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312_수요일_05:00pm
공평아트센타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공평빌딩 Tel. 02_733_9512
흐린 풍경과 까만 정물. 풍경은 왜 흐리고 또한 정물은 왜 까만가. 흐린 풍경은 그저 나와는 상관없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무심한 풍경이 아니다. 또한 까만 정물은 그저 나와는 무관하게 내가 지나치는 무의미한 정물이 아니다. 흐린 풍경과 까만 정물은 나에게는 피상적인 세계의 지평(풍경과 정물)을 내 안쪽으로 불러들여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재맥락화한 내 마음의 풍경이고 정물이다. 흐리다는 것, 그리고 까맣다는 것은 무심하고 무의미한 세계의 지평에 대해 내가 간여하고 개입하여 그 세계의 일부를 내 것으로 취한 만큼의 질량의 흔적이다. 그러므로 흐린 풍경과 까만 정물은 세계로부터 내가 탈취한 유심하고 유의미한 나의 풍경이고 정물인 것이다. 박병춘의 흐린 풍경과 까만 정물 연작은 이렇듯 그가 세계의 지평에 간여하고 개입한 만큼의 질량의 흔적을, 그 변질의 크기를 보여준다.
박병춘의 흐린 풍경 연작은 기억의 풍경 연작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에게 풍경은 시간을 되돌려 기억을 더듬는, 마치 오래된 앨범과도 같은 것이며, 그림 한 장 한 장은 그 앨범으로부터 더듬어 찾아낸 기억의 편린들이다. 여기서 그 풍경이 흐린 것은 기억의 속성 탓이다. 기억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과거에 속하며, 따라서 그 형태는 언제나 최소한의 흔적으로서만 존재한다. 기억은 현존하는 실체로서는 붙잡을 수 없으며, 대신 부재를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불완전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풍경이 흐린 것은 흐릿한 기억의 속성 탓도 있지만, 이렇듯 기억을 환기시키는(과거를 현재화하는) 불완전한 계기 때문이기도 하다. ● 말하자면 작가는 풍경을 시간 속으로 밀어 넣어 그 시간을 변질시키고 있으며, 그 변질된 만큼의(과거와 현재 사이의 벌어진 틈만큼의) 흔적이 흐린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 희미해진 시간 속에서 작가는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그곳'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다. 그럼으로써 무심하고 무의미한 풍경(랜드스케이프)을 유심하고 유의미한 기억의 풍경(마인드스케이프)으로, 시간의 풍경(타임스케이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 그곳의 존재의 풍경(바디스케이프)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흐린 먹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낡은 흑백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빛 바랜 기억과 빛 바랜 시간 그리고 빛 바랜 존재의 흔적을 가까스로 붙잡아 보여준다.
그리고 까만 정물 연작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정물이란 점에서 일단 화선지에 그린 먹그림이라는 수묵화의 기본 틀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림 어디에서도 모필사생이나 발묵의 효과, 운필(용필)이나 여백의 운용과 같은 수묵화에서 흔히 발견되기 마련인 어떠한 결정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작가는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 기물들, 예컨대 우유팩, 도자기, 화분, 휴지통, 성냥갑, 장난감 모형, 심지어 우체통과 같은 각종 기물들의 세부를 생략한 채 완전한 실루엣으로 처리함으로써 외관상 단색조의 검은 평면으로만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여타의 수묵화에서 접할 수 있는 먹그림으로 표출된 부분과 여백과의 조응(호흡의 교환) 대신, 작가의 그림에서는 사실상 추상적인 기호에 다름없는 단색조의 평면과 빈 공간과의 현저한 대비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사물을 이렇듯 최소한의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은 기호에 적응하는 동시대인의 시각경험을 말해준다. 즉, 이런 약화(略畵)된 표현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소한으로만 주어진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실재와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지각하는 관객은 과연 그림(사물의 이미지)을 보는 것인가 혹은 그림(사물의 이미지)의 의미를 읽는 것인가. 그림은 시각적 경험에 조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개념적 경험에 조응하는 것인가 혹은 그 둘 다에 동시적으로 조응하는 것인가. 당연히 그 경계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고,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그림보기와 그림 읽기와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다. 