머_모니터1, DVD1, 전동장치1_1992/2002

김해민이 샤머니즘 문화에 대해 날카롭고도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샤머니즘은 고대문화 중 하나로서 동시성을 이해하는 지혜로서 사용되고 전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현대 미술 이상의 무엇이라는 점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가 사용하는 타임 코드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연대기적 순서를 뛰어넘어 우리의 시공간의 의식 속에 날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 가운데에 서로 다른 타임 코드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른 두 개의 타임 코드가 우연히 동시에 일어날 때, 갑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 나는 이를 '명상의 예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작품 「Untitled」는 시냇가에 놓여진 조약돌 네 개와 같다. 조약돌 주위의 물결은 레오나르도의 작품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원시적인 문자 형태로 사람의 모양을 만든다. 제목에 쓰일 글씨가 물결에 의해 주어지듯이, 이 아름다운 작품에는 제목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비디오 아트와 샤먼에 의한 의사소통 기술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이곳과 저곳 사이의 공간에 아주 작은 징후들이 나타나는데, 샤먼은 바로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샤먼이 그 의미를 발견해내는 아주 작은 현상으로 나타난다. 2002년에 열렸던 『巫dia - 한국의 미디어아트와 샤머니즘』전시회 큐레이터였던 이원곤은 비디오 아트라는 공간을 'Interspace'라고 부른다.

김해민_50초의 렌더링_프로젝터1, DVD1_2003

다도에서부터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동양 예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공간에 대한 이해 혹은, 'in-between'라고 불리우는 인터스페이스 속에 존재한다. 김해민의 작업은 'in-between'이라는 공간, 그의 '복제(double)' 혹은 다른 나(alter ego)가 태어나는 곳에 그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복제(double) 혹은 다른 나(alter ego)라는 개념이 동시성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복제(double)와 대화를 한다. 그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존이다. 그저 사실상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닌 육체적 의미로서, 바로 그 장소에 피와 살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디오 아트는 화면에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화면 바깥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만남이다. 우리는 동시성이 우리 존재의 의미를 설명해내는 공간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초대를 받는 것이다. 뛰어난 예술이란 이미지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치히로 미나또

Vol.20030323b | 김해민 영상설치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