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321_금요일_05:00pm
갤러리 사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55번지 Tel. 02_736_1447
이혜민은 할머니를 비롯해 조상 대대로 쓰던 천으로 혹은 지하창고에 버려진 옷들을 다시 재단하고 바느질하여 작은 베개들을 만든다. 그는 이 작은 베개를 모아 부드럽고 포근한 표면을 가진 사각의 커다란 쿠숀을 만들어낸다. 이 큰 사각 쿠숀은 벽에 설치되거나 장방형으로 길게 바닥에 놓여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 갤러리에 설치된다. 천 하나하나는 유행이 지나거나, 쓸모가 없고 낡아서라는 이유로 버려진 것들이다. 전통적인 비단색채인 색동이나 원색의 밝고 화려한 천과 부드러운 색의 천으로 구성된 베개는 버려진 것들에서 나왔다기보다 오랜 전통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발견된 아름다움의 조화로 시대를 가로지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혜민은 바느질이라는 현재를 통해 방금 지나간 과거와 금방 올 미래를 포함하는 인간의 본질적 의미인 일상의 지속을 확인한다. '하루하루는 지나가고, 나는 머무른다'는 아폴리네르의 말처럼...
이혜민은 버려진 일상의 평범한 사물을 재창조하여 빛나고 아름다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천들은 더러운 장소에서 깨끗이 다듬어져 다른 천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되며 꼼꼼하게 정리되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이혜민은 작은 베개 안에 또 다른 못쓰게 된 천을 집어넣어 편안하고 포근한 안정된 베개를 만든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버려진 사물들이 재활용되어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별 볼일 없는, 심지어 망가지기까지 한 우리의 일상을 암시하나 그 순간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며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지를 깨닫게 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릴 때 꿈꾸어왔던 거대한 포부와 희망은 평범한 현실과 대치되어 사라져 버리고 반복적이며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는 현실에서 작은 베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꿈꿀 권리와 희망을 일깨워주고 실현시킬 용기를 준다. 일상의 순간이 헛되지 않고 보석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의 시대는 빠르고 급격하게 지나가며 새로움이라는 명분 하에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들은 또 다시 역할을 잃은 채 사라지고 이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인간 마저 도태되어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혜민의 베개는 일상의 행복을 찾아주는 안식처다.
그는 우리가 지나치며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상의 하찮은 작은 소품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 속을 여행하며 새로운 생명체로 만든다.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낸 일상과 순간의 환타지아에 빠지게 된다. ● 거대한 파도의 거품, 폭포수, 소나기를 정면으로 맞는 것 같은 거대한 우주의 경험 속에 빠져드는 비디오작업은 세차를 할 때 차에서 경험하던 순간이다. 용암이 끓어 넘치는 듯한, 뜨거운 온천의 물방울들이 부글거리는 장면은 요리를 할 때 냄비 안에서 물과 기름이 섞여 나타난 현상을 찍은 것이다. 이혜민은 사물과 사물이 만나게 되어 형성되는 관계에 스토리를 만들고 시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완벽한 완성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사물들끼리 관계를 형성시키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완성체가 아닌 진행체로서의 사물은 생명력과 에너지를 뿜으며 주위를 상기시키게 된다. 일상의 소박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찰에서 나온 작위적 연출은 동일하고 평범한 반복으로부터 일탈을 가져다준다. 과거의 선배들이 철학과 정치와 경제 논리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변화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과는 달리 일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그가 늘 곁에 두고 친숙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 역시 이 세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들이며 명분과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주는 것들이다. 작가의 일상은 한 순간 순간 중요한 것이며 예술과 일치된 진정한 삶의 표현인 것이다. ■ 김미진
Vol.20030319b | 이혜민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