마찬가지 말이지만, 사물을 이렇듯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에는 사물을 대하는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표현을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물의 핵심(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을 드러낸다는, 말하자면 표현의 절약이라는 전략적 측면도 작용한다. 한편으론 이러한 표현의 절약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단 한차례의 필(선, 획)만으로 대상의 핵심에 이르는 전통 문인화의 화법에도 접맥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가하면, 이 일련의 까만 정물 연작 중에 「부라보 똥」이란 그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스크림의 대명사 격인 부라보 콘과 똥의 형태가 갖는 유사성에 착안한 것으로서, 그 둘의 형태를 중첩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단순한 치기나 유머로 생각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작가가 작업에 임하는 중요한 태도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말하자면 일상 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상호간 이질적인 사물들을, 예컨대 음식과 똥을 하나로 결합시켜 사실상 미와 추를, 선과 악을 비롯한 모든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미지는 그 자체 객관적이거나 가치 중립적인 것이기보다는 일정한 가치관과 해석이 결부돼 있으며, 따라서 사실은 자기 내부에 양극을 포함하는 양가적인 것이거나 최소한 상대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사물(이미지)에 대한 비결정적인 태도가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 현실 속에 잠재하는 가능한 형태를(말하자면 부라보 똥 같은) 찾아 나서게 만든다. ● 작가는 그림들을 배접하여 벽에 거는 대신 철봉과 줄을 이용하여 전시장 천장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식으로 설치한다. 이때 그림과 그림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둠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그림의 앞면은 물론이고, 뒷면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런가하면 심지어는 그림을 보는 각도를 달리 함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보여지는 다양한 형태의 시각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는 관객의 시각의 장(시각이 미치는 거리)을 그림의 표면에만 한정시키기보다는, 그림은 물론이고 그림이 설치된 공간마저 그 시각의 장 속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로써 작가는 그림과 함께 동선과 공간 개념을 하나로 아우르는 입체적인 공간설치작업을 실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업 가운데에는 주목할 만한 형식실험들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먼저, 까만 정물 연작을 그리는 작가의 행위 과정을 녹화한 비디오 영상작업에서는 단 한번에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고 표현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칠판 위에 분필로 그린 산수화는 하나의 그림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그리기와 지우기에 노출돼 있다. 이는 마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모래그림에서처럼 이미지에 대한 제의적 해석과 함께, 덧없는 이미지에 대한 공감이 읽혀진다(이미지란 원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지인 세상도 없다). 또한 그림을 벽에 거는 대신 마치 푸줏간의 고기처럼 쇠고리로 걸어 매단 것에서는 그림이 작가 자신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며, 따라서 그림을 매단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을 매단다는 것과 같다(그림은 작가의 분신이며 몸이다).
그런가하면 사방에 산수를 그려 각각 다른 시간대의 장소를 표현한 박스 그림은 산수를 시간의 지평 속에 풀어놓고 있으며, 이와 함께 평면의 이미지에 마치 실재하는 사물과도 같은 질량과 부피를 부여하고 있다. 그밖에도 작가는 전통 산수화를 특징짓는 요소가 용필(필의 운용)이라고 보고, 그 필을 따라서 그대로 오려낸 고무의 파편들 하나 하나를 일일이 화면에 옮겨 붙여 만든 일명 고무산수를 제작한다. 이는 산수화 고유의 선의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평면적인 동시에 입체적인 이중적 화면을 보여준다. 이로써 작가는 흔히 선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식의 용법에 한정된 평면 화법을 그림을 만들고 구축하는, 일종의 입체적이고 건축적인 방법에로까지 확장시킨다. ● 박병춘의 근작은 일련의 흐린 풍경 그림에서 전통 산수화를 시간의 지평 속에 풀어놓고 있으며, 검은 정물 그림에서 사물에다 기호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타의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통해서는 동시대적인 산수화를 실현하고 있다. ■ 고충환
Vol.20030312a | 박병춘 개인